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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39화 (3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9화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말이요?”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곳에만 발을 들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될 수 있으면 안전한 곳에만 계시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레이커스의 말이 자동 번역되었다.

‘레이커스의 뒤를 캐느라 나대는 건 그만하라는 경고겠지?’

칼을 들이밀거나 목을 조르면서 해도 될 말을, 이렇게 예쁜 분위기 속에서 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질린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주억거리자, 레이커스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갑자기 목이 타서 내 앞에 놓인 잔을 벌컥벌컥 비웠다. 향은 좋지만, 도수가 센 브랜디는 목을 뜨겁게 달구고 지나갔다.

그는 내 잔을 채워 주고 제 잔도 채웠다. 그러곤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의 손짓을 따라 호박색 액체가 크리스털 잔 안에서 부드럽게 춤을 췄다.

오래도록 말을 고르던 그는 긴 침묵 끝에서야 입을 뗐다.

“너무 많이 아는 건 독이 되니까, 부디 어둠에 너무 깊이 발을 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 말을 하면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레이커스의 눈에 묻은 묘한 상냥함은, 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도 퍽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이다.

‘……호인을 연기하는 것에는 도가 트였겠지.’

난 입술의 안쪽 살을 깨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 말이 끝나셨으면, 이제 가 봐도 되나요?”

“제게 묻고 싶은 게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지하실까지 뒤지고 계셨으면서.”

……지하실에 대해 궁금하긴 하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날 빤히 바라보는 레이커스의 눈빛을 보니, 대답을 잘못 고르면 데드 엔딩으로 곧장 이어질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던 나는 결국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정말로 귀걸이를 잃어버려서 갔던 거라니까요? 물론,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레이커스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런 거로 해 두죠.”

정말로 대화가 끝난 것 같아서 막 몸을 돌리려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네?”

“전 너무 많은 걸 봤습니다.”

“……네?”

“그래서 한 번씩, 저를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도 가급적 가지 않으셨으면 하지만, 제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오는 일만은 절대 삼가 주십시오. 당신에겐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주박이 듣지 않으니. 이것만은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방에 뭔가 있는 모양인데? 살해 도구든, 다른 증거든.’

그의 비밀 공간이라는 이 옥상은 보여 주면서 방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걸 보니.

난 속으로 만약 다음에 그의 방에 가게 된다면 절대로 들키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알겠어요. 제가 거기에 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난 그의 진지한 충고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려 주고서야 그 아름다운 옥상과 아름답기 짝이 없는 남자로부터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힘없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천장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레이커스와 만나는 순간, 심장이 정지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한참을 심호흡하던 나는 사건 수첩을 펼쳤다가 덮었다 하며 상념에 잠겼다.

‘레이커스가 내게 직접 경고했잖아. 더 깊게 파고들지 말라고. 그런데 당장 진엔딩을 보겠다고 더 설치는 건 위험해.’

지금은 좀 더 몸을 사릴 때다.

만약 이 게임에 레벨 시스템이 있다면 나는 지금 게임을 갓 시작해서, 제대로 된 방패나 갑옷 하나 갖추지 못하고 어디 양조장에서 술을 받아 오라거나 사과를 따 오라는 잡퀘스트나 처리하고 있을 그런 수준의 레벨일 거다.

그런 내가 이 게임의 최종 보스를 잡겠다고 날뛰고 있으니 단번에 해결될 리가 없지.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고작 두 개 남은 하트를 바라보았다.

‘이 게임은 난다 긴다 하는 스트리머들도 그만둔 그런 게임이잖아. 물론 마음이 조급하지만…… 더 조심스럽게, 느긋하게 접근해야 해.’

그리 만만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곤 상태창을 하나하나 꼭꼭 눌러 차례대로 확인했다.

이것저것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아 보이지만, 이 게임은 애초부터 선택지형으로 진행되는 호감도 쌓기 게임이다.

루트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각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릴 수밖에 없다.

파크를 한 바퀴 돌고 나니 그 점이 더 확실해졌다.

증거를 얻는 루트는 생각만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레이커스에 대한 파일도 불에 타 버렸을 게 뻔하고.

샤인과 루나의 호감도는 꽤 많이 올린 편인 것 같은데도 아직 개방된 이벤트가 없는데 공주와 레이커스의 경우는 호감도 레벨이 2가 되기가 무섭게 메인 이벤트들이 개방되었지.

샤인과 루나는 플레이어였던 시절에는 이름도 모를 정도의 NPC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벤트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주요 인물들의 환심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

호감도 창을 조회해 보다가 레이커스의 이름에서 시선이 멎었다.

그의 이름 옆에 적혀 있는 이벤트의 가짓수는 정말 월등하게 많았다.

……메인 캐릭터와의 호감도를 올리는 밑작업이 중요하다는 건, 레이커스와 더 친해져야 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은데…….’

레이커스와 지금도 충분히 너무 가깝다. 이 이상 가까워지면 증거고 뭐고 얻기 전에, 말실수라도 해 버릴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눈을 덮었다.

처음 게임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는,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쉬워 보였다.

대충의 타임라인도 다 아니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너무 막막하다.

레이커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데 무슨 호감도를 올려서 루트를 개방한단 말이야?

‘결국 지하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잖아.’

그 점이 못내 답답했다.

몰래 갔다가 또 걸리면 그땐 정말 레이커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지하실 루트를 개방하는 방법은 없을까?

레이커스와의 호감도 이벤트 중에 혹시 있지는 않을까……?

나는 떨떠름하게 호감도 창을 한참 노려보다가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를 안은 채로 가물가물 감기는 눈꺼풀을 내려 감았다.

“선생님, 일어나!”

“알비 선생님! 일어나세요!”

푹 잠들어 있던 나는 샤인과 루나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간에 팔을 뻗어 둘에게 침대로 올라오라고 손짓하자, 샤인이 머뭇거리며 걸터앉았고 루나가 신발을 벗고 한참 끙끙거리며 기어 올라왔다.

나는 두 아이를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 주었다.

“……맨날 이런다니까.”

“알비 선생님 좋아요!”

내 품에서 각기 재잘거리는 아이들 특유의 높은 체온이 퍽 기분 좋았다.

요즘엔 그래도 내가 일어날 때까지 착하게 기다렸다가 식당에서 만나곤 했는데, 내가 크게 앓은 뒤로는 어쩐지 예절 교육을 하기 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꼭 이렇게 침실로 와서 내가 잘 일어났는지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 점이 또 귀엽기도 했고, 내가 아플까 봐 불안해하는 모습이 미안하기도 해서 당분간은 잔소리하지 않고 둘 생각이었다.

한참 양팔에 둘을 끼고 쓰다듬고 있는데, 루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제 루나랑 안 놀고 어디 갔어요?”

난 빙그레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에겐 선생님의 삶이 있단다. 주말에는 선생님만의 시간을 보내야지.”

샤인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하며 말했다.

“선생님 어제 드레스 맞췄다며! 유모가 다 말해 줬어. 선생님, 왕궁에 놀러 갈 거라고.”

“어머. 맞아. 왕궁 연회에 가려고 준비했단다. 왜? 너도 가고 싶어?”

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드라운 금발이 내 손 안에서 사락사락 쓸렸다.

“아냐. 난…… 됐어.”

다과회는 그렇게 가고 싶어 했으면서, 의외였다.

“정말?”

“……멀리 가면 위험하다고 했으니까. 됐어.”

그 말을 하는 샤인의 금빛 눈동자에서, 정말로 아이다운 호기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한 뭔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충실하게 듣는 아이가 있을까?

그러고 보면 이 두 아이는 한국에 있을 때 아이들이 여상하게 들어넘길 만한 사소한 괴담이나 동화 같은 것에도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포 게임 속에서 두 부모를 잃은 이 두 아이가 더욱 가여웠다.

어제 지하실을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그 어두운 곳에서 불조차 켜지 않고 레이커스가 뭘 했을지를 상상하면 소름이 오싹 돋는다.

“샤인, 루나.”

“응?”

“왜요, 알비 선생님?”

“언젠가는 꼭 여기서 나가자, 우리.”

“무슨 말이야?”

“어디로 갈 거예요? 소풍?”

“아니, 그냥. 그냥…… 안전한 곳으로.”

둘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지만, 난 그 순간 생각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항상 겁에 질려 있는 이 아이들에게도 언젠가는 도망칠 기회를 주고 싶다고.

이 아이들이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삼촌의 정체를 알게 되기 전에.

무사히 어디론가 탈출할 곳을 찾아 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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