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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38화 (38/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8화

난 레이커스가 잡아 주는 의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숙녀를 대하는 예의라면 예의인데,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해 주는 예의치곤 너무 과하지 않나.

“……저도 손 있어요.”

“압니다.”

그를 면박 주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조금 민망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레이커스는 뻔뻔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대답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난 어쩔 도리 없이 살인마가 잡아 준 의자에 가서 앉았다.

레이커스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포근한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고 냅킨도 풀어 건네주더니 내가 집기 쉽도록 다른 접시들 위치도 조정해 주었다.

그러곤 내게 묻지도 않고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더니 옆에 있는 술을 따라 내게 건네었다. 호박색의 액체가 찰랑거리는 게 참 보기 좋다.

“……제가 뭘 마실 줄 어떻게 알고요.”

“저번에 좋아하는 것 같기에.”

그 말에 슬쩍 코를 박고 향을 맡아 보니 아주 달콤한 과일 향이 슬며시 올라왔다.

와인 향보다도 더 짙은 포도나 사과가 섞인 듯한 그 향기는 이미 맡아 본 적 있는 거였다.

분명 저번에 마실 때 향이 좋다고 생각했던 그 브랜디구나.

그런데 내가 이 술이 마음에 든다고 한 적도 없고, 레이커스의 앞이라 정신 바짝 차리려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레이커스가 웃음을 흘리더니 중얼거렸다.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생각이 다 표정에 드러나는 편이라고.”

‘……내 생각이 그렇게 읽기 쉽나?’

불만스레 그를 노려보자, 그가 그 잘생긴 얼굴로 샐쭉 웃었다.

난 이제 습관이 된 한숨을 겨우 삼켰다.

“왜 부르셨어요.”

“여러 가지로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그리고 그린 양도 온 집을 뒤지고 다니는 것보다 제게 물어보는 게 빠르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당장 잘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예쁘게 차려 두고 술자리를 즐기시는데, 제가 방해하는 것 같아서 그러죠.”

그는 제 술잔도 채우고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제 나름의 의식 같은 겁니다. 신에게 하는 기도를 대신해서?”

제사상 같은 거란 뜻인가?

“기도는 신전에 가서 하시면 되잖아요.”

“신전에서 믿는 신은, 제게 형벌과 저주와 족쇄만을 내렸습니다. 그런 신 앞에 무릎을 꿇기에는 저도 짜증이 나서요. 신의 존재조차 믿기 싫을 정도로.”

“……안 믿는 신을 위해서 이렇게 상까지 차리나요?”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아가기엔…… 의지할 곳이 너무 없어서. 점점 이렇게 되더군요. 미치지 않으려면 뭔가에는 있어야겠어서.”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보자,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이 달리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음식에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내고 옥상에서 술판을 벌인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름의 기도 방식이라고 하니까 어딘가 짠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꾸 그를 가엾어 하는 내가 너무 이상해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예요? 할 얘기만 빨리하고 얼른 자고 싶어서요.”

레이커스는 제 술잔을 비우고, 다시 한번 채우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린 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제가 순서를 잘못 안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기억하는…… 그러니까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제겐 처음이라서. 그래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무슨 말이야?’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말에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짐작 가는 거라면 있긴 했다. 레이커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기억 삭제’라고 말한 순간이.

시스템 에러 메시지가 뜬 걸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뭔가,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레이커스와 몇 번을 더 마주쳐도 그런 메시지는 다시 뜨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건망증에라도 걸려 있다는 뜻일까?’

“……제가 왜 기억하는,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인 거죠?”

“그건 저도 묻고 싶습니다. 왜 기억하시는지.”

“……그건 저도 모르죠. 애초에 뭘 기억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는 눈을 접어 웃곤 진지한 눈으로 날 마주 보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구석은 없습니까?”

무슨 이야긴지를 모르는데 짐작 가는 게 어디 있겠어?

모처럼 살인마와의 일대일 대화 이벤트이니만큼 단서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화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지만, 전부 뜬구름 잡는 말뿐이니 지금 무엇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서일까?’

하지만 그걸 실토할 수야 없잖아. 정신병자 취급받을 게 뻔하니.

그리고 레이커스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듯이, 나도 내 비장의 비밀 정도는 남겨 두어야 마지막에 쓸 카드가 있을 것 같아서 ‘짐작 가는 구석’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내가 어깨만 으쓱하자, 그가 한숨을 쉬며 내 빈 술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물론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제겐 그게 좀 큰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래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신경 써서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렵네요.”

“……지킨다고요?”

“네. 하지만 무턱대고 지켜보는 것보다는 앞뒤 정황을 좀 더 설명해 드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이렇게 온갖 곳을 뒤지고 다니면 아무리 제가 주변에 있어도 소용이 없겠다 싶다는 겁니다.”

난 알아듣지 못할 사이코패스의 말을 이해하길 포기하고 시선을 돌려 환상적인 주변을 다시 감상했다.

온화한 조명, 담요에 싸여 맞기에 딱 기분 좋은 서늘한 바람, 달콤한 향의 술, 구미를 당기게 하는 음식들.

그리고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리어먼드가의 정원도 멋진 볼거리였다.

바닥에서 헤매기만 할 때는 장미 덤불이 마치 미로 같다고 생각만 했는데,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미로 같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당최 이해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놓고 무슨 말로 날 현혹하려고?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입술을 꽉 깨물어 가며 눈을 부릅뜨자, 그가 진지한 표정을 무너뜨리며 허리를 굽혔다.

“……큭. 큭큭.”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45/396)]

뜬금없는 호감도 상승과 맥락 없는 웃음에 문득 신전 앞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모두에게 친절한 레이커스 님이지만, 막상 아주 친밀한 사람은 없다고 했나? 마음을 잘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흥, 마음을 주지 않기는. ……저놈의 호감도는 필요도 없는데 시도 때도 없이 오르는데.’

내가 그렇게 곱지 않은 눈으로 보든 말든, 레이커스는 저 웃고 싶은 만큼 실컷 웃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크흐…… 재밌는 분이라는 말도 이젠 지겹겠지만, 정말 재밌는 분이십니다.”

“……그것참 잘됐네요.”

레이커스는 긴 숨을 뱉고 좀 정신을 차렸는지 정갈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사람은 이런 환경을 견디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울하실까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신 것 같네요.”

난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우울할 일이라면 물론 넘쳐 나지만, 그가 말하는 ‘이런 환경’이라는 게 뭐지?

문득 레이커스와 함께 맞닥뜨렸던 거대한 거미 크리쳐의 형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연이어 신문마다 도배되고 있는 연쇄살인과 관련된 이야기며, 그와 함께 외출했을 때 봤던 실종자 수색과 관련된 장소들도.

게다가 경시청 앞 골목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일도.

탈출구도 없는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절망과 매일같이 살인마와 맞닥뜨리며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공포가 워낙 커서 다른 것들에 대한 감정은 그나마 흐릿해져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걸 모르는 타인의 처지에서 보기에도, 내가 썩 불행한 상황에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걸 레이커스의 입으로 듣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야말로 내가 견디기 힘든 모든 환경의 핵심 원인이었으니까.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억지 춘향으로 한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

‘눈치가 있다가도 없다니까.’

“……그러니까, 절 보자고 한 이유가…….”

“아, 네. 제가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건, 당신이 제게 큰 의미가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와, 저런 느끼한 말을 뻔뻔하게도 하네.’

누가 들으면 연인 간에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나는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은빛 눈동자를 피해 눈을 내리깔고 술을 들이켰다. 그의 멜로 눈깔을 보다가 오해라도 할 것 같아서.

그리고 말을 돌리려고 픽 웃으며 농담을 꺼냈다.

“저번에 저주를 풀어 줄 사람을 찾는다고 하시던데, 그게 저라도 되나요?”

한참 대답이 없어서 그를 바라보자 레이커스는 아주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만…… 조금쯤,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달까요.”

“……제가요?”

“뭐, 잊지 못한다는 건 서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래도 반가운 일이긴 하니까요. 저도 몰랐는데,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는데, 저도 조금쯤 외롭고 답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 여기 있었으니까요.”

그의 우울한 눈빛이, 아주 오래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강아지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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