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4화
저번 편지를 통해서도 꽤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호감도가 큰 폭으로 올랐다.
내가 한 믿기 힘든 이야기가 그에게 힘이 되었을까?
그의 막막해 보이기만 하던 표정이 어딘가 조금쯤 차분해져 있었다.
“제게 이 이야기를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믿고 말씀해 주신 거잖아요. 어디 가서 하기 힘든 이야기였을 텐데.”
“그야…… 그렇죠. 사실 말해 본 건 처음이니까요.”
“덕분에 저도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제 힘이 닿는 한 힘껏 돕겠습니다. 이제, 제게 말씀하고 싶었던 게 뭔지, 제가 도와드릴 게 뭔지를 들어 볼 차례군요.”
‘눈치는 빠르네.’
내가 그에게 대신관이 될 거라는 예언을 한 것도, 지금 내 신세를 털어놓은 것도 모두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는 걸 빨리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저번 피해자…… 그러니까, 캐서 헌트 때는 제가 위험을 경고하는 것만으로는 사건을 막지 못했어요. 갑자기 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당신이 위험할 거라고 경고를 하면 누가 믿겠어요?”
“전 아르비체 님의 말이라면 뭐든 믿을 준비가 됐습니다.”
“……네?”
밑도 끝도 없이 다른 이야기로 빠지는 앨라이에게 난 손을 흔들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니까, 제가 다음 희생자가 될 사람을 보내면 신의 예언을 받은 척 경고해 주시면 돼요. 알겠어요?”
앨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롱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진정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제야 제 앞에 놓인 쿠키를 집어 끄트머리를 살짝 베어 물곤 말했다.
“이제…… 조금쯤 알 것 같아요.”
“뭘요?”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제게 갑자기 주어진 임무라 생각해서 막막하기만 했는데, 책무라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낫네요.”
희미하게 웃는 그에게서, 난 애초에 그가 단단한 사람이었음을 느꼈다.
내가 그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없었더라도 원래 단단하게 잘 자라날 나무 같은 사람이었음을.
앨라이는 이미 다 식었을 차를 뒤늦게 홀짝이곤 창밖을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창밖으로, 신전으로 향하는 다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보였다.
그는 많이 차분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 가 봐야 할 시간이네요.”
“어머, 벌써 그렇게 됐어요?”
“네, 개인 기도 시간을 빼서 나온 거라…….”
앨라이는 머쓱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이렇게 일과 시간에 제약이 있는 걸 보면, 대신관직에 대한 제안을 아직 수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가야 할 것처럼 급한 얼굴을 하고서도 내게 손부터 내밀었다. 난 손을 마주 내밀어 그의 손을 쥐었다.
보기와는 달리 꽤 큼직한 손이었지만 레이커스에 비하면 아주 부드러운 촉감에서 어린 티가 났다.
“앞으로도 종종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어머, 당연하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앨라이는 당연한 대답을 듣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수줍은 미소를 머금곤 내 손을 놓고 돌아섰다.
못내 아쉬운 게 있는지 두어 번 더 뒤를 돌아보고서야, 그는 살롱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난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 앉았다.
레이커스와 이야기할 때면 워낙 긴장하게 되니까, 그에 비하면 누구와 대화해도 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털어놓게 되는 바람에 조금 손에 진땀이 나긴 했다.
그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카드 중 하나였다. 혹시나 앨라이를 설득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어떻게 잘 정리가 된 것 같아서 다행이야.’
다 식은 차를 다시 채우는데,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만 있던 아만타 경관이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수상한 자가 접근하는 기척은 따로 없었습니다.”
“아…… 그건 다행이네요. 줄곧 같이 있었어도 괜찮았는데…… 다리 아프겠어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앉으세요.”
“제가요?”
“그럼요.”
“임무 중인데…….”
그녀는 내가 무슨 대단히 너그러운 제안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굴더니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비어 있는 찻잔 하나를 뒤집어 아만타의 앞에 놓고 차까지 따라 주자, 그녀는 완전히 들뜬 얼굴로 조심스레 찻잔을 쥐었다.
“……이렇게까지 잘해 주실 필요 없어요. 다들 지위에 맞게 사는 건데…….”
난 얼른 손을 저었다.
애초에 남작가의 딸인 아르비체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사람 나고 귀족 났지, 귀족 나고 사람 난 것도 아닌데요. 이까짓 차 한잔 가지고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요. 편하게 마셔요.”
“……정말 아르비체 님은 뵈면 뵐수록 신기하신 분이세요. 저희 경감님께서 레이커스 님과 잘 어울린다고 그렇게 침 튀겨 가며 이야기를 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난 얼른 쿠키를 집어 그녀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아만타는 쿠키를 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연신 감탄을 하더니 문득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네? 뭔데요?”
도대체 뭘 물어보려는 건지 아만타는 한참 망설이다가 한 손으로 입 모양을 가리며 아주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 레이커스 님과 사귀면서 신관님과도 만나시는 거예요? 물론, 아르비체 님의 자유이긴 하지만…… 보통은 레이커스 님과 만나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대담하신 것 같아서요.”
앞뒤를 다 잘라먹은 뜬금없는 말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앨라이와 헤어지면서 악수한 걸 봐서 그러나? 아니면 또 만나자는 말을 들어서?’
“그냥 의례적인 인사였어요.”
“네? 에이, 아니에요. 제가 아무리 두 분 사이를 잘 모른다지만, 아까 계신 그 신관분의 눈에 애정이 가득하던걸요?”
“……애정이요? 하지만 신관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네?”
“……네?”
나는 아만타 경관과 서로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이 이야기의 어긋난 부분을 간신히 찾아냈다.
“……신관이면 연애고 결혼이고 못하는 것 아닌가요?”
“네? 왜 그래야 하죠?”
왜 그래야 하냐니.
왜냐하면…… 내 상식으로는 그게 당연하고, 앨라이 쿠스와는 호감도를 쌓아도 데이트를 한다거나 하는 이벤트창 같은 건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고작해야 그에게서 축복을 받는다거나 성수를 받아 마시는 이벤트 같은 것밖에 없었다.
아만타 경관이 내 표정을 보면서 어쩌면 좋으냐는 듯 말했다.
“그 신관님도 참 안됐어요. 아르비체 님께서 이렇게 연애에 대해 잘 모르시는 줄은 그분도 짐작 못하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닌 게 아니라니까요? 백 퍼센트 확실해요. 이성에 관한 관심이 있으셨대도요.”
그 토끼 같은 앨라이가, 나한테?
앨라이 쿠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워낙 성스러워서, 연애라는 가벼운 단어와 나란히 놓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난 피식 웃음이 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 가지고 언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실례일 정도다.
“이런 이야긴 그만두고, 우리 점심에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
“아니,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긴데…….”
‘아만타 경관도 참. 뭔가 하나에 꽂히면 파고드는 습성은 경관이라서 그런 거겠지?’
자꾸 성직자니 눈빛이니 연애니 하는 말을 반복하는 그녀를 달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세 쌍의 발걸음이 급히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봤더니 아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던 그 세 명의 여자들이었다.
“아직 여기 계셨어요?”
밀로라드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하겠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마침 약속이 끝나신 것 같아서…… 괜찮다면 지금 초대해도 괜찮을까 하고 물어보려고요.”
라떼가 얼른 맞장구쳤다.
“지금 가면 마탑에서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라고 해서요. 지금 마탑의 높으신 분들은 다 경시청에 가 계시고…….”
‘부검 이벤트? 부검 이벤트인 거지?’
신이 나서 얼른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은 르뮈에가 아만타를 흘끗 보더니 라떼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라떼가 아차 싶었는지 르뮈에에게 매달려 그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괜히 쓰다듬으며 뒤로 숨었다.
밀로라드가 작게 혀를 차더니 다시 한번 말했다.
“하여튼 재밌는 것만 있으면 사족을 못 쓰는 친구들이라서요. 마탑 같은 곳에 관심 없으실 수도 있는데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해요. 제 소유의 괜찮은 식당이 있으니 식사나 같이…….”
어쩐지 서로 자기의 관심사를 어필하는 듯한 분위기가 재밌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얼른 대답했다.
“아니에요. 관심 있어요. 완전 관심 많아요.”
라떼가 르뮈에의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정말요?”
“그럼요. 언젠가 꼭 구경해 보고 싶었는걸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라떼는 정말 신이 났는지 얼른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르비체 님은 취향도 정말 좋네요. 어디의 누구하고는 다르게.”
[라떼 라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198)
호감도 이벤트 반말 개방]
‘어디를 갈지 선택하느냐에 따라 제안한 사람의 호감도가 오르는 거였어?’
하지만 다시 한번 선택지가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부검 결과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라떼가 내 손을 입구 쪽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우리 동갑이에요. 르뮈에도, 밀로라드도. 우리 말 놓을까요? 응?”
“아…… 그래요. 아니, 그래.”
“좋아.”
마탑과 상단길드, 외과 병동 중 어디가 가장 흥미진진한 장소인지에 대해 실없는 토론을 하며 우리는 살롱을 벗어났다.
막 살롱을 나와 마차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살롱 쪽에서부터 어떤 시선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퍼뜩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