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1화
캐서 헌트의 부검 결과라니.
캐서 헌트라는 이름도, 부검이라는 단어도 놀라웠다.
그 단어를 벌써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난 깜짝 놀랐다.
“……부검이라니요?”
“죽기 직전 기억의 조각 중 일부를 재현하는 마법 기술 말입니다. 처음 들어 보시는 것처럼 물어보시는군요.”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장면이…… 있었다.
피해자 캐릭터에 대한 자료 중 정해진 것들을 모두 수집하면, 주마등처럼 영상이 재생되는 이벤트가.
‘그게 여기서는 부검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구나.’
내가 알고 있는 부검과는 다르지만, 확실한 증거가 되리라.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어차피 주말이라 저도 바람이나 쐴까 했는데…….”
제법 뻔뻔한 나라도 어제 지하실에서 마주친 주제에 이런 걸 물어보자니 뻘쭘했다.
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뱅뱅 돌려 물었다.
“그렇습니까?”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그 근처에 예쁜 분수대도 있고…….”
“안 됩니다.”
하지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항상 빙글빙글 웃으며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던 반반한 사이코패스는, 이번만은 나와 함께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꽤 단호한 거절에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캐서 헌트와 무슨 친분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요.”
그냥 부검 결과 같은 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당최 어디 있겠냐만, 그는 더 이상 날 추궁하지 않았다.
하긴, 그 수상쩍기 짝이 없는 지하실 앞에서 마주치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그였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공연히 위험한 일마다 고개를 내미는 건 그만두십시오. 부탁입니다.”
“……안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 경관님께 부탁드려서 함께 외출할 테니 제 걱정은 마세요.”
“경관은 제가 불러드리죠. 그러고 보니 그린 양은 어딜 가시는 겁니까?”
당장 급한 약속은 역시 앨라이 쿠스 쪽이다.
“……신전에 친구가 있어서 보러 가려고요.”
신전이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살포시 찡그려졌다.
그러고 보면 혼자서 그렇게 거창한 술상을 차려 놓을 만큼 뭔가에 기도하고 싶으면서도…… 퍽 신을 싫어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면 대신관과 살인마라니, 이 게임의 빛과 어둠의 양대 축인데…… 서로 만나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혼자 외출하게 된 게 잘된 일일지도.
“알겠습니다. 볼일이 끝나면 그쪽으로 합류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잘 다녀오세요.”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이 썩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아이라도 되는 양 군다.
그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그가 정말 나를 걱정해서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레이커스 님.”
“네?”
“혹시나 해서 다시 여쭙는 건데…… 제가 아팠던 날이요. 경시청에 참고인 조사를 하러 갔던, 비가 많이 왔던 날.”
“네.”
“그날, 절 데려다 준 경관님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했나요?”
레이커스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죠?”
“……아뇨, 절 계속 과보호하시니까요.”
“과보호는 아닙니다.”
그는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래, 과보호가 아니라 감시겠지.’
하지만 지하실에서 그를 만나고도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난 더 투덜거리는 대신 오늘은 그의 눈에 안 띌 생각만 하자고 결심하며 블리에 씨를 만나 서신을 맡겼다.
앨라이 쿠스는 내 서신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바쁜 일과 중일 텐데도 급하게 답신이 왔다.
신전에서 만나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가 지정한 곳은 신전 앞에 있는 살롱이었다.
나는 경관이 마중 오길 기다리며 정원에 세워진 마차 앞을 뱅글뱅글 돌았다.
‘살인마는 부검 결과를 보러 가고, 당장 사건을 파헤쳐야 하는 나는 못 간다니? 이게 말이나 돼?’
심술이 나서 발끝에 걸리는 돌을 괜히 걷어찼다.
플레이어일 때는 이렇게 소외당한 적이 없었는데. 그냥 캐릭터 중 하나가 되니까 이렇게 서럽다.
“언제까지고 뒤를 쫄쫄 따라다닐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혼자 홀랑 가 버리고.”
물론 부검 결과를 들으러 갈 때 빼고는 그와 함께 있는 게 훨씬 고역이지만.
어떻게든 부검 결과를 들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보다 빨리 또 뵙네요, 아르비체 님.”
뒤를 돌아보니 경시청 소속 경관들이 입는 통일된 갈색 제복 차림에 시원하게 목이 드러나도록 남색 머리를 짧게 자른 경관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은 썩 낯이 익었다.
“아만타 경관님?”
“오늘도 수행을 부탁하셨다고 하기에, 제가 간다고 지원했습니다.”
“……수행이라뇨.”
우리는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신전 옆에 있는 커다란 살롱이었다. 호감도 이벤트로 인해 이번에 개방되는 곳으로, 대표적인 사교의 장 중 하나였다.
마차가 출발한 뒤로 내내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문득 눈앞에 앉은 경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캐서 헌트의 부검 결과.
혹시 경관을 통해서 그 정보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내게 잘해 주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한 마음에, 난 마른침부터 삼키고 아이템 창을 켰다.
“저 혹시, 아만타 경관님.”
“네?”
“이거…… 받으실래요?”
아만타 경관은 내가 건넨 새하얀 들꽃 목걸이를 멍하니 보더니 조금 당황한 듯 미소 지었다.
“이런 걸 다…….”
“예뻐서 한번 엮어 봤어요. 너무 쓸데없는 물건이라 드리기 민망하지만…….”
“아녜요. 아니에요. 너무 예쁩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듯 그걸 손에 쥐고 있다가 목에 걸었다.
그리 좋지 못한 솜씨로 엮인 얼기설기한 꽃목걸이가 경관의 제복과 겉돌긴 했지만, 그녀는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지 한참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나를 봤다.
“사실, 일반인에게 물건을 받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이 정돈 괜찮겠죠?”
아만타가 샐쭉 웃었다.
[아만타 밸브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80/99)]
‘저 경시청의 경감님은 레이커스로부터 금품도 잔뜩 수수하고 있던데…… 고작 이런 꽃목걸이로 그런 말을 하다니. 어쩜 저렇게 순수할까.’
난 잠깐 망설이다가 오른 호감도를 믿고 입을 뗐다.
“저, 혹시…….”
“네?”
“캐서 헌트 말이에요. 오늘 저희 공작님께서 부검 결과를 보러 간다고 말씀하시던데.”
경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 그렇죠. 네. 꼼꼼히 조사하느라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님도 아주 오래 공들여 봐주셨거든요. 오늘 새벽에서야 부검이 끝났습니다.”
“혹시 어떤 내용이었는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아만타는 날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상한 바였다.
‘레이커스가 날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사람인데, 순순히 알려 주면 더 이상하겠지.’
하지만 그냥 납득해 버린 나와는 달리, 아만타 경관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내 손을 꼭 쥐었다.
“……이런, 아르비체 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말았군요.”
“네? 아뇨.”
“아르비체 님처럼 좋은 분께서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험한 이야기는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감당하도록 맡겨 두세요.”
“……아뇨, 저는…….”
“저도 나름대로 꽤 빨리 경관 배지를 달았습니다만, 최근처럼 어수선하고 끔찍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는 건 처음입니다. 걱정되어 못 견디는 마음 이해합니다만, 경시청을 믿고 맡겨 주십시오.”
난 어떻게 해서든 날 안심시키려 드는 아만타 경관을 보면서 살짝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쓸데없이 책임감만 자극했잖아…….’
그 뒤로도 아만타 경관은 살롱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날 안심시키려고 이런저런 경시청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로운 무기가 도입되었다느니,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느니…….
하지만 내게는 경찰만 믿고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경시청에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걸…….’
괜히 캐서 헌트 부검에 관해 물었다가, 날 걱정하기 시작한 아만타 경관의 열의 오른 경시청 이야기만 잔뜩 듣고 만 나는 살롱에 도착할 때쯤 진이 빠져 있었다.
살롱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서 발을 멈추었다.
아주 높은 층높이에 화려한 크리스털과 샹들리에로 장식된 베이지색의 커다란 홀은, 모니터를 통해 들여다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현대의 실내 장식과는 다르게 벽이나 천장 한 곳도 여백을 두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꽉꽉 장식품이나 그림, 조각, 식물 등을 채워 넣은 점이 나름대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점원으로 보이는 세련된 스타일의 남자가 다가와 문을 잡아 주었다.
“예약하고 오셨습니까?”
“아, 네. 앨라이 쿠스의 이름으로 되어 있을 거예요.”
“어디 보자…… 여기 있네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점원이 날 안내해 간 곳은 커다란 홀의 정중앙쯤에 있는 테이블이었다.
몸이 푹 파묻힐 만큼 푹신한 소파는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천으로 씌워져 있었고, 테이블에도 자수보가 덮여 있었다.
메뉴판을 두고 물러가는 점원을 바라보다가, 실내에 분수까지 있는 화려한 실내 장식을 넋을 놓고 구경했다.
‘와, 여길 이렇게 와 보네.’
“저, 혹시 리어먼드가의 가정교…….”
“얘, 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니? 아르비체 그린 양 맞으신가요?”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화려한 정장 차림의 여인 세 명이 내 뒤에 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