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 죽이지 마세요 52화
연예인을 길에서 마주치면, 거의 다른 인류처럼 느껴지고 후광이 비치듯 보인다고 하잖아. 레이커스가 딱 그랬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에 대한 그 어떤 정보보다 레이커스의 살 떨리는 아름다움부터 생각났다.
그 짜증 나도록 잘생긴 얼굴이 떠오르자 이상할 정도로 호흡이 빠르게 편안해졌다.
‘도대체 난 뭘 겁내고 있는 거야? 그 연쇄살인마 자식하고도 매일 아침 같이 식사를 하고 있잖아. 그 자식하고 같이 드레스도 구경하러 다니고 심지어는 숨바꼭질도 했잖아?’
숨바꼭질할 때를 떠올린 나는 심지어 웃음까지 삐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의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가 떠올라서.
‘맞아. 그때는…… 지하실에서는 무슨 사슬 소리며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리지, 레이커스는 갑자기 나타나지……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는데. 심장 마비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아.’
난 그렇게 무서워하다가 갑자기 헛웃음을 짓고 있는 내가 웃겼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레이커스를 한번 떠올리자 이상하게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우울과 능글맞음이 깃든 그 잿빛 눈동자며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는 그의 긴 속눈썹 같은 것들도 절로 함께 떠올랐다.
잠깐 입을 벌리고 기억 속 그의 얼굴을 한참 감상하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신 나갔어. 정신 나갔어! 지금이 이럴 때야?’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아무튼 패닉에 빠져 있던 때보다 마음의 여유가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납치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을 만들어 줘서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 주다니. 살인마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까?’
나는 레이커스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고서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작게 심호흡했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진엔딩 같은 너무 멀리 있는 목표는 나중에, 정말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생각하자. 지금은 여길 어떻게 나갈 수 있을지부터 생각하는 거야.’
그래.
모든 이벤트에는 반드시 해법이 있다.
해법이 없는 이벤트는 존재할 까닭이 없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나는 습관적으로 무심코 상태창을 이것저것 켰다 껐다 했다.
아이템창과 호감도창을 켰다 껐다 막 눌러 보던 나는 호감도창에서 시선을 멈췄다.
내가 여기 갇혀 있는 사이에, 레이커스의 호감도는 세 번 갱신되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1/396)
호감도 이벤트 : 인형극 개방
호감도 퀘스트 : 지하실 개방]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30/396)]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68/396)]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호감도가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앨라이 쿠스의 편지에서 확인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납치당한 사이에도 호감도가 부쩍 오르는 건 무슨 일인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내가 없으니까 아쉽기라도 한가?’
그의 호감도창을 보는 동안 납치범의 말이 떠올랐다.
‘넌, 레이커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감싸고 도는 꼴을 보인 일이 없다는 걸 모르나보군. 그가 누구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꼴을 볼 수 있다니, 널 죽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지 뭐야?’
……납치범의 말은 레이커스가 나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기라도 한다는 소리인 모양인데.
설령 그게 맞는다고 해도, 살인마의 ‘소중하다’는 감각이 일반인과 같을 리가 있겠어?
‘고맙기는커녕 무섭기만 하다고.’
난 손쉽게 올릴 수 있는 다른 조연들보다도 호감도가 많이 오른 레이커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호감도 이벤트 목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호감도 퀘스트 – 샤인과 루나의 식사 (완료)
호감도 이벤트 – 다과회 초대 (완료)
호감도 이벤트 – 숨바꼭질 (완료)
호감도 이벤트 – 서커스 개방
호감도 이벤트 – 왕실 연회 개방
호감도 이벤트 – 사냥 개방 (제한)
호감도 이벤트 – 고급 부티크 (완료)
호감도 퀘스트 – 지하실 개방]
제한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건 처음이었다.
혹시나 설명을 볼 수 있을까 해서 그 글자를 눌러 보았다.
[이벤트에 접근할 수 있는 시각이 지났거나, 다른 분기점을 선택하여 접근이 제한된 이벤트입니다.]
‘사냥’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섬뜩한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렇게 잘된 일이 없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서 다른 루트는 아직 다 제한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이 반드시 있다는 뜻이야.’
꺼져 가는 불씨 같던 의욕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 * *
레이커스는 경찰들과는 달리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것은 눈에도 너무 띄고, 제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가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둠을 틈타 은밀하고 능숙하게 걸었다.
그 움직임은 인간보다는 어쩌면 맹수에 가까울 듯한, 이상할 정도의 속도였다.
경찰들이 이미 수색한 골목도 다시 한번 둘러보던 그의 손에 옅은 땀이 베어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군. 어떻게든 위치만 알아낼 수 있다면…….’
한참 거리를 헤매던 그가 초조하게 슬럼가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 흰 꽃잎 조각 하나가 머리 위에서 나풀나풀 떨어졌다.
레이커스는 손을 내밀어 제 손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이 근처에 꽃이 자랄 만한 곳이 있던가?’
파크에는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데도 이상하리만큼 거리에 들꽃이 잘 자라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구획을 나눠 놓기라도 한 듯, 강가나 인공 정원이 아니면 꽃도 풀도 잘 자라지 않았다.
여긴 슬럼가라 그런 꽃이 자랄 곳은 아무 데도 없을 텐데.
레이커스는 꽃잎이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손바닥 위에 놓인 꽃잎을 버리려다가 문득 제 손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아르비체 님께서 꺾어다 주셨던 꽃이에요.’
블리에가 본 적 없는 설레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머리 장식을 만지작거리던 장면이 번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들꽃이 바로 이 꽃이 아니었나?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강둑에서 누구나 꺾을 수 있는 흔한 들꽃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레이커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때 눈앞으로 흰 꽃잎 하나가 또 팔랑거리며 내려왔다.
레이커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위를 살펴보았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내려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비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사소한 단서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꽃잎이 아르비체가 보내는 신호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람의 방향으로 보건데, 동남쪽? 그리고 높이도 어느 정도 있겠지.’
섣부르다는 것을 알지만, 어쩐지 확신이 들었다. 이 꽃잎을 흘린 게 그녀라는 걸.
* * *
납치되어 갇혀 지낸 나흘은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레이커스의 호감도 이벤트 리스트를 보면서 희망을 가졌던 게 첫 번째 날.
영화에서 많이 본 것처럼 어떻게든 종이와 펜을 손에 넣어서 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생각한 게 두 번째 날.
하지만 이 계획은 종이도 펜도 손에 넣지 못하고 끝이 났다.
사흘째, 아이템창을 뒤지고 뒤져 그나마 겨우 신호를 보낼 만한 걸 찾은 게 들꽃이었다.
34개 중에 20개를 들꽃 목걸이를 만들어 선물하는 데 썼으니, 남아 있는 건 고작 14송이.
‘……하지만 이걸 한꺼번에 떨어뜨려도 아무도 안 쳐다볼 만큼 임팩트라곤 없는 물건인데.’
난 누가 알아봐 주길 바라며 한 시간에 한 송이씩 꽃잎을 떨어뜨렸다.
반나절 만에 고작 두 송이의 꽃만 내 손에 남이 있었다.
난 습관적으로 꽃 한 송이에서 꽃잎을 떼어 창문의 널빤지 틈으로 흘려보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걸 도대체 누가 알아 봐?’
심지어 납치범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내 꼴을 본다 해도, 내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할 것 같은…… 그런 너무 사소한 행동이었다.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꽃점이나 본다고 여기면 모를까.
마지막 한 송이의 남은 꽃잎 네 개를 손에 쥔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꺼번에 창밖에 털어 버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틀렸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곧 범인이 올 시간이었다.
며칠 동안 괜찮았던 속이 다시 답답해졌다.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던 확신은 이미 흐려졌고, 어떻게든 버텨 오던 멘탈이 꽃잎이 다 떨어지는 순간 가루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난 숨을 크게 고르고 사건 수첩을 꺼내 펼쳐 보았다.
[아르비체 그린, 실종되다.
최근 실종 사건과 관련된 현장이 드러나면서, 실종 사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리어먼드가의 가정교사 아르비체 그린(27)의 실종 또한 이 실종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여…….]
거기에 나와 있는 내 정보는 내 실종에 대한 신문 보도뿐이었다.
별다른 소득이랄 게 없었다.
힘없이 사건 수첩을 덮은 나는 무릎을 감싸 안았다.
‘곧 궁정 연회 날인데.’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웠지만, 궁정 연회는 이 게임 속에서 정말로 중요한 이벤트였다.
중요한 인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일뿐더러, 다음 희생양 후보인 모니카와도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테고…… 공주님과도.
모처럼 루트를 개방했는데, 가 보지도 못하면 너무 아쉬울 거다.
‘게다가 드레스까지 맞췄는데. 매력을 그렇게나 많이 올려 주는 옵션까지 달린 걸로.’
그 옷을 사 주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레이커스의 얼굴이 떠오른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내가 힘들고 지쳐 있다지만 그를 떠올리는 건 이제 그만할 일이다.
뚜벅. 쾅. 뚜벅. 쾅. 뚜벅. 쾅.
그때 문 바깥쪽에서 누군가 가까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박자에 맞춰 뭔가의 물건을 질질 끌고 오는 소리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