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8화
레이커스는 오늘 경시청에 다녀왔던 일을 떠올리며 손 안에 든 작은 유리구슬 같은 결정을 굴렸다. 크리쳐에게서 수확한 것이다.
캐서 헌트의 부검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부검 영상은 범인이 개입이라도 한 건지, 아주 흐릿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영상으로 경찰의 협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다.
그 인간도 아닌 놈을 잡으려면, 놈이 인간일 때의 모습을 알아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긴, 별달리 특징적인 게 없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없었다, 새삼스레. 이전에도 봤던 결과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 보자고 생각한 것은 ‘이번 회차’에만 달라진 사건들이 몇 개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아르비체 그린 같은.”
그는 제가 중얼거린 말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르비체 그린 같은.’
레이커스의 삶은 저주받았다.
버림받았다. 망각의 축복으로부터.
그는 같은 삶을 쳇바퀴처럼 반복해서 살게 되었다.
눈먼 자들만 있는 세상에서 저 혼자만이 실수로 눈을 떠 버린 것처럼.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기억이 명료해져 버렸다.
이번이 레이커스가 기억하는 열 번째의 삶이다.
‘이젠 그 이전에도 같은 삶을 도돌이표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니까.’
삶을 반복하면서 하나씩 다른 시도를 해 보고 있었지만, 뚜렷하게 알아낸 것은 하나였다.
이건 매번 같은 범행을 저지르는 범인과 그의 싸움이라고.
그가 수호자라면, 범인은 파괴하는 자였다.
실체조차 없는 그는 죽일 수도 없는 괴물이었다.
레이커스는 검도 총도 듣지 않는 기이한 상대를 대상으로 근근이 버텨 오고 있었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단 한 번도 달가웠던 적은 없지만,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는 삶.
거기에 딱 하나, 처음 발견한 이례적인 존재가 아르비체 그린이었다.
도대체 그녀가 어디서 나타난 걸까를 생각하던 레이커스는, 오늘 아침에 아르비체가 저를 보며 입을 삐죽이던 장면이 문득 떠올라 그만 혼자 웃음을 흘렸다.
픽.
‘……내가 지금 웃었나?’
레이커스는 조금 놀라 제 입매를 손으로 만졌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웃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서.
삐이익-!
그때, 어떤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그의 비상하게 좋은 눈에, 저 멀리 바닥에 넘어져 있는 금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주 오랜만에, 레이커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레이커스가 도착했을 때, 샤인은 이미 경관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레이커스는 여전히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입양된 뒤로 좀처럼 눈물을 보인 적 없는 샤인이 소매가 젖도록 숨죽여 끅끅거리고 울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분명 저택을 벗어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를 해 두었는데. 도대체 어쩌다 여기에서 샤인이 울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야. 이게 좋은 일인지는…… 전혀 모르겠군.’
“무슨 일이죠?”
“아…… 리어먼드 공작님.”
경관 세 명 중 쇼트커트를 한 경관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샤인을 달래고 있는 다른 경관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난감함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뭡니까?”
“아만타 밸브 경관입니다. 오늘, 아르비체 그린 님의 수행을 맡았던…….”
“아, 네.”
레이커스는 그 경관의 옆을 흘끗 바라봤다. 아르비체의 수행을 맡았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곁에 아르비체는 없었다.
“샤인 님께서 휘슬을 부는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그게?”
“……그러니까, 샤인 님께서 계속 우시기만 하셔서, 어떤 정황인지는 저도 잘…….”
“그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잘…….”
‘그나마 유능한 경관을 수행원으로 뽑아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레이커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릎을 굽혀 샤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샤인.”
샤인은 레이커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비로소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심 때문인지 겨우 억눌러 왔던 울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샤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놓아 울어 버렸다.
“흐아앙. 흐앙. 끅, 흐끅.”
“샤인, 무슨 일이 있었지? 이 휘슬은 또 뭐고.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가 없단다.”
“알…… 흐끅, 알비…… 흐끅.”
“알비……?”
“알비…… 아르비체가…… 아르비체 선생님이…… 흐끅.”
레이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샤인은 어지간한 일로는 울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불길했다. 게다가 본 적도 없는 휘슬을 쥐고 있는 것도 영 수상쩍었다.
바닥에 넘어지면서 까인 손과 무릎 상처에서 피가 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샤인은 그 조막만한 손을 들어 자꾸 뒤쪽의 골목만 손짓했다.
샤인은 급히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도저히 울음이 멈추지 않는지 과호흡으로 숨이 자꾸 꼴딱 넘어갔다.
레이커스는 샤인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진정해.]
순간, 아주 짧은 순간 샤인의 동공이 탁 풀리면서 뭔가에 홀린 듯 울음을 삼켰다.
“……후. 후하…….”
그리고 짧은 숨을 천천히 내쉬고서,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레이커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르비체가…… 아르비체가 끌려갔어요.”
“……끌려갔다니, 무슨 소리지?”
“끌려갔다고요. 납치당했어요.”
납치.
납치 사건 자체가 낯선 일은 아니었다.
파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에게 레이커스만 한 눈엣가시도 없었다.
당연히 레이커스가 그나마 애착을 가진 존재인 샤인과 루나가 납치당하는 일도 겪어 봤다.
하지만 그건 아주 초반의, 레이커스가 지금보다 미숙할 때나 있었던 일이다.
샤인과 루나를 리어먼드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만 하면 그 사건은 간단히 통제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단어를 또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단어가 이렇게 충격적으로 들릴 줄도 몰랐다.
“그린 양이…… 아르비체가 납치당했다는 거야?”
“어떤 남자가 어깨 위에…… 저쪽으로…….”
“어깨 위에? 둘러멨다는 건가?”
“……흐윽, 흑. 맞아요.”
레이커스는 다시 한번 울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는 샤인의 어깨를 꽉 쥐고 시선을 마주쳤다.
“정신 차려, 샤인. 네가 똑바로 말해 줘야 해. 정확히 어떻게 된 거지?”
샤인은 애써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때문이에요.”
“응?”
“아르비체 선생님 혼자였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선생님은 날 지켜 줬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나한테 이걸…… 이걸 주고…….”
샤인이 꼭 쥐고 있는 휘슬이 아르비체가 준 것인 모양이었다. 레이커스는 샤인에게서 받아 든 휘슬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둘이 함께 나온 거야?”
“……아뇨. 난…… 그냥, 선생님 선물을 주고 싶어서…….”
보아하니, 샤인은 함부로 나오지 말라는 말까지 어겨 가며 선물을 사러 외출한 모양이었다.
레이커스는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것에도 가볍게 놀랐다.
샤인이 제 말을 어긴 것은 처음이었고, 그게 고작 선물 때문이라는 것은 더 놀랄 일이었다.
레이커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샤인을 더 추궁해 봤자, 괜히 아이의 죄책감만 늘릴 것 같았다.
‘어차피 범인이 누구일지는 뻔해. 파크에서 미치광이는 그 새끼 하나니까.’
문제는 그 새끼가 어디 숨었느냐 하는 건데…….
‘……젠장.’
레이커스는 이상할 정도로 순식간에 자라난 불안감과 초조함에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힌다고 생각했다.
‘……후. 이미 일어난 사건이니 어쩔 수 없지.’
체념도 이제는 어쩌면 습관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그렇게 들려줘도, 이번 사건만은 왜인지 그렇게 쉽게 생각되질 않았다.
초조함에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그는 샤인을 번쩍 안아 들곤 어느새 숨이 턱에 차서 쫓아온 트리버 경감을 바라보았다.
“헉, 헉…… 어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납치? 납치라고요?”
레이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버 경감은 그가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어도 도저히 마음에 드는 성과를 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개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현장에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르비체 그린 양이 납치당했다고 합니다.”
트리버 경감이 어쩔 줄 몰라서 모자를 벗어 구깃구깃 움켜쥐며, 함께 달려온 경관들에게 다급히 손짓을 했다.
“파크를 쥐 잡듯 뒤져서라도 아르비체 그린 양을 찾아내! 1조는 1지구를, 2조는 상업 지구를, 3조는 외곽을 뒤져! 곧장 지원을 요청하라고!”
“네!”
경관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것을 보고도 경감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쩔쩔맸다.
레이커스는 혀를 찼다.
그가 아르비체와 제 사이를 오해하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둔 것은 그만큼 아르비체에 대한 호위를 신경 써 주길 바라서였다.
그런데 경관을 붙여 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납치는 납치대로 당하고 남은 건 저 쓸데없는 송구스러움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