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5화
“걸을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럼요.”
“이쪽입니다.”
당찬 대답과는 달리 극도의 긴장에 노출되었던 몸은 다리를 펴고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특히, 레이커스가 가리키고 있는 방의 문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난 어떻게든 자연스러워 보이려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휘청.
방금, 납치범에게 쫓길 때는 리볼버까지 쏘면서도 잘만 움직였는데,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는 것 하나가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내 몸은 물 먹은 미역처럼 흐물거렸다.
어쩌면 납치되기 전부터 신고 있었던 신발이 굽이 살짝 있는 구두였던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아직 놀람이 채 다 가시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나는 나무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면을 쓴 사내가 양날 도끼를 바닥에 질질 끌며 그 문으로 들어섰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기억을 떨치려 벽을 짚고 서서 잠깐 숨을 고르는데, 레이커스가 방금 거뒀던 손을 다시 내밀었다.
“네?”
“방금 여기 있었던 그 자식이 당장은 달아났지만, 어떤 술수를 꾸밀지 모릅니다.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 네. 가죠.”
휘청.
다른 쪽 발을 내딛는데, 내 몸은 다시 한번 아래로 푹 가라앉듯 흐느적거렸다.
‘왜 이러지?’
손으로 발을 주무르려는데,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레이커스는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받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듯, 늘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던 미소는 어디로 가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듯한 흉포한 기세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그린 양이 안정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그리 간단히 될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일단 여기를 나갑시다.”
“……그게, 그러니까.”
“잠깐만 안아도 괜찮겠습니까?”
난 내 발을 내려다봤다. 여기가 1층이라면 어떻게든 내가 알아서 걷겠다고 우기겠지만, 3층인지 4층인지 모를 꽤 높은 높이였다.
이렇게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안 듣는 상황에서 마냥 도움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감사히 도움을 받죠.”
레이커스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나를 부드럽게 안아 올렸다.
그는 나를 숙녀보다는 마치 아이 대하듯 비스듬히 안아 올렸다가 다시 한번 고쳐 안았다.
‘분명 내가 본 바로는 샤인도 루나도 별로 안아 준 적이 없던데, 여인보다는 아이를 많이 대해 본 사람처럼 구는 게 참 이상하지.’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의문은 살인마의 목에 팔을 둘러야 한다는 난제 앞에서 금방 잊혔다.
나는 레이커스의 품에 안긴 채 그 끔찍한 나무문을 지나 복도로 나왔다.
내가 갇혀 있던 건물은 슬럼가에 가까이 있는 몰락 귀족의 건물 중 하나였는지, 복도와 계단에는 묘하게 비싸 보이는 부자재들이 보였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먼지와 거미줄로 엉망이었다.
레이커스는 날 안아 든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에서 한 단 한 단을 내려갈 때마다 흔들리는 시야로 주변을 바라보다가 아예 감아 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레이커스에게 안겨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이 건물에 갇혀 있었던 길지 않은 기억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이곳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발조차 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살인자에게 안겨 있는 게 차라리 낫다 느껴질 정도로.
끼이이익- 탁.
대문을 나오는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눈을 반짝 떴다.
희미한 가스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거리에는, 아직 새벽이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거리의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밤 특유의 촉촉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감각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어쩐지 이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레이커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왜 그럽니까?”
“이제 내려 주세요.”
“마차가 있는 곳이 멉니다. 여기로 올 줄 몰랐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어요.”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나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생각했던 대로, 다리도 후들거리지 않았고 손안의 진땀도 이제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높은 건물들 사이로 하늘을 볼 여유까지 생겼다.
희게 보이는 구름 사이로 달이 떠 있는 가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여기 갇힌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오래되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요.”
레이커스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곤 뭔가를 생각하듯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난 의아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여길 빨리 뜨는 게 좋겠다며?’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자면서요?”
레이커스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은 채 나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는 앞장서서 걸으려다가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린 양.”
“네?”
“이번 일은 톡톡히 보상하겠습니다.”
‘어쩌면 내가 빚을 진 것처럼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상도덕은 배운 살인마로군.’
난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커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리어먼드가에 막 도착할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굉장히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리어먼드가의 식솔들은 마차 소리를 듣고 현관에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블리에 씨와 앰버를 비롯한 온갖 식솔들이 안도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에워쌌다.
“아르비체 님!”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괜찮으신 거죠?”
“무사하시죠?”
난 쏟아지는 걱정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앰버가 내게 매달리듯 날 안았다.
“하지만 납치당했다고 하던걸요! 납치라니…… 어떻게 돌아오신 거예요? 흑……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정말…… 정말 걱정했어요. 흑…….”
납치 사건 같은 게 있으면 경찰이나 주위에 알리지 않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여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워낙 경관들이 무능해서, 어차피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걸까?’
난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상황을 한탄하며, 앰버를 마주 안아 주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 울어 주는 건, 미안하긴 하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괜찮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으셨던 거죠……?”
“응. 아무 일도 없었어.”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앰버를 살살 달래고 나니, 이번엔 블리에 씨가 뭔가의 기도문을 읊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오오, 신이시여. 망각의 축복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임을. 당신의 권능에 감사드립니다.”
“블리에 씨?”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나긋하고 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안도가 느껴졌다.
그 둘 외의 다른 식솔들도 차례로 내 손을 꼭 쥐며 반가움과 안도를 표했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끈적끈적하고 보기 싫은 기억으로 가득 채워져 있던 속에 커다란 분홍색 솜사탕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참 이상하지. 이렇게까지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다니. 모두와 너무 많이 친해졌나 봐.’
그 와중에도 블리에 씨는 냉철하게 내가 쉴 수 있도록 모두가 너무 호들갑 떨지 못하게 통제해 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오래지 않아 현관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현관을 지나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루나가 현관 가까이에 놓인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게 보였다.
“어머, 얘가 여기서 왜…….”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블리에 씨가 작게 웃었다.
“스케치북을 보여 주기 전까지는 자면 안 된다고 어찌나 우기던지요. 방에 올라가서 자게 하려고 했는데, 안아 들기만 하면 우는 바람에 그냥 뒀어요.”
그러고 보니 루나의 고사리 같은 손에 스케치북이 꼭 안겨 있었다.
“그랬어요?”
루나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성격은 아닌데…… 검사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오지 않은 내가 나빴다.
난 루나가 너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부드러운 은색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고 담요를 고쳐 덮어 주었다.
“으으음.”
루나가 뒤척이면서 잠깐 손을 펴는 틈을 타서, 얼른 스케치북을 당겨 꺼냈다.
아주 서툰 솜씨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에메랄드 색 크레용으로 그린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엉망인 크레용 그림에서도 참 미남으로 묘사된 것이 루나의 삼촌, 레이커스라는 것도.
루나와 샤인, 레이커스와 내가 함께 담겨 있는 그림인 모양이었다.
‘그냥 집을 그리라고 한 건데.’
별 뜻이 있어서 내준 숙제는 아니었다. 숨바꼭질을 하자고 자꾸 조르니까, 집중력이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숙제를 하나씩 내주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런 그림을 그려올 줄은 몰랐다.
‘루나에게 집이란, 나와 레이커스 그리고 샤인이 함께 있는 공간인 걸까?’
그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돌아서는데, 계단 위쪽에서 금발의 작은 머리가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난 속으로 작게 웃었다.
샤인도 내가 걱정되어서 이른 새벽인 지금까지 잠도 못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깨 있으면 솔직하게 내게 와서 반겨 주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쭈뼛거리는 게 어쩐지 샤인다웠다.
난 샤인을 부르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여기로 돌아와서…….’
나는 스케치북을 루나의 품에 다시 안겨 주고 계단을 오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막 DAY 1을 시작했을 때의 나였다면, 리어먼드가로 돌아온 것을 이렇게 기쁘게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