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4화
푹!
꿰에엑!
인간이 내는 것이라곤 상상되지 않는 기괴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어찌나 크고 이상한 소리인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끝났나?’
뚝, 뚝.
다음 순간, 레이커스의 칼날이 닿았던 곳에서 검은 것이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가면을 쓴 그자는 레이커스를 올려다보며 짓씹듯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애지중지하는 건 맞는 모양이야. 이렇게 꽁지 빠져라 달려온 걸 보면.”
아주 여유 있는 척하며 말했지만, 레이커스의 공격에 꽤 타격을 입었는지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꽤 떨리고 있었다.
레이커스가 발에 힘을 줘 납치범의 목을 더 세게 짓밟았다.
“닥쳐.”
그자는 억눌린 목소리로 끌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이 재밌게 됐어. 천하의 레이커스가 여자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오고.”
레이커스는 그 어이없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발을 들어 가면을 내리찍었다.
빠각!
꽤 큰 소리와 함께 두꺼운 가면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드러난 가면의 단면은 새하얀 석고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둠?’
분명히, 가면 아래에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림자가 있었다.
검이 꿰뚫고 있던 형체조차 순식간에 흐물흐물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그 검은 칼이 꿰뚫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검은 가면과 옷, 그리고 바닥의 널빤지뿐이었다.
인간이었던 것이 순식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소름 끼치는 광경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레이커스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놀라지 않고 칼을 뽑아 들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내리쳤다.
바닥으로 스며들던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휙 방향을 틀어 창문 틈새로 급하게 달아났다.
‘아무튼, 살았다. 살았어…….’
난 잔뜩 굳었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괴상한 그림자로 변한 납치범의 흔적이 창을 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그 모양이 거미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대체 저게 뭐지?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형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의 뒤를 쫓으려던 것처럼 번뜩이는 눈으로 창을 쏘아보던 레이커스가 내 목소리에 퍼뜩 나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레이커스가 당도한 뒤로 계속해서 뒷모습이나 그의 귓바퀴만 보았던 나는 그의 정면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본 적 없이 딱딱하게 굳은, 여유라고는 없는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커스는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썩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늘 가지런히 빗어 가르마를 내던 머리는 흘러내려 이마를 가린 채였고 금욕적일 정도로 꼭꼭 채워 두던 단추들도 순서가 어긋나 있었다.
그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평소의 레이커스가 완벽하게 조형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면, 지금의 그는 어딘가 허술하고 처연해 보이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달까?
앞머리가 숨겨 놓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마를 들춰 보고 싶기도 하고, 벌어진 셔츠의 옷깃 사이를 살피고 싶기도 한, 그런…….
“괜찮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나는 내가 이 상황에서 대체 뭘 감상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내가 얼빠진 목소리를 낸 걸 들은 레이커스는 그렇지 않아도 험하게 긋고 있던 인상을 더 찌푸렸다.
“어딘가 안 좋기라도 한 겁니까?”
레이커스는 곧장 오른손을 휘둘러 검을 없앴다. 왼손의 소매로 검을 밀어 넣는 것처럼 보이는, 저번에도 본 적 있는 이상한 기술이었다.
그러곤 성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양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겁에 질려 있던 내 차가운 볼만큼, 그의 손도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아주 가까이에서 시선이 맞닥뜨렸다.
‘……왜?’
난 조금 놀랐다.
그의 눈은 언제나 아름답긴 했지만 마치 조각상의 그것처럼 항상 건조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레이커스가 웃는 낯으로 그걸 감추고 있어도 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나를 바라보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그 건조함이 보이질 않았다.
항상 그가 두르고 있던 뭔가의 벽이 허물어진 듯한 느낌?
마치 내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총을 쓴 건 아주 영리했습니다. 꽃잎도 당신이 흘린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만, 그래도 총소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오지 못했을 겁니다.”
조곤조곤 건네는 그의 말은 꽤 의외였다.
난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여길 어떻게 찾아왔나 했는데, 총성으로 내 위치를 찾을 만큼 이 근처까지 와 있었다니. 그것도 그 흔하디흔한 꽃잎만 보고!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흘린 거지만 정말로 어디에나 있는 꽃잎을 보고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이커스가.
‘어떻게 그 사소한 단서를 보고 알아챘을까? 새벽이 다 된 이 시간까지 날 찾아다니기라도 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의 눈빛에 시선을 사로잡힌 채로 멍하니 있는데, 레이커스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게 못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는 듯 이리저리 살피더니 날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괜찮습니다. 이젠 다 괜찮습니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잘 버텼습니다. 다 잘했습니다.”
‘아니, 어린아이 달래듯 뭐 하는 거야.’
괜찮다고 말할 생각으로 얼떨떨하게 손을 들어 올리다가, 나는 내 손이 아직 덜덜 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이 무섭긴 했지. 하지만 살인마 자식에게 위로받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 주었던 장면이 눈앞에서 어른거려서, 나는 결국 그를 마주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저 손을 축 늘어뜨린 채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게다가 그의 손길에 어떤 흑심이 있었더라면 불쾌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레이커스는 그저 나를 가볍게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아마 내가 그의 가정교사라서…… 샤인이나 루나를 안아 주는 모습을 자주 보여서 이렇게 쉽사리 안아 준 것 같았다.
나는 내 등을 두드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창문을 가린 널빤지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해도 꿈쩍 않던 널빤지들인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그가 다급하게 날 구하러 온 흔적을 보는 마음이 이상했다.
레이커스가 내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불쾌해야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게 제일 이상했다.
나는 내가 느끼는 편안함 자체가 어색하고 짜증이 나서, 이 평온한 적막을 어떻게든 깨고 싶어서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절 찾아다니셨어요?”
“그렇습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대답했다.
“샤인에게 이야기를 들으셨겠네요?”
“그렇습니다.”
“샤인이 많이 놀랐죠?”
“그랬던 것 같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제가 납치된 거, 알고 있어요?”
“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기라도 한 듯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그의 낮고 울림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가 살인마만 아니었다면 나를 구하러 온 그에게 충분히 감동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저를 구하러 온 히어로에게 사랑에 빠지곤 하잖아.’
그런 것까진 아니라도 호감이라도 편안히 가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난 이렇게 날 구하러 온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것조차 망설여야 하는 처지인 거야? 진짜 하늘도 무심하시지.’
얼굴과 몸매만 놓고 따지자면, 히어로에 레이커스만큼 어울리는 캐스팅이 없는데. 문제는 그의 직업(?)이랄까.
‘정말로, 이 사람이 살인마일까?’
몇 번이고 가졌던 의혹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납치한 사람의 존재 때문에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레이커스가 살인마에다 실종자들을 납치해서 지하실에 가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종자들을 그간 납치해 온 자는 나를 납치한 자인 걸까? 그렇다면 지하실에서 살려 달라고 속삭인 존재는 대체 누구인 거지?’
이상할 정도로 명백한 정황들이 있었고, 플레이어일 때도 그가 살인마라는 것을 확신했고, 게다가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꼴깍.
지하실의 존재를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래, 지하실 이벤트가 개방됐지. 그러니까, 그 이벤트를 보면…… 레이커스에 대한 생각이 좀 더 확실해질 거야.’
레이커스가 범인이라는 확정적인 증거들을 더 알고 싶기도 했고, 어쩐지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으…….”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리 때문에 신음을 흘리자, 레이커스는 뭐라고 생각했는지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난 그 따뜻한 감각에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져 인상을 구겼다.
단둘밖에 없는 공간에서 그에게 안겨 있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심지어 그가 나를 부드럽게 대할 때마다, 뭔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젠 완전히 진정된 손으로 그를 살짝 밀어내자, 레이커스는 곧장 팔을 풀어 주었다.
난 눈앞에 있는 잘난 얼굴을 외면하며 최대한 내면의 경계심을 끌어올리려 애를 썼다.
“이젠 괜찮습니까?”
‘따지고 보면 이 자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이제 저희 여기서 나가죠?”
레이커스는 순식간에 랩처럼 스쳐 지나간 감사 인사를 듣고서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거두고 작게 웃었다.
“이제 좀 그린 양인 것 같군요.”
“네?”
“괜찮아지신 것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돌아가죠.”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창문 쪽을 한번 쏘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