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7화
나는 샤인이 서 있는 곳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로비를 지나는데, 안마 의자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만타 경관이 보였다.
‘괴상하게 생긴 의자인데, 효과는 좋은가 보지.’
경관을 깨워서 함께 갈까 하고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샤인을 놓칠 것 같다는 생각에 지체 없이 로비를 가로질렀다.
‘샤인만 데리고 돌아오면 되니까.’
거의 뛰다시피 걸어 마탑에서 나오자마자 오른쪽, 큰 사거리에서 왼쪽,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저기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쭈뼛쭈뼛 걷고 있는 금발의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 창문으로 봤던 것과는 달리, 뒤를 쫓는 사람은 없고 샤인 혼자서 길을 찾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난 얼른 샤인에게 다가갔다.
“샤인! 이런 곳까지 뭐 하러 나온 거예요?”
샤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아르비체……?”
날 발견한 눈동자에서 항상 도도하다 못해 당돌한 그 얼굴에 스며 있던 불안감이 사르르 사라지고, 대신 안도감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혼자 나온 거예요? 길 잃었어요?”
“길을 잃다니…….”
샤인이 내게 혼날 것 같았는지 말을 흐리며 손에 든 물건을 뒤로 쭈뼛쭈뼛 숨겼다.
‘뭐야, 정말로 혼자 나온 거야?’
난 깜짝 놀라서 샤인의 눈높이에 맞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샤인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공작님께서 요즘 이 일대가 흉흉하니까 멀리 나오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왜 나온 거예요?”
샤인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쭈뼛거리다가 툭 내뱉었다.
“……미안해.”
역시 사과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지긴 한다.
난 샤인의 부드럽고 손에 포슬포슬 감겨 오는 금색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사과받았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요?”
“응.”
“그런데…… 누구랑 같이 나온 거죠? 혼자 나온 건 아니죠?”
“……응. 유모를 졸라서 같이 나왔는데, 유모가 갑자기 사라져서.”
유모는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썩 마음이 약했다. 샤인이 강경하게 주장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곤 했다.
이건 나오자고 한 샤인도 잘못이지만 데리고 나와 준 유모가 더 잘못이다.
‘게다가 여기까지 애를 데리고 외출을 했으면 제대로 챙겨야지.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게 두면 어떻게 해?’
난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샤인에게 손을 뻗었다.
샤인이 멀뚱하니 내 손을 바라봤다.
“……왜?”
“손잡고 돌아가요.”
“……아, 응. 그런데…….”
“네?”
샤인이 답지 않게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그 기다란 속눈썹을 감듯이 떨구고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화려한 리본 장식이 되어 있는 벨벳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얼떨떨하게 받아 들자, 샤인이 이제 됐다는 듯 빈손을 내게 내밀었다.
난 그 손을 마주 잡아 주면서 상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뭔데요?”
“……선물.”
“네?”
“왕성에…… 연회…… 간다며.”
“네?”
“저번에 다과회에서 옷차림 때문에 무시당했다는 거 다 들었어. 그러니까, 이번엔 제대로 하고 가라고.”
샤인이 바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기 때문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 내용을 알아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런 얘긴 어떻게 들었어요?”
“시녀들끼리 얘기하던걸. 난 어린애니까, 내가 있어도 다들 이야기를 잘 나누곤 해.”
‘……이렇게 또랑또랑한 애가 듣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얘길 함부로 하고 다니는 거야?’
기가 막히면서도 또 그걸 듣고 신경 써서 대체 뭘 산 건지…… 너무 감동이기도 했다.
“풀어 봐도 돼요?”
“응.”
얼른 벨벳 주머니의 리본을 당겨 풀고 검은색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내 주먹만 한 코르사주가 들어 있었다.
베이지색의 레이스와 연한 분홍색의 조그마한 꽃이 아기자기하게 엮인 코르사주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귀여웠다.
[매력 +4]
심지어, 대단하지는 않지만 부가 기능까지 있었다.
‘어쩜 요 조그마한 머리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밖에 나왔다고 잔뜩 혼내기만 했는데.
“너무…… 너무 예뻐요.”
샤인은 내가 신이 나서 손목에 대보는 걸 보더니 여기서 만난 뒤 처음으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해 보이며 씩 웃었다.
“드레스 색을 몰라서, 그냥 제일 예뻐 보이는 걸로 골랐어.”
“마음에 쏙 들어요. 그날 왕성에서 제가 제일 돋보이겠는데요?”
“그럼. 누가 고른 건데.”
샤인은 내 호들갑이 만족스러운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좋아. 진짜 너무 귀여워.’
나는 그 코르사주를 상자에 넣고 주머니로 다시 포장해 손목에 걸고서, 샤인을 꽉 안아 주었다.
어린아이답게 조그마하지만 내 손에 들어오는 등은 그래도 꽤 단단했다.
“고마워요, 진짜로. 하지만 이거면 이제 충분하니까, 앞으론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알았죠?”
샤인은 제 발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돌아가요.”
“응.”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90/198)]
‘선물은 내가 받았는데, 호감도까지 오르다니…….’
난 흐뭇하게 웃으며 앞으로 샤인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샤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나는 마탑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아만타 경관과 만나면 유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해야지.
‘마탑 위에 올라가서, 밀로라드와 라떼, 르뮈에에게 샤인을 보여 줄까? 친하다고 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좁은 골목을 막 빠져나가는데,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아까 살롱을 빠져나올 때 어떤 시선을 느꼈을 때와 꼭 같은 감각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른다. 착각일지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샤인의 손을 쥐고 있는 손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마차가 다니는 대로까지는 앞으로 열 발짝.
지금 이 길에는 사람이라곤 없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세 걸음을 더 걷는 동안, 순식간에 등에도 땀이 배어났다.
‘……착각이 아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진 감각에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아주 희미했다가 점점 뚜렷해지는 게 느껴졌다.
마탑에서 내려다봤을 때 샤인의 뒤를 따라가던 그림자가 있었다는 게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난 입술을 깨물며 뒤에서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이템창에서 휘슬을 꺼내 쥐었다.
“샤인.”
내가 속삭이는 소리에, 샤인이 날 올려다봤다.
“응?”
“내가 신호하면 뛰어요.”
“……뭐?”
“아무튼, 뛰라고 하면 바로 뛰어야 해요.”
휘슬을 분다고 경관이 바로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최대한 내 뒤에 있는 자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했다.
뚜벅.
뚜벅.
두 걸음을 더 걷자, 바로 뒤에서 발소리가 느껴졌다.
난 샤인의 고사리 같은 손이 내 손을 꽉 마주잡아 오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지금!”
샤인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내 목소리에 맞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도 함께 뛰려고 발에 힘을 주는 순간, 어떤 손이 내 머리채를 턱 휘어잡고 뭔가 축축한 천으로 내 입과 코를 틀어막는 감각이 들었다.
기분이 절로 나빠지는 싸한 향기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난 샤인의 손을 놓치기 직전, 휘슬을 샤인에게 쥐여 주었다.
샤인이 당황했는지 순간 발을 멈추고 날 돌아보았다.
“선생님!”
난 최대한 힘을 주어 버둥거리다가 내 입을 틀어막은 손을 콱 물었다.
그 저항에 순간적으로 천이 벗겨지는 순간을 노려 샤인에게 외쳤다.
“……가! 가요! 빨리, 휘슬을 불면 사람들이 도와줄 거예요!”
샤인은 날 두고 혼자 갈 수는 없었는지 망설이면서 자꾸 날 돌아보았다. 그러곤 울상을 해서는 휘슬을 입으로 가져가 힘껏 불었다.
삐이익-!
날카로운 휘슬의 소리는 멀리까지 울렸다.
“……쳇. 어쩔 수 없군.”
거의 동시에, 내 귓가에 아주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들어 본 적 있는 듯도 아닌 듯도 한 목소리였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 제 어깨에 둘러멨다. 휙 뒤집어진 시야에 사내의 검은 옷만 눈에 들어왔다.
경시청 앞에서 쓰러진 날, 꿈에서 봤던 것과 꼭 비슷한 색깔의.
“아르비체! 아르비체!”
샤인의 외침 소리가 좁은 골목에서 울렸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나를 둘러업은 자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안 돼…… 샤인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주위 광경을, 골목의 순서를 제대로 외워 둬야…….’
하지만 자꾸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까 내 입을 틀어막았던 천에 뭐가 묻어 있었던지, 내 의식은 그대로 점점 희미해졌다.
결국 내 손과 발은 바닥 쪽을 향해 축 늘어져 버렸다.
* * *(12.28_3_토끼)
어두운 먹구름 바로 아래, 높디높은 상인 길드 건물의 옥상.
레이커스는 옥상에 놓인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칼을 회수했다.
검집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마치 소매로 검을 밀어 넣는 듯한 동작만으로 길고 검은 칼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의 바로 옆에는 8개의 눈이 달린 거대한 거미 모양의 크리쳐가 축 늘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경악할 만한 거대한 크리쳐를 옆에 두고도, 그는 썩 태연했다. 태연함을 넘어서서, 조금쯤 지루하다는 얼굴이었다.
레이커스는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다 펼치자 신문만 한 크기가 된 그 지도에는 온갖 장소에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약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그는 펜을 꺼내 지도의 상인 길드에 적힌 오늘 날짜 위에 X자를 그렸다.
“역시 이렇게 된다니까. 이번 회차는 꽤 많은 게 달라져서, 이것도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레이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도를 잘 접어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