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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49화 (4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9화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아르비체 그린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레이커스만큼이나 사사건건 사건 현장에 고개를 내밀고 다녔다. 당연히 범인 입장에서는 아주 눈엣가시였을 거다.

‘……그래서 그렇게 조심하라고 한 건데.’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지, 남들은 다 레이커스 곁에 있지 못해 난리인데 그녀만은 그에게서 달아나지 못해 난리였다.

아주 가끔은 또 황홀한 듯 바라보다가도, 또다시 천하의 원수를 바라보듯 쏘아보곤 하는 그 시선이 재밌어서 내버려 둔 게 문제였을까.

‘당장 검이라도 빼 들고 범인을 족치러 가고 싶지만, 괜히 자극했다가 그린 양이 더 위험해질지도 몰라. 지금까지는 없었던 사건이니까, 감금 장소를 모르니 급습할 수도 없고…….’

레이커스는 계속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샤인을 한 팔로 안은 채로 마차에 올랐다.

“괜찮아, 샤인. 괜찮을 거야.”

그 말은 사실 샤인에게 해 주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범인이 그린 양을 데리고 있다면 리어먼드가 쪽으로 뭔가를 요구해 올 테니 속이 타도 일단 돌아가자.’

그게 맞다.

왜냐하면 범인이 아르비체를 죽일 셈이라면 현장에서 죽였을 테니까.

범인의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봤을 때 굳이 끌고 갔다는 건, 레이커스를 협박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냉철하게 생각해 보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답답해지는 건 왜일까.

레이커스는 제 무릎을 감싸 안고 몸을 웅크린 샤인을 바라보다가, 그 아이를 구하고 대신 끌려갔다는 여인을 생각해 봤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에메랄드빛의 긴 머리카락이 아주 잘 어울리는, 청순하고 연약해 보이다 못해 아주 소심해 보이는 여인.

하지만 그 눈빛 안에 쉽게 구부러지지 않는 아주 곧은 성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 아주 이상하고 재밌는 여자.

그 여인은 이번 회차에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였다.

이번 회차에 처음 마주친 것은 아닌데, 매번 교체되는 수많은 가정교사 중 하나로 그냥 기억의 한편에 있다가 잊혀 버리는 아주 사소한 존재일 뿐이었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그의 행동 변화에 따라 이례적인 사건 한둘 정도는 종종 관찰되곤 했지만, 아르비체 그린은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커다란 물결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처음에는 그녀가 평소와 다른 점들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작은 부분들이 모이고 모이더니 전혀 다른 그녀가 되었다.

‘그녀는…… 뭔가를 보면 지나치지 않아.’

어쩌면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크의 사람들은 누구나, 레이커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두들 공포에 지쳐 있었다.

뭔가 수상한 일을 보면 파고들기보다는 눈을 감고 피하고 싶어 했고, 망각의 신에게 달려가 기도하기 바빴다.

그런데 아르비체는 달랐다.

레이커스의 다과회에서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똑 부러지게 했고, 실종자들이나 연쇄 살인 사건과 관련된 곳들에도 고개를 내밀었고, 겁을 잔뜩 먹은 눈으로도 제 집의 비밀을 파헤치려 들기까지 했다.

그래서 샤인을 구해 주고 제가 잡혀간 거겠지.

누구보다 나약하고 소심해 보이면서도, 또 누구보다 외면하는 법을 모르는 그녀였으니까.

다만 레이커스가 닫아 건 문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와 그의 추악한 면까지 파고들만큼 집요한 점은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범인에게도 편안하지 않았겠지.’

레이커스는 아르비체가 저를 보면 짓곤 하는 표정을 떠올리며 따라서 입술을 짓씹어 봤다. 하지만 그런 걸로는 조금도 마음이 안정되질 않았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휘슬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인상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

‘일단 살아 있길.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있어야 해.’

마차가 리어먼드가에 도착하자마자, 레이커스는 블리에를 호출했다. 마차 소리를 듣고 현관으로 달려나온 블리에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외투를 받아 들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레이커스는 샤인을 챙기는 유모를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샤인을 외출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을 텐데.”

“……네? 도련님께서 밖에 나가셨어요?”

“그래. 유모는 당분간 자숙하도록.”

블리에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재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샤인이 레이커스의 바지를 슬쩍 잡아당겼다.

“……내가 멋대로, 제가 멋대로 외출한 거예요. 그러니까 유모와 블리에를 혼내지 마세요.”

레이커스는 뜻밖의 말에 조금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샤인과 루나는 둘 다 아주 귀여운 아이들이었지만, 한 번도 제가 제대로 교육을 한 적이 없어서인지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였다.

어차피 시간은 되돌아가게 마련이고…… 이 아이들을 지켜 내는 것만으로도 제가 할 일은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제대로 안아 준 적도, 혼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제 일을 대신하기 위해 고용한 가정교사들도 제 눈치를 보느라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해 준 적이 없었다.

그만큼 리어먼드가는 절대적인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가문이었다. 감히 리어먼드 공작가의 아이들을 꾸짖어 교육을 할 만큼 간이 큰 가정교사는 없었다.

하지만 샤인은 이만큼이나 달라졌다.

제 잘못 때문에 사용인을 혼내지 말라고 사과할 정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에 다시 한번 아르비체 그린이 떠올랐다.

그는 샤인의 등을 떠밀어 올려 보내고선 잠깐의 침묵 끝에 한숨처럼 말했다.

“아르비체 그린이 납치당했다.”

블리에의 얼굴이 충격과 염려로 일그러졌다.

레이커스는 눈썹을 구긴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경시청을 닦달하고, 제 사병까지 동원해 온 파크를 쥐 잡듯 탐색하고 있긴 했지만, 제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창문을 쏘아보고 있는데, 문득 온 저택의 분위기가 축 늘어진 듯한 기척이 새삼스레 와 닿았다.

“……고요하기 짝이 없군.”

그녀 한 명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저택이 휑하니 조용해질 줄은 몰랐다.

아르비체 그린이 사라진 지 고작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감정기복이 없다는 이유로 신임하고 있는 집사인 블리에는 아르비체의 소식을 들은 뒤로는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미소를 잃었다.

하긴, 아르비체와 블리에 사이가 꽤 돈독해 보이긴 했다. 장신구를 따로 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들꽃을 시들 때까지 머리에 달고 다니기에 물어보니 아르비체가 준 거라고 했을 땐 좀 놀랐었다.

블리에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샤인이 그토록 침울해하는 것을 보며 대충 상황을 눈치챘을 거다.

유모와 샤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용인들도 확연하게 생기가 없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쉴 새 없이 까르르 웃는 소리로 저택을 가득 차게 만들었던 샤인과 루나가 풀이 죽은 게 컸다.

루나에게는 아무도 사실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아르비체가 다른 곳에서 하룻밤 자고 온다는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침울한 모양이었다.

레이커스는 방금 현관에서 실랑이하던 루나와 유모를 떠올렸다.

“올라가서 주무세요, 루나 님.”

“아니야. 선생님이 그림 그리면서 잘 기다리면, 숨바꼭질 해 준다고 했단 말이야. 그림 검사받고 잘 거예요!”

“……내일 검사받으시면 되잖아요.”

“응? 하지만 선생님이 다시 해 오라고 하면 다시 해야 하는 걸.”

“일단 올라가서 주무세요.”

“……응. 조금만 더 기다리고.”

‘아르비체는 솔직하니까. 아이들도 다 알아. 그 솔직함이 주는 안정감을.’

레이커스의 방에서는 현관 옆 창문이 잘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어른어른 보이는 걸 보니, 루나는 아무리 유모가 어르고 달래도 스케치북을 안고 아르비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샤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저 때문에 아르비체가 납치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니까.

‘범인은 아르비체를 원래부터 노리고 있었어. 샤인이 계기가 되었을 뿐.’

레이커스는 귀를 기울이면 우물에서 물 긷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정적에 갇힌 저택의 공기를 느끼다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아르비체 그린이 이 집 전체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스며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더니…….’

물론 아르비체가 좀 잘 웃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귀담아듣고, 사용인들에게도 항상 고맙다고 인사를 하긴 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다들 그녀에게 푹 빠져 있는 줄은 몰랐다.

함께 지낸 건 고작 보름 남짓인데.

‘아르비체 그린이 처음 왔을 때는 어땠지?’

글쎄. 첫 만남에서는 워낙 인상이 희미했었기 때문에, 딱히 뚜렷한 기억이 남아 있지도 않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심지어는 아르비체를 담당했던 아만타인지 뭔지 하는 경관마저 넋이 빠져서는 오늘 연차를 내고 왔다며 저택에서 내내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사건 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경시청에서 온 파크를 뒤집어 놓고 있다 보니 아르비체의 소식이 돌았던 모양이었다.

마탑과 외상 전문 병동, 상인길드에서도 각기 서신으로 연락을 해 왔다.

심지어는 그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신전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다. 그것도, 머지않아 대신관이 될 사람인 앨라이 쿠스를.

모두 레이커스와는 직접적인 친분이 없는 이들이었다.

‘어지간히 마당발이었군, 아르비체.’

레이커스는 경관들과 우편부로 북적이는 현관을 내려다보다가, 괜히 너른 옷깃이 목을 죄여 오는 것 같다는 착각에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잡아 늘렸다.

‘아르비체 그린에 대한 감정은…… 흥미. 단순한 흥미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냥 그것뿐이라고는 말도 못하겠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초조할 리가 없었다.

푸드드득. 푸드드득.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레이커스의 손가락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레이커스는 제 손가락 위에서 계속 날개를 움찔거리며 균형을 잡고 있는 비둘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둘기의 새하얀 날갯죽지에 붉은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일그러진 채라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손을 뻗어 날개를 펼쳐 보자, 숨겨져 있던 오망성이 드러났다.

레이커스는 짜증으로 미간을 구겼다.

‘이제야 연락하다니.’

패턴이라면 빤히 읽고 있었고, 딱 예상한 만큼의 시간이 걸린 건데도 지독히 오래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 비둘기는, 범인으로부터의 연락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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