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0화
이 비둘기는 우편소에서 공작저의 제 방까지 오가도록 훈련되어 있는 비둘기였는데, 그걸 납치해서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다.
‘……아주 오랜만에 겪으니 불유쾌하기 짝이 없군.’
그는 답지 않게 성급한 손짓으로 비둘기의 다리에 감겨 있는 작은 쪽지를 풀어 펼쳤다.
[요구 사항 : 궁정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
남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레이커스는 알고 있었다.
‘궁정 연회라니. 그곳만큼 한 번에 많은 이들의 공포심을 조장할 수 있는 곳도 없지.’
범인은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평하게 연회나 하고 있는 이들에게 제 존재를 확실하게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신이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거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주를 납치하고, 범인이 계속해 왔던 의식의 제물로 만드는 쇼를 벌일 생각이겠지.’
레이커스는 혀를 찼다. 그 사건이 있고 나면, 경시청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파크 전체가 손쓸 수 없는 공포에 뒤덮이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꼬여 버린다.
레이커스는 그 편지와 제 손에 들어온 비둘기를 번갈아 보았다.
마치 피라도 흘리는 것처럼 날갯죽지가 붉게 변한 새하얀 비둘기를.
‘미치광이의 협박을 들어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한번 협상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테니까. 들어준다고 해도, 그린 양을 무사히 돌려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고.’
그는 비둘기를 방 안의 작은 케이지로 옮겼다. 깨끗한 물과 먹이가 미리 마련되어 있는 케이지 속에서, 비둘기는 제 일을 마쳤다는 듯 편안하게 물로 몸을 씻어 댔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레이커스는 주먹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범인이 그렇게 쉽게 아르비체를 돌려줄 리가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결코 허술하게 굴지도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영리한 여인이라면 이 상황에서도 제게 어떤 신호를 보내려 노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 * *
정신이 들어 눈을 뜨니, 희고 포근한 러그 위였다.
러그를 더듬더듬 손으로 쓸며 일어나는데,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조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 골목에서 있었던 일들이 벼락처럼 모두 기억났다.
‘……난 지금, 납치당한 거야.’
아마도 샤인을 노린 범인에게.
나는 가장 먼저 시스템 창부터 확인했다. 하트 두 개가 그대로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앉으며 몸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의외로 운신은 자유로웠다.
팔다리가 밧줄로 묶이거나 철창 같은 곳에 갇혀 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마취약을 들이마신 것 같았지만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의외로 삭막한 공간은 아니었다. 생활감 없는 단정한 손님방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한쪽 벽면에 엉망으로 오망성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핏빛의 그림이 이 공간의 아늑함을 손쉽게 망쳐 놓았다.
“……어떻게 하지, 이제.”
살인마가 활보하는 게임으로 강제 소환당한 것만 해도 서러운데, 그 게임 안에서 또 납치를 당하다니 이게 당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범인은…… 레이커스잖아.’
하지만 레이커스가 샤인을 납치할 리는 없다.
역시, 파크에서 모종의 사건들을 일으키고 있는 자는 레이커스 한 명이 아니었다.
실종 사건의 범인이 따로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럼 내가 실종 사건의 범인에게 납치당한 걸까……?’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이리저리 맞춰 보고 있는데, 저벅저벅 하는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따라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깨어난 티를 내야 할까? 아니면 아직 잠들어 있는 척해야 할까?’
아이템 창에 있는 리볼버에 순간적으로 손을 가져가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최대한 침착하게 앉았다.
리볼버는 최후의 대응책으로 쓰자.
‘레이커스에게 리볼버를 간단하게 빼앗긴 뒤로, 총을 꺼내드는 순간을 잘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특히, 신체 조건이 좋은 사람을 대상으로는 더더욱.’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마주쳤을 뿐이지만, 납치범의 신체 조건이 나보다 월등한 것만은 확실했다.
나를 어깨에 걸치고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저벅저벅 걸어갔던 것만 봐도, 그가 나를 붙잡았을 때 사소한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붙잡혔던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랬다.
난 아이템창을 켜 둔 채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잠자코 견뎠다.
그래, 기다리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생각 같은 건 이제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무서워서, 무서워서……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무서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 상황을 샤인이 견디지 않아도 되는 게 다행이야.’
사소한 괴담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기억을 안겨 주지 않아도 되는 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덜컹.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진 발소리의 주인이 나무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경악으로 비명을 내지르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온통 검은 옷 일색의 그 남자가 검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신체의 특징적인 부분은 달리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어.’
난 다시 한번 그를 흘끗 올려다보고 다시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경시청 앞 골목에서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경감과 랑비엘을 만났던 그날 나를 위협했던 가면을 쓴 남자.
이 납치범은 틀림없이 그 사람이었다.
‘꿈이 아니었어.’
우연히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다른 사람일 수가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이 음산한 분위기와 머리카락까지 보이지 않도록 꼼꼼히 둘러쓴 후드는 틀림없이 동일인이었다.
레이커스는 그날, 어떤 경관이 그에게 연락해서 날 데려왔다고 했고, 그에 쓰러지기 직전에 본 건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상황이 꿈이 아니었다면 하트가 줄어들든 어딘가를 크게 다치든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소름이 끼쳤다.
레이커스가 몰랐을 뿐이지, 그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땐 왜 날 죽이려고 했지? ……그때만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닐지도 몰라. 지금도 샤인을 납치하려다가 실수로 날 납치한 게 아니라, 나도 그가 노리는 목표였을지도.’
하지만 바로 눈앞에 그자가 버티고 서 있으니, 나는 과거의 정황을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냥 미치도록 무서웠다.
덜덜 떨릴 것 같은 몸을 간신히 가누며 그의 손이 비어 있다는 것 하나에 감사하고 있는데, 그자가 가면 뒤에서 말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이군.”
음울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는 높낮이나 억양 같은 것을 극도로 억제한 것이라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썩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다가왔다. 그러곤 내 앞에 놓인 다른 의자에 등받이가 앞으로 오도록 걸터앉았다.
역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시야 한쪽에 걸리는 실루엣만으로도 신장이 꽤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때 본 그자야.’
경시청 앞 골목에서 느꼈던 오싹한 공포가 다시 재현되어서 난 내 몸을 감싸 안으며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불편하겠지만, 좀 견뎌 줘.”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려 봤다.
마탑에서 들었던 캐서 헌트의 부검 영상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지금 이 목소리와 같나?
하지만 그 영상에서도 목소리는 워낙 웅웅 울리듯이 들렸고, 지금 이 목소리도 가면 때문인지 마치 위조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두 목소리가 비슷한 듯도 했고, 전혀 다른 듯도 했다.
납치범 자식은 내가 눈알을 되록되록 굴리는 게 아주 재밌다는 듯 내 코앞에 고개를 들이대고 날 관찰했다.
웃고 있는지, 자꾸 가면 아래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레이커스가 날 볼 때마다 빙글빙글 웃는 것도 썩 편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마치 조롱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납치범이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내 턱을 들어 올리고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눈을 재빨리 내리깔았지만, 아주 짧은 순간 그 눈동자가 보였다. 아주 탁한, 검디검은 색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죽여야겠다고 생각했거든.”
내 바로 앞에서 납치범이 속삭였다.
……죽인다니. 누굴? 나를……?
‘……천지신명이시여. 불쌍한 저를 굽어살피옵소서. 어쩌다 이딴 게임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이보다는 좀 더 나은 배역을 주실 수는 없으셨습니까?’
지금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비는데, 그는 내 턱을 쥐고 이리저리 구경하듯 돌려보며 그 끔찍한 말을 계속 이었다.
“널 죽이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는 아주 안타까웠단 말이야. 눈엣가시도 그런 눈엣가시가 없었으니까.”
나를 눈앞에 두고 이런 말을 태연하게 지껄이다니. 기가 막히기 짝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널 살려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왜?’
저 말이 더 무섭다.
소름이 끼쳐서 나도 모르게 든 시선에 검은 가면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 진 눈이 내 쪽을 관찰하는 게 보였다. 그 눈이 웃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납치범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생존 확률을 급격히 깎아먹을 테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어쩔 줄 모르겠어서,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