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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40화 (4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0화

달각.

달그락.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나지 않는 조용한 아침 식사 자리였다.

나는 앞에 놓인 스크램블드 에그, 소시지, 따뜻하게 데워진 신선한 우유와 큼직한 치즈, 블랙 푸딩을 깨작깨작 먹으며 레이커스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레이커스는 평소와 다를 바 하나 없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참 정갈하게도 식사를 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반듯한 얼굴 어디에서도 나를 향한 살의나 의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지하실 방문 사건은 어젯밤의 그 기나긴 대화로 정말 그대로 끝인 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포크를 드는데, 레이커스가 문득 말했다.

“아직도 궁중 연회에 가겠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까?”

“……네? 네, 그거야…… 가려고 옷도 맞췄잖아요. 당연히 가야죠.”

“옷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냥 제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또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는 논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모니카는 어떻게 하고? 모처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번에야말로 다음 희생자가 순순히 사냥감이 되게 두지는 않을 거다.

그는 내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고서는 절대 말이 통하지 않겠다 싶었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이목을 사고 있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요? 누가 저처럼 가난한 자작가 출신에게 관심을 두겠어요?”

내가 뻔뻔하게 중얼거리자, 레이커스가 골이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뭔가 사고뭉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되어 냅킨을 정리해서 내려놓는 순간, 샤인이 내 뒤쪽을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블리에 씨가 은쟁반에 서신을 받쳐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저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서 있을 생각이야?’

정말 귀족 문화란 고지식하기 짝이 없다니까.

난 레이커스와의 대화도 피할 겸,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블리에 씨에게 다가갔다.

어제 내가 준 들꽃 장식을 작게 잘라 머리에 꽂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다섯 개 정도의 서신이 올려져 있었다.

“저는 식사 다 했어요. 이리 주세요. 공작님께 전달해 드릴까요?”

블리에 씨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중 두 개는 공작님 거고, 세 개가 그린 아가씨 거예요.”

“……제 거라고요?”

순간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커스의 은색 눈과 시선이 맞닥뜨렸다.

‘그것 봐라. 이목을 충분히 사고 있잖느냐?’고 말하는 듯한 그 눈이 의기양양해 보여서, 나는 얼른 서신을 품에 챙겼다.

서신을 확인한 건 샤인과 루나의 식사가 끝나고, 둘에게 내일 무엇을 하고 놀 건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난 뒤였다.

내가 방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내게 온 서신이 못내 궁금한 듯 레이커스가 자꾸 날 쳐다봤지만 난 뻔뻔하게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얼른 문을 닫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서신들을 꺼내 보았다.

첫 번째 서신은 랑비엘 멕레이가 보낸 것이다.

[아르비체 그린에게.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대가 왕궁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지난번 마주쳤을 때, 데이트 신청을 해도 좋다고 하셨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산도 돌려받을 겸, 언제 한번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 랑비엘 멕레이가,

흠모를 담아]

난 얼떨떨해서 눈을 깜박였다.

미래의 희생자 후보와 이야기를 미리 많이 해 두면 좋다.

당장 꺼야 하는 불부터 신경 쓰려다 보니 랑비엘의 존재를 알면서도 따로 경고를 해 주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그때 우산을 잃어버린 게 미안해서라도 답장을 하긴 해야 한다.

시시콜콜 레이커스에 대해 내게 물어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레이커스를 의심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게다가 보아하니 이 저택에 자주 드나드는 걸로 봐서 레이커스와도 친분이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난 다음 서신을 꺼냈다.

아주 새하얀 겉봉에 붉은 봉인이 찍혀 있는 서신이었다.

편지 칼을 찾을 새도 없이 손으로 끝을 찢어 열자, 마치 프린터기로 찍어 낸 듯한 정갈한 글씨의 편지가 나왔다.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의 아르비체 그린 씨에게.

리어먼드가에 계신다는 말씀을 토대로 수소문해서 편지를 보냅니다.

부디, 이 편지가 제대로 도착해야 할 텐데요.

아차. 제 이름부터 밝혔어야 했는데, 편지 순서가 엉망진창이네요.

저는 앨라이 쿠스라고 합니다.]

앨라이 쿠스!

그를 만난 게 어젠데,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연락이 왔다.

워낙 기운이라고는 없는 얼굴로 저는 재능이 없다느니 하는 말이나 해서, 원래 전개와 달리 대신관이 되기 전에 그만둘까 봐 초조했었는데.

나는 얼른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오늘 새벽, 대신관님께 불려 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인 제게 감히 순서가 돌아올 일이 아닌, 어떤 임무를 맡기려 하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안배된 존재인지, 못내 궁금합니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망각의 축복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임을.

- 앨라이 쿠스 드림]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 새벽에 차기 대신관으로 지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앨라이 쿠스를 설득하기가 아주 어려웠을 텐데, 시기가 아주 적절했다.

대신관이 된 후의 그만 알았지, 그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니까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어쩐지 신전을 어제 꼭 들러야 할 것 같더라니.’

절반쯤은 행운이 만들어 낸 산물이지만, 난 기분 좋게 자화자찬했다.

그때, 빠르게 알림창의 문구들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앨라이 쿠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97/198)

호감도 퀘스트 살롱 개방

호감도 이벤트 축제 개방

호감도 이벤트 신전 호수 개방

호감도 이벤트 축복 개방]

잇달아 뜨는 메시지를 보고 난 깜짝 놀랐다.

‘……직접 만나지 않고 편지만 주고받아도 호감도가 오르기도 하는구나.’

지금까지 다른 캐릭터들과 만나서 쌓았던 호감도보다 이 편지로 오른 호감도의 폭이 훨씬 크다.

그만큼 내가 남기고 온 말에 많이 놀라긴 한 모양이지.

난 작게 웃었다.

앨라이 쿠스는 게임 속에서는 항상 딱딱하고, 신도들의 경배를 받는 모습만 나왔던 존재였다.

물론 내게도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지만, 그렇게 모두에게 잘 갖춰진 모습만을 보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런 그와 개인적으로 조금쯤 친해졌다고 생각하니까 재밌기도 하고, 그의 연약하고 힘들어하는 신관 시절을 알고 나니까 의지가 되어 주고 싶기도 해서.

호감도가 오른다는 텍스트가 그냥 이벤트 개방의 수단이 아니라, 어쩐지 실질적인 교류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마침 오늘도 주말이니까 레이커스만 괜찮다면 외출을 해 볼까 생각하며 마지막 서신을 손에 쥐었다.

다른 두 개의 편지와는 달리, 겉봉부터 아주 화려하게 금색의 독수리 문양과 보라색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독수리는 <살인자들의 밤>에서 왕실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문양이다. 내용을 읽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왕궁 연회의 초대장.

그냥 구두로 초대하고 만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따로 초대장까지 보내 주다니 조금 감동이었다.

초대장 또한 참석 여부를 회신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세 개의 서신에 답장하려고 펜을 찾아 책상에 앉았다.

편지지를 세 장 나란히 늘어놓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게임에 뚝 떨어졌을 때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그때는 심지어 리어먼드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마저 아르비체를 보고 제대로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고, 샤인과 루나와도 전혀 친하지 않았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은 사람과 꽤 친해진 셈이다.

물론 레이커스와의 친밀도까지 많이 올려 버린 건…… 정말이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세 개의 편지에 모두 회신을 작성하고, 겉봉을 단단히 봉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리에 씨에게 전달을 부탁하면 되겠지?’

막 문을 여는데, 문 앞에 키가 큰 인영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

너무 놀라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냥 바닥으로 주저앉는데, 익숙한 형태의 큼직한 손이 내 어깨와 팔꿈치를 받쳐 안아 들듯 잡아 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겠어요? 왜 남의 문 앞에 그러고 서 계시는 거예요?”

“막 노크를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잘 안 맞았습니다.”

‘살인마를 보는 데 타이밍이 중요하겠냐마는…… 나보고 조심하라고만 하지 말고, 너나 조심해!’

난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말들을 쏘아붙이며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거, 정말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로.”

레이커스의 손에서 벗어나 간신히 내 발로 땅을 디딘 나는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어떤 볼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붙여 내 주위를 뱅뱅 맴돌 셈인가 싶어서 한 질문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정말로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 외출할 일정이 있습니까?”

“네? 아…… 글쎄요. 생각은 하고 있는데…… 오늘도 같이 가시게요?”

“아뇨. 제가 경시청에 급한 볼일이 있어서, 오늘은 동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외출할 일이 있으시다면 경관을 대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레이커스라는 불편한 감시자가 따라붙지 않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경시청에 볼일이 있다는 건 좀 궁금했다.

“아, 네…… 그런데 혹시 어떤 일로 가시는 건가요?”

슬쩍 떠본 말에, 레이커스는 잠깐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답했다.

“캐서 헌트의 부검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요.”

내 속을 꿰뚫어 보려는 부드러운 은빛 시선 앞에서, 나는 표정 관리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작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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