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4화
난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어둡고 짙은 먹구름 아래로 높이 솟은 신전의 지붕만 보일 뿐, 특이할 점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 아까 레이커스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신전 지붕 위쪽에 어둡게 보이던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런 건 구름이 흘러감에 따라서 보이고 말고 하는 걸 테니까…….
난 옆에 선 경관을 흘끗 돌아보았다.
“방금 들었어요?”
“네?”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아만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원래 한 번씩 그런 소리가 들려요. 좁은 골목이 많아서,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좀 소리가 기기괴괴하답니다. 아르비체 님도 파크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봐요?”
“아…….”
‘바람 소리라고? 방금 그 괴상한 소리가?’
이해되지 않아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아만타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보니까 파크 출신이면 누구나 신경 쓰지 않는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가 없어서 더 묻지 않았다.
아만타는 조금도 줄어들 기세가 없는 줄을 흘끗 바라보곤 내게 말했다.
“줄 길이를 보아하니 늦은 밤에나 신전에 들어갈 수 있겠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는 신전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다리 너머까지 줄을 이을 줄은 상상도 못해서, 작게 한숨을 토했다.
레이커스보다 늦게 돌아가는 건 상관없지만, 사병도 아니고 경관님을 그렇게 오래도록 고생시킬 수는 없다.
‘다음에, 낮에 방문할 수 있을 때 다시 와야 할까?’
“어쩔 수 없네요…….”
“레이커스 님의 이름을 빌린다면 좀 순서를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배려는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주목을 사서 싫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지금껏 딱히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이상할 정도로 주목을 사고 있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다들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나 싶어 귀를 쫑긋 세우자, 내 앞뒤로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작은 수군거림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저분이 리어먼드가의 새 가정교사야?”
“그렇다니까? 그렇게 버릇없는 애들을 한 방에 휘어잡았다나?”
“그뿐이야? 레이커스 님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지 뭐야. 오늘 아침에 두 분이 다정하게 상점가에 계신 모습도 봤는걸?”
“말도 안 돼. 모두에게 친절한 레이커스 님이지만, 막상 아주 친밀한 분은 없다고 하던데?”
“맞아. 마음을 잘 주지 않으신다고 하던걸? 그간 공주님이 얼마나 구애하셨는데 안 넘어가신 것만 봐도 알지.”
“아휴, 그럼 연인이라는 건 헛소문인가? 아무튼 좋겠다. 한 달이 뭐야, 일주일을 못 버티고 다들 그만두고 잘렸던 자린데 어떻게 꿰찬 거람.”
정치인도 연예인도 없는 세상이니 귀족들의 삶이 가십거리가 되는 것이야 어쩌면 당연하지만, 레이커스와 내가 연인이라는 풀 뜯어먹는 소문이 자꾸만 나도는 건 영 반갑지 않은 일이다.
“다음에 다시 오죠.”
“……모처럼 왔는데, 알겠습니다.”
아만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다시 마차 쪽으로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몇 발짝 옮기던 나는 다리 입구 근처에 놓인 커다란 천사상 앞에서 문득 눈에 익은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순백의 옷을 입은, 조금 지친 얼굴의 신관이었다.
키도 작고 머리카락도 눈썹도 희어서 얼핏 보아서는 마치 할아버지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작 20대 후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앳된 얼굴이다.
“……앨라이 쿠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신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내가 기억에 없는지 곤란하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자매님께서 저를 어떻게…….”
난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다시 살폈다.
내가 아는 앨라이 쿠스는 가장 어린 나이에 대신관이 되는 이였다.
‘그렇게 밤낮없이 파크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플레이 중인 내 눈앞에서 범인에게 습격까지 당했었지.’
그런데 지금 차림은 근처에 돌아다니고 있는 평신도보다는 정갈하지만 게임 중반부부터 보았던 화려한 금장의 대신관 복장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새하얀 옷과 모자를 보니, 아직은 그가 대신관이 되지 않은 시기인 것 같았다.
앨라이 쿠스가 대신관이 되기 전의 모습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하긴, 게임 초반부는 레이커스 저택에서 세이브하면 되니까…… 굳이 신전에 와 볼 일이 없었지.’
신전에서 주관하는 정화 이벤트나 저장 이벤트마다 그를 만났는데, 앨라이는 파크 전체에 드리운 이 어두운 분위기를 그나마 완화해 주는 몇 안 되는 빛과 같은 존재였다.
‘역시 세이브 포인트 근처에 있는 NPC는 빛과 소금 같은 존재라니까.’
그가, 내가 이 신전을 찾은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앨라이에게 할 수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려다가, 흘끗 내 옆에 선 경관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레이커스가 붙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저…… 경관님.”
“네?”
“마차에 먼저 가시겠어요? 이 신관님께 기도를 잠깐 드리고 가고 싶어서요.”
아만타 경관의 목적이 날 감시하는 거라면 좀 더 뻗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경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발을 떼었다.
‘역시 의도를 잘 모르겠다니까.’
나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앨라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강둑에 듬성듬성 놓인 커다란 돌을 가리켰다.
“……자매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저는…… 저한테 기도하셔도 소용이 없으실 거예요. 전…… 무능하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다른 신관님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기죽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그를 보니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빛과 소금인데, 누가 앨라이를 이렇게 기죽여 놨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오늘만 해도, 축성 의식을 치르는데 술잔을 떨어트리질 않나…… 경전을 완전히 까먹어 버려서 한 줄도 제대로 읊지 못하질 않나…… 이렇게 멍청하고 재능이 없는데 신전에 언제까지 몸담아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언제나 차분하고 담담한 얼굴로 축복의 말을 전해 주기만 했던 앨라이에게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완전히 풀이 죽어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까지 이렇게 털어놓을 정도라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네? 하지만 자매님께선 저를 잘…….”
“앨라이 님.”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지요? 전 일개 신관에 불과한데.”
“전 앨라이 님을 아주 오래 지켜봤어요.”
‘게임 속에서.’
내 말에서 진심이 묻어나긴 했는지, 앨라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앨라이 님께선 완전히 착각하고 계세요. 사람들은 모두 앨라이 님의 진심 어린 마음과 사람을 위하는 태도에 위로받고 있어요. 그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거랍니다.”
“……제 신도님이셨나요?”
“그럼요.”
앨라이가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렸다. 새하얀 눈썹이 구부려지는 모습이 재밌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앨라이 님께서 인도해 주신 신도가 한둘도 아니고, 어떻게 다 기억하겠어요. 그러니 그런 말씀은 마시고 하시던 대로 정진하셔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어 주세요.”
나는 흘끗 마차 쪽을 바라보았다.
왜 아직도 오지 않는지 궁금한 눈치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아만타 경관의 모습이 보였다.
난 길게 끌지 않고 본론부터 얼른 말했다.
“앨라이 님께선 곧 대신관이 되실 거예요.”
앨라이가 당황해서는 나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지금의 대신관님께서도 물론 좋은 분이신 건 알아요. 하지만 갑자기 병증이 악화되셔서…… 아무튼, 앨라이 님께서 지목을 받게 되실 거예요.”
“……신도님! 저를 위로해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건 너무 정도가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 이건 곧 일어날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저를 다시 찾아주세요. 제가 꼭 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으니까요.”
앨라이의 혼란스러운 하늘빛 눈동자가 나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나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뒤로 미뤘다.
그가 나를 믿어 주지 않으면, 내가 그에게 부탁할 일들도 물어볼 일들도 경고할 일들도…… 모두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가 나를 위해 해 줄 일이 아주 많았다.
미래를 위해 이렇게 씨앗을 뿌려 둘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당신은.”
“리어먼드가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는 아르비체 그린이라고 해요. 리어먼드가로 연락을 주시면 될 거예요.”
“……대체.”
저 멀리서, 경관이 날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앨라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끝이군.
나는 이야기를 황급히 마무리 짓곤 마차를 향해 얼른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그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그 행운이 제대로 된 결실을 보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린가에서 나온 뒤부터는 순조로웠다.
레이커스가 곁에 없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원하는 곳에서 아이템을 줍거나 소문을 조사해 볼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나는 뿌듯하게 아이템 창을 조회했다.
[돋보기
: 눈으로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보여 줍니다.]
[사슴벌레, 모르포나비
: 아이들에게 선물하면 호감도가 오르는 이벤트 아이템]
[여름 들꽃(34)
: 10개를 모으면 들꽃 목걸이를 만들 수 있음]
[폴라로이드 사진기(필름 10매)
[비늘
: ??]
스토리 전개에 꼭 필요한 아이템 중에는 그때그때 수집해 둬야 하고, 시기가 지나면 모을 수 없는 시즌 아이템이 있다.
그것들을 미리 잘 모아 둔 것 같아서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