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5화
다만 비늘 같은 경우에는 경시청 근처를 지나다가 정말 우연히 아이템 표시가 떠 있는 것을 보고 주웠는데…… 어디에 쓰이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이템의 상세 내역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대체 뭐의 비늘이라는 거야?’
난 비늘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경관과 함께 돌아다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간 궁금하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으니까.
짧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막 리어먼드가 앞에서 마차를 세워 주는 경관에게 슬쩍 지나가는 말로 떠보았다.
“저, 경관님. 그런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경시청에 불이 났다고 하던데…… 아주 큰일이었겠어요.”
아만타 경관은 말도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어휴, 무슨 불이 진압도 잘 안 되는지…… 창고를 아주 다 태워 먹었다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하잖아요. 그런데 불까지 났으니. 상사분들께서 아주 뒤집어지셨어요. 야근은 야근대로 하고, 욕도 욕대로 먹고…….”
공포 게임 속인 데도 ‘요즘’만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니 조금은 다행이다.
그녀는 그 사건만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머,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도대체 경시청 창고를 어떤 놈이 그랬는지…… 잡히기만 하면 아주 그냥.”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물었다.
“……그러면, 일부러 불을 냈다는 건가요?”
그녀는 제가 한 말에 제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건 비밀인데요. 뭐, 레이커스 님의 연인이시니 아르비체 님껜 굳이 숨길 필요도 없겠죠. 연인 간에는 비밀이 없다고 하니까요.”
‘……연인 간엔 비밀이 없을지 몰라도 경찰과 리어먼드 공작 사이에는 비밀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기가 찼지만 주는 정보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연인이란 소리도 부정하지 않고 얌전히 경관을 바라보자, 아만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불이 나면 소방청과 합동해서 감식하게 되는데, 소방청 쪽의 말로는 발화지에 기름통을 가져다 일부러 불을 지른 흔적이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때 청에 없어서 얘기만 들었지만요.”
“……세상에. 누가 그런 몹쓸 짓을.”
나는 자못 놀란 것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레이커스가 그런 몹쓸 짓을 했겠지.’
레이커스가 직접 불을 질렀든, 사람을 시켰든…… 어쨌든 제 사건 파일이 떡하니 있는데 그것을 두고만 볼 레이커스가 아니긴 하지.
그래도 증거 하나만 없애면 될 것을 아예 불을 질러 버리다니.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저지르는 일이니까. 그 정도는 쉽다는 건가? 방화가 살인보다는 더 경범죄긴 하지.’
생각할수록 더 무서운 놈이다.
게다가 경시청과 결탁되어 있기까지 하고. 어쩌다 그런 놈이랑 엮여서 같은 집에 살고 쇼핑도 같이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게 언제쯤 있었던 일인가요?”
“한…… 삼 일 됐나? 아직 제 자리에서도 탄 냄새가 안 빠지고 풀풀 풍긴다니까요?”
삼 일.
그렇다면 내가 앓고 있었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오래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더 빨리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그때 경시청에서 무리수라는 걸 알더라도 억지로 파일을 봤어야 했어.’
난 안타까움에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만타는 내 긴 한숨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깜짝 놀라서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차, 어쩌다 이런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건 이야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이렇게 떠들게 되는 것 같네요.”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지만 아만타는 그저 예의상 꺼낸 화두였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난 경관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지만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아만타 경관은 날 감시하는 게 아니라 호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난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누군가를 경계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아니에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고개를 젓자, 아만타가 뭔가에 감동하기라도 한 듯 눈을 반짝였다.
“아닙니다. 관심도 없으실 일을 이렇게까지 들어주시다니…… 정말 레이커스 님께서 반하실 만해요. 소문대로 너무 상냥하신 분이세요.”
[아만타 밸브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20/99)]
‘호감도는 항상 내 의도와 상관없이 오른단 말이야. 나쁠 것은 없긴 한데…… 아니, 좋긴 한데…….’
플레이어일 때는 경감의 호감도도 Lv2 이상 올려 본 적이 없고, 경관들의 호감도는 아예 올려 볼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다.
지정된 루트도 거의 없거니와, 공인이라는 설정 때문인지 워낙 거리감이 있고 딱딱하게 굴어서 아무리 선물 공세를 해 봐도 호감도가 오르지 않는 까다로운 상대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올리게 될 줄이야.’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볼을 긁었다.
아만타 경관은 작게 미소 지으며 내게 깍듯하게 경례까지 붙여 보였다.
“오늘은 레이커스 님의 부탁으로 잠깐 동행해 드렸던 거지만, 다음에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어머,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만타 경관은 내가 현관문의 문고리를 쥐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몸을 돌렸다.
“어머, 어서 오세요.”
현관에서 코트를 받아 들며 반갑게 맞아 주는 블리에 씨에게 살짝 웃어 주자, 블리에 씨가 내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혼자 돌아오셨네요?”
아무래도 레이커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눈치였다.
증거를 수집하는 것도 좋지만, 그의 행적을 쫓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도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불안함이 차올랐다.
나는 최대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연기해 보였다.
“아, 네. 레이커스 님은 뭔가 볼일이 있다고 하시네요.”
“어머, 그러세요? 그럼 식사는 따로 차려야겠네요.”
“부탁드려요.”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나는 다시 블리에 씨를 돌아보았다.
동그랗고 큰 안경을 쓴 그녀가 내 코트를 잘 정리해서 접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볼일이 더 있으세요? 따뜻한 다과라도 좀 내어가라고 할까요?”
계속 궁금했다.
이 집 지하에서 나는 쇠사슬 소리를 들은 뒤로.
블리에 씨와 이 집의 사용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아니, 분명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도대체 그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레이커스가 어떤 거짓말과 변명으로 둘러댔다고 해도 그냥 그렇구나 생각하고 말 문제가 아니잖아.
‘……설마, 만약 공범이라면?’
꼴깍.
난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냥 물어보지 말자.’
만약 그녀가 공범이기라도 했다간…… 아니, 그냥 방조자라 하더라도, 내가 이 집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까지 잃어버릴 거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절대 물어보지 못할걸. 레이커스가 자리를 비운 이런 기회가 쉽사리 또 올 것 같아?’
내가 한참을 망설이며 우뚝 서 있기만 하자, 블리에 씨가 곤란한 얼굴로 내 낯을 살폈다.
“무슨……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누가 폐라도 끼쳤나요? 아니면,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린 부분이 있나요? 뭐든 말씀해 주세요.”
블리에 씨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알고 있다면? 공범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리는 건 멍청한 일이 될 뿐이다.
‘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될 거야.’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그래서만은 아니다.
‘……블리에 씨는 정말 이 공포 게임 속에서 내 마음의 오아시스였단 말이야.’
블리에 씨를 믿고 싶은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과 고집 같은 것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했다.
나는 눈을 꾹 눌러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항상…… 항상 고마워요.”
“정말로 괜찮으세요?”
“네,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이거, 드리려고요.”
나는 그냥 슬쩍 웃고서 오늘 가져온 아이템 중 하나를 내밀었다.
여름 들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받아 든 블리에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더니 솜씨 좋게 크기를 조절해 붉은 머리카락 위에 가볍게 얹었다.
목걸이로 만든 거지만 그런 식으로 머리에 쓰는 것도 퍽 예뻤다. 올망졸망하게 조그맣고 새하얀 꽃잎들과 선명한 녹색 잎들은 그녀의 머리에 썩 잘 어울렸다.
“잘 어울려요?”
살짝 들뜬 물음에 난 얼른 대답했다.
“정말 예뻐요.”
“정말 감사합니다. 기뻐요.”
[블리에 화이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00/198)]
예상대로 호감도가 꽤 올랐다.
본래 블리에 씨는 저장을 담당하는 NPC일 뿐이라서, 호감도 작업을 하는 대상조차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메인 캐릭터들처럼 여성에게 선물하면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 블리에 씨에게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블리에 씨의 호감도는 Lv.2.
최대 호감도 레벨이 9인 점을 고려하면 아직 더 올릴 여지는 남아 있었다.
난 신이 나서 거울에 자꾸 얼굴을 비춰 보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랐다.
‘궁금한 점은 호감도 작업을 더 한 뒤에…… 그때 물어봐야지. 그러면…… 솔직하게 대답해 줄 가능성도 올라가잖아. 레이커스에게 날 밀고할 가능성도 줄어들 거고…….’
아니면 블리에 씨가 내게 먼저 털어놓아 줄지도 모르지.
난 나를 향한 순수한 호감만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