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 죽이지 마세요 51화
납치범의 즐거운 듯한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던 나는 긴 침묵이 이어지자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이커스에게 부탁할 일이 조금 있는데, 그리 순순히 내 말을 들어줄 양반이 아니란 말이야.”
“……부, 부탁이요?”
“그래.”
“……하지만 제, 제가 뭐라고 레이커스 님께서…… 저, 저는 하찮은 가정교사일 뿐인데요.”
픽.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는 틀림없이 가면 아래에서 저자가 웃는 소리일 것이다.
지금 내 말이 뭐가 그렇게 웃겼을까?
“넌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말은 <살인자들의 밤>의 플레이 타임을 1000시간도 넘게 찍은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니, 나만큼 레이커스에 대해 많이 검색해 본 사람도 없을 텐데. 그리고 레이커스에 대한 공략 루트를 많이 뚫은 사람도 없을 테고.’
하지만 납치범에게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그가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레이커스와의 술래잡기는 물론 재밌지만, 도저히 끝이 나질 않으니까. 뭔가 그의 구미를 당길 미끼가 필요했거든.”
아까부터 이자는 자꾸 레이커스 이야기를 한다.
난 눈을 내리깐 채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레이커스에게 난 그냥 재밌는 가정교사에 불과했다.
“넌, 레이커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감싸고 도는 꼴을 보인 일이 없다는 걸 모르나 보군. 그가 누구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꼴을 볼 수 있다니, 널 죽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지 뭐야?”
뒤꽁무니를……?
물론 레이커스가 최근 내 주변을 빙빙 맴돈 것은 맞다.
하지만 지금 저자가 말하는 걸 듣고 있자면…….
‘마치 그가 날 지켜 줬다는 것처럼 말하잖아……?’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게 사실일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이자가 레이커스를 위해서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텐데.
‘……레이커스가 요즘 이상하게 굴긴 했어. 제가 곁에서 날 감시하지 못하게 되니까 경관을 붙여서 날 감시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감시가 아니라 날 지켜 준 거라고?’
……그게 말이나 돼?
납치범의 말을 믿을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그냥 처음부터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조심하라고 했으면 됐잖아. 레이커스는 그날 일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말하던데……?’
말도 안 되는 가정이 하나 있긴 했다.
‘설마 내가 범인에게 노려진다는 걸 알면 무서워할까 봐? 그래서 말 안 하고 날 지켜 준 거야……?’
내가 떠올린 가정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지.’
결국 납치범의 생각이 다 틀려먹었다는 결론밖엔 나지 않는다.
내가 혼자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 사이를 헤매고 있자, 납치범은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말했다.
“널 돌려주는 조건으로 뭘 요구해도 레이커스는 들어주겠더군.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굳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눈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또 한 번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지만 역시 이자는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게 느껴졌다.
레이커스에게 내가 무슨 대단한 효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친데…… 아마도 경시청의 트리버 경감이 만들어 낸 헛소문을 단단히 믿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레이커스에게 한낱 고용인일 뿐이다.
그것도 비싼 돈 줘 가며 드레스까지 맞춰 줬는데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조심히 좀 다니라고 경관까지 붙여 줬는데도 떼놓고 다니다가 이렇게 납치까지 당한…….
‘……그렇게 생각하니까 레이커스가 날 구할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 보이네. 그런데 내가 무슨 대단한 역할을 할 거라 생각하고 납치한 거면…… 내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내 목숨이 위험한 거 아냐?’
아이템창과 두 개가 남아 있는 하트를 자꾸 번갈아 바라보던 그때, 새 알림창이 떴다.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1/396)]
‘……아니, 난 여기 지금 납치당해 있는데, 레이커스는 혼자 도대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뜬금없이 저런 알림창이 뜨는 거야?’
난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입을 작게 벌렸다.
역시 레이커스가 내게 절절매기는 무슨. 그 미치광이 살인마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호감도 이벤트 : 인형극 개방
호감도 퀘스트 : 지하실 개방]
나는 툴툴거리다 말고 입을 가렸다.
지하실.
지금까지 내가 들어가 보겠다고 그렇게 기웃대도 들어갈 수 없던 공간이 드디어 개방되었다.
내가 납치당한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스템창에 표시되는 날짜를 흘끗 바라보았지만, 아직 다음 날이 되지 않았다. 아마 납치된 지 10시간 남짓 지난 것 같았다.
납치범은 처음 한번 나타나서 제멋대로 주절거리고 간 뒤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 한두 시간은 무슨 일이든 곧 일어날 거라는 긴장감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던 나는 이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창가에 기대 앉아 있었다.
방 한구석에 큰 물병과 흰 빵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데는 문제없었다.
문제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공포였다.
납치범이 단 한 번도 나를 위협하거나 흉기를 내보인 적 없는데도…… 이곳은 레이커스의 저택보다도 더 공포스러웠다. 매순간 숨이 탁탁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벽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거대한 오망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피와 같이 붉은, 물감…… 아마, 틀림없이 물감이겠지만…… 아무튼 그 붉기 그지없는 것으로 그려진 거대한 오망성은 섬뜩할 정도로 존재감이 있었다.
‘살인 현장에서 본 것과 같은 거야.’
연쇄살인마는 레이커스다. 그런데 사건 현장마다 발견되었던 그 마법진과 꼭 닮은 것을 제 방 안에 그려 놓은 이 납치범은 또 뭐란 말이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레이커스와 철천지원수인 것처럼 말했지만 원래 관심이 없으면 욕도 안 하는 법이다.
레이커스에 대해 아주 지대한 관심이 있는 저놈이 카피캣이라도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게다가 날 죽이는 일을 아주 가벼운 놀이처럼 말했다.
난 창문을 틀어막고 있는 단단한 널빤지들 틈으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틈 사이로 밖이 보이긴 했다.
어둡고 좁은 골목은 특징적인 것이라곤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가파르기 짝이 없는 건물의 3층쯤 되는 높이였다. 창문에 단단히 고정된 널빤지를 뜯어내는 것도 무리겠지만, 방 안에 노끈이나 커튼 같은 것도 없었으니 어차피 이쪽으로 탈출하는 것은 무리다.
문으로는…… 절대 나갈 용기조차 나지 않고.
혹시나 도움될 만한 것이라도 있을까 싶어 아이템창을 열어 보았다.
사슴벌레, 모르포나비, 들꽃 목걸이, 6연발 권총과 총알, 돋보기, 폴라로이드 사진기.
휘슬은 샤인에게 줘 버려서 없었다.
역시 그럴싸한 것이라곤 권총이 다였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네.’
한참 동안 아이템창을 노려보던 나는 한숨과 함께 창을 닫았다.
‘결국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 누군가 날 구해 주지는 않겠지?’
아만타 경관?
……아니, 그 경관은 이 세계의 무능한 경찰들 중에선 그나마 나은 축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나를 찾아낼 정도는 안 될 거다.
그녀를 뺀 경시청의 나머지 일원은 더 못 미덥고.
앨라이 쿠스나 블리에 화이트?
아니다. 둘 다 플레이어일 때의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던 NPC들이지만, 지금은 세이브도 로드도 지원하지 않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아니면…… 레이커스 공작?
그 순간 그가 떠오른 건 왜일까.
‘납치범이 자꾸 헛소리를 떠들어 대니까, 그 자식이 다 생각나잖아.’
하지만 이 어둑어둑한 방에 갇혀 있노라니 적어도 제 조카는 챙길 줄 아는 그 연쇄살인마 자식의 집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한참을 툴툴거리던 나는, 그렇게 툴툴거릴 여유조차 잃어버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감싸 안았다.
무섭다.
솔직히, 너무 무섭다.
‘……젠장.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누가 구해 주러 오겠어?’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긍정적인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파크에서 생긴 실종 사건이 몇 갠데, 그중에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케이스는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고작 두 개밖에 없는 하트 중 하나를 이런 데서 날리게 생겼네.’
오히려 더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렇게 또, 대여섯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너무 적막한 곳에 혼자 내버려져 있는, 강제로 주어진 이 시간이 달갑지 않았다. 생각이 자꾸 부정적으로만 치달았으니까.
‘정말로 진엔딩을 보면…… 그러면 이 게임이 끝날까? 이 끔찍하고, 가는 곳마다 범죄만 가득한…… 이벤트라곤 죄다 이렇게 살벌한 것뿐인 이 게임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떠올렸던 물음이 또다시 머릿속을 점령했다.
<살인자들의 밤>에 들어온 뒤로 하루하루가 어떤 사건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누구의 호감도를 어떻게 올릴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지내 온 나날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 오느라 우울할 새도 없었고, 이렇게 갑자기 멈춰 서서 공포에 젖어 들 틈도 없었다.
‘정말 진엔딩을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진엔딩이라면 사람들이 다 욕하며 이 게임을 그만두진 않았겠지.’
게다가 게임 밖에서 그저 바라보며 마우스를 틱틱 클릭하기만 하면 되었던 때보다 난이도가 더 높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게임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해?’
벽에 그려져 있는 핏빛의 오망성이 눈에 점점 더 크게만 비쳐졌고, 몸이 덜덜 떨렸다.
공포심에 어쩔 줄 몰라 바닥에 주저앉는데, 그 순간 떠오른 게 왜 루나도 샤인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의지하는 세이브 NPC들도 아닌, 잘나디잘난 얼굴의 레이커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