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7화
심장이 멈출 듯이 놀란 나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고 얼른 뒤로 몸을 돌렸다.
얼른 계단을 다시 올라갈 셈으로 자꾸만 굳는 발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끼익-.
‘……안 돼!’
아주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고 생각했는데도 낡은 계단이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내가 되돌아가는 것보다 그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먼저였다.
탁. 탁. 탁.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진 누군가가 내 어깨를 짚었다.
“……흡!”
틀어막은 입 사이로 채 삼키지 못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거의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리볼버를 집어 들기 직전, 저음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머리 위에서 뚝 떨어졌다.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여상한 목소리의 주인은, 레이커스였다.
내가 들고 있는 등불에 비친 그는 평소의 그 싱글벙글한 표정 대신 어딘가 딱딱하고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하긴, 이 시간이 되도록 밖에 있진 않겠지.’
난 주저앉은 채로 그를 바라보며 리볼버를 꺼낼지 말지를 한참 망설였다.
‘……날 죽이려나? 총을 꺼내 봤자 대적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반항이라도 해 보다 죽는 게 낫겠지……? 아니면 호감도를 빌미로 빌어 볼까?’
죽기 전에는 주마등이 지나간다고 하던데,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건 후회뿐이었다.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아니…… 오더라도 레이커스가 없는 게 확실할 때 왔어야 했어. 아니면 아만타 경관에게 도와 달라고 요청이라도 해 볼걸.’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눈앞으로 손 하나가 휙 다가왔다.
“……힉!”
머리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는데, 레이커스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세요.”
“……네?”
“여긴 위험합니다. 계단도 좁고. 일어나세요.”
그 손은 나를 위협하는 대신 내 손을 쥐었다. 그러고는 나를 단단히 지지하며 일으켜 세웠다.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우울하고 냉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 못 들었습니까?”
“……네?”
“지하에 내려오지 말라는 말. 틀림없이 고용된 첫날에 들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여긴 왜 온 겁니까?”
그 눈에는 엄중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 서린 그 경계심이, 왜 그렇게 우울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려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건, 아마 내가 아니라 ‘아르비체 그린’이었겠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뭐, 그걸 듣지 않았다고 해도 들어가도 좋을 것처럼 생긴 문은 절대 아니긴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준비해 둔 어설픈 변명을 입에 올렸다.
“……그, 제가 귀걸이를 잃어버려서요. 찾다가 길을 잘못 들었네요.”
“……귀걸이를요?”
뻔한 거짓말이라도 한번 해 보라는 듯 나를 쏘아보는 그의 잿빛 눈앞에, 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줄줄 늘어놓았다.
“아까…… 아니, 아까가 아니라 어제 낮에 숨바꼭질하면서 귀걸이를 흘려서 찾고 있었거든요. 죄송해요.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어요.”
어이없다는 듯 나를 한참 바라보던 레이커스가 몸을 슬쩍 물렸다.
그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한결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조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리어먼드가의 일원으로서.”
“……네, 주의하겠습니다.”
‘……살았다.’
밖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리어먼드가의 일원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잘리는 건 아닌 모양이지.’
날 세워 준 뒤에도 내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의 손이, 슬쩍 내 맥박을 짚듯이 손목을 쥐었다 놓았다.
아직도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는 날 알았겠지.
무슨 생각인가 싶어 손을 화들짝 놀라 뿌리치듯 놓았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손을 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좀 하시죠.”
‘지금? 이 늦은 시간에? 밤 열두 시가 넘은 야심한 시간에 대체 무슨 얘길 한다는 거야?’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하기에는 우리가 만난 장소가 너무…… 구석진 곳이긴 하다.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그를 빤히 보고 있는데, 레이커스는 제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나를 스쳐 지나 계단 위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이 나를 향해 있었지만, 나는 당장 걸음을 돌려 이 지하실을 빠져나가라는 축객령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고개를 돌려 아직도 깊은 어둠이 가득한 지하실 쪽을 잠깐 바라보던 나는, 그 지독한 어둠이 간직한 비밀을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한 채 아쉽게 몸을 돌렸다.
이야기를 좀 하자길래, 저번처럼 그의 방으로 갈 줄 알았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묵묵히 계단을 자꾸만 올랐다.
성큼성큼 걷다가도, 간혹 나를 기다려 주기라도 하듯 느린 걸음으로 걷곤 했다.
그를 쫓아 계속 계단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샤인과 루나가 있는 2층도 레이커스의 방이 있는 3층도 지나쳤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알기로 4층 이상의 방에는 레이커스와 내가 대화할 만한 응접실은 없었다.
그나마 진정했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죽임당하지 않고 어떻게 이 사건을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의 등을 보며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는 동안, 리볼버를 갑자기 꺼내 들어 그 등을 겨냥하면 내가 그를 이길 수 있는 승산이 얼마일지를 자꾸 가늠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등을 보면서도 도저히 이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듯, 간단하게 내 총을 제지했던 레이커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다 왔습니다.”
“……네?”
정신이 들고 보니 레이커스는 어느새 문고리를 쥐고 날 돌아보고 있었다.
“이 너머에 제가 쓰는 비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그래요?”
그가 가리키는 문은 계단의 끝에 자리 잡은 묵직해 보이는 나무문이었다.
잠금 장치가 계단 쪽으로 나 있는 걸로 봐서, 옥상으로 향하는 문처럼 보였다.
뭘 하는 공간일까.
‘살인마의 비밀 공간 같은 거, 정말 알고 싶지 않은데…….’
온갖 공포 영화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꼭 가장 잔인한 장면은 살인마의 ‘비밀 공간’에서 나왔다. 뭔가를 수집한다든지, 뭔가의 목표를 정한다든지, 혼자만 보는 영상을 시청한다든지…….
거기에 초대받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좋지 않은 상상을 이어 하던 순간, 레이커스가 문을 달칵 열었다.
“늦은 시간에 갑작스러운 초대긴 하지만, 어차피 주무실 것 같지는 않으니 괜찮겠죠.”
그 말과 함께 그가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섰다.
“……와.”
나는 저도 모르게 경탄을 흘렸다.
온종일, 한 달 내내 우중충하게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눈이 잘 오지 않는지 지붕은 뾰족한 대신 완만한 굴곡 형태이거나 아예 평평한 곳도 있었다.
그중 가장 넓은 옥상 같은 곳에, 열 개가 넘는 등불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등불 사이에 둘러싸인 공간에는 크지 않은 목제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오붓하게 놓여 있었고, 알록달록 예쁜 식탁보와 담요가 각각 놓여 있어 따스해 보였다.
하나의 포도주 잔과 먹기 좋게 놓인 치즈와 크래커, 말린 고기 같은 것들이 정갈하게 늘어져 있었다.
‘……뭐야, 혼자 파티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레이커스가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평소에는 정말 혼자 쓰는 공간인지, 그는 시종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여기저기를 뒤져 잔 하나와 앞접시를 더 꺼냈다.
“오시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간을 가장 빛내는 것은…… 레이커스였다.
아까까지 내가 그를 그렇게도 겁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달빛만으로도 환하게 빛나는 그 사람은, 운치 있는 등불 사이에 둘러싸여 있자 은밀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등불이 흔들림에 따라 어른어른 그림자가 졌다가 걷히는 또렷한 굴곡의 얼굴에는 언제까지고 시선을 두고 싶을 정도의 묘한 퇴폐미가 있었다.
사물의 색을 희미하게 감별할 정도의 빛밖에 없는데도, 은색에서 잿빛으로 점점 색을 달리해 가는 그의 눈은 참 오묘하게도 빛이 났다.
달칵.
바스켓 안의 얼음이 살짝 녹으면서 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늦은 깨달음이 민망함과 함께 밀려들었다.
나만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묘한 웃음을 머금은 레이커스 또한 나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내내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것도.
‘……미친 거 아냐? 또, 또 넋을 놨어. 지금이 그럴 때야?’
방금까지 그의 등을 보면서 잔인한 살인마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던 탓에, 온화한 분위기에 동화된 레이커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놓고, 또 그 잘난 얼굴에 감탄하고 만 거겠지.
‘언제까지 잘난 얼굴 보고 감탄만 할 거야? 이래서 진엔딩 보겠어? 잘생긴 얼굴 감상만 하다 죽을래? 하트 하나 돼야 정신 차릴 거야?’
정신이 번쩍 들도록 내 양쪽 볼을 손가락으로 꾹 꼬집는데,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풉.”
……웃음소리?
기가 막혀 그를 노려보자, 눈초리까지 접어 가며…… 아니,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채 웃고 있는 레이커스가 보였다.
지하실에서 보았던 지친 듯한, 냉랭한 그 표정을 보고 나서 저 표정을 보니까 얼마나 환해 보이는지 공간 전체에 조명을 하나 더 들이댄 느낌마저 들었다.
‘……젠장,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난 또 홀릴 것 같은 기분에 내 볼을 더 힘껏 꼬집고 레이커스를 쏘아보며 그의 앞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쿡쿡. 하,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뇨?”
“우울해 보이진 않으셔서.”
레이커스는 뜻 모를 소리를 하고 빙그레 웃더니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