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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33화 (33/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3화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어딜 가려고?”

“처음부터 여기에는 제 방을 둘러보러 온 거예요.”

막 응접실을 나오는 순간, 나는 뒤늦게 내가 아르비체 그린의 방이 어딘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제 와서 방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엄청 어색하겠지?’

다시 응접실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발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탕탕.

현관문 손잡이를 두드리는 묵직한 쇳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시종이 커다란 문을 밀어 열자, 모자를 벗어 손에 든 경관 한 명이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경관은 앳되지만 다부진 인상의 여자였다.

“어머, 경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중앙경시청 소속 아만타라고 합니다. 레이커스 님께서 아르비체 님을 저택으로 모셔 가라 하셔서요.”

뒤따라 나온 고모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르비체가 뭐 그리 대단한 인사라고 오가는 길을 경관님께 폐를 끼친단 말이에요?”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말이 좋아 모시는 거지, 실은 감시다.

하지만 막상 모셔 가니 뭐니 하는 말을 들으니까, 주목받지 않고 조용히 지내려고 했던 애초의 목표는 물 건너갔다는 체감이 든다.

“그러게요. 제가 좀 폐를 끼치고 있죠.”

내 말에 아만타 경관이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레이커스 님께서 경시청에 신경 써 주시는 게 얼만데요. 레이커스 님의 연인분이라면 저희가 업어서 모셔도 모자라죠.”

고모, 로스 그린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급히 양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내밀고 흔들었다. 절대 저 경관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지만 로스 그린은 내 손짓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붉으락푸르락,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나를 쏘아보았다.

“세상에. 그 소문이 진짜였단 말이냐?”

“아니에요. 아닙니다.”

“……하. 나는 헛소문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도대체.”

트리버 경감, 정말 얼마나 수다쟁이인 거야?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수다만 떠니까 이 게임의 진엔딩 보기가 그렇게 어렵잖아!’

“헛소문이 맞아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오늘도 함께 시내에 나왔다가 혼자 다른 데로 가야 한다고 갔는걸요.”

로스 그린은 내가 담담하게 부인해도 조금도 내 말을 믿어 주질 않았다.

오히려 내 말에 더 깜짝 놀란 눈치였다.

“다 큰 남녀가 이런 주말에 시내에 같이 나온단 말이야? 레이커스 님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가정교사랑 둘이서 외출을 한단 말이야?”

“……그냥 황성 연회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사러 나왔을 뿐이에요. 레이커스 님은 그냥 동행해 주셨을 뿐이고요.”

“……황성 연회?”

로스 그린은 내 변명을 듣고선 이제 아예 뒷골을 부여잡았다.

그러곤 뭐가 그렇게 안타까운지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때리더니 제 앞에 놓인 다 식지도 않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직 뜨거우실 텐데.”

“어디서 그렇게 아는 체를 하는 법만 배워서! ……황성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니. 하, 거기다 레이커스 님과도 그렇게 친밀해지다니…….”

왕성 연회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고모라는 작자가 저렇게까지 부러워서 못 견뎌 하는 것을 보면.

로스는 거실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흘끗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라, 그 자리에 마노가 갔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어여쁜 인형처럼 아주 완벽하게 꾸며진 차림새를 하고 얌전히 앉아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초상화의 주인이 로스의 딸인 모양이었다.

난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이제 와서 아쉬우세요? 제가 가서 적응 못하고 쫓겨나든 말든 그냥 입을 줄이려고 보내 버린 거면서.”

로스 그린은 당황해하는 대신 뻔뻔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널 걱정해서 보낸 거잖니.”

“퍽이나 그러셨겠네요.”

“넌 무슨 애가 그렇게 성정이 비뚤어져서…… 어휴, 그래, 그렇게 날 비꼬아야 속이 시원하다면 그렇게 하렴.”

“그게 아니라…….”

“그러면? 레이커스 님에게 우리 아들의 일자리를 부탁해 볼 수 없단 것도 거짓말이었겠구나. 아니, 레이커스 님은 저렇게 말라빠진 애가 뭐 그리 좋아서…… 하.”

‘……아니라니까? 듣고 있어요?’

“그리고 왕성 연회라니. 거긴 우리 자작가가 이 꼴이 되기 전에도 발도 들여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그건 공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기가 막히는구나. 왕성 연회에 갈 때 동행을 한 명 데려갈 수 있니? 마노랑 같이 가면 되겠다, 그렇지?”

나는 질투로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고모님.”

“응?”

“이제 저는 이 집으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필요한 게 있어서 가지러 온 거고요. 저희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을 다 가로채신 건 알지만 달라곤 하지 않을게요. 그냥 그렇게 인연을 정리했으면 해요.”

“……뭐?”

난 단단히 화가 나다 못해 기가 막혀 하는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고 몸을 돌렸다.

왜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녀와의 인연을 정리하는 건데, 왜 이렇게까지 속이 저리고 개운한 건지…….

그리고 아주 오래 묵혀 온 숙제를 어렵사리 해결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는지…….

‘이 감정은, 이 몸이…… 아르비체 그린이 기억하고 있는 감정인 걸까?’

나는 괜스레 빨리 뛰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시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방은 아직 그대로야?”

방 위치를 몰라 은근히 떠본 건데, 다행히도 시종은 당황한 얼굴로 내 말을 받았다.

“어머, 그러고 보니 거기 짐이 많아서 놀라실 텐데……. 제가 먼저 가서 좀 정리할게요. 천천히 오세요.”

“아냐, 뭘 그래.”

“어휴, 그래도요.”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아르비체가 쓰던 작은 방은, 지금은 창고가 되어 있었다.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나는 방에는 쓰지 않는 목제 가구들이 얼기설기 기대어 처박혀 있었다.

나는 그 가구들을 비집고 들어가 안쪽에 놓여 있는 작은 책상 하나와 아주 작은 서랍장 하나, 책장 하나를 차례로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벽에 붙어 있는 그 가구들은 아르비체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 있는 물건은 별것 없었다.

고작해야 일기장 하나와 동화나 소설책으로 보이는 책 몇 권, 앨범 한 권에 낡은 옷가지와 낡은 구두가 몇 켤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리어먼드가의 방에 있는 짐이 워낙 적어서 여기에 많은 짐이 남아 있으리라 짐작했는데, 원래 가진 짐이 아주 조촐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해 볼 수는 없어, 옷가지를 뺀 물건들을 모조리 가방에 밀어 넣고 1층으로 내려왔다.

경관님은 내 손에서 얼른 짐을 받아 들어 주었다.

“어머, 감사해요. 든 물건도 별로 없어서 제가 들어도 괜찮은데.”

“무슨 말씀입니까? 레이커스 님의 연…….”

“……연인 아니라니까요. 정말로요.”

내가 정색하고 손을 젓자, 경관이 알겠다는 듯 윙크를 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모르는 것으로 해 두겠습니다.”

‘아무래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쓰게 웃었다.

오해를 산다고 한들 다른 남자에게 잘 보일 일도 없고…… 레이커스가 다른 여자와 잘 지내게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실 상관은 없다.

다만 살인마의 연인으로 소문이 나기 싫은 것뿐이지.

“……그러세요.”

내가 한숨처럼 대답하자 경관은 얼른 앞장서서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난 마차를 타려다 문득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손톱을 딱딱 깨물고 있는 로스 그린은 아직도 못내 분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고모가 저럴 정도로 정말 이상하긴 하지. 내가 쓰러진 뒤에 레이커스가 갑자기 날 감시하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뭐 때문일까? 경관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친데.’

물론 신변을 보호해 준다는 이유이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내가 또 쓰러질까 봐 경관까지 붙이는 건 아닐 것 아냐?’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에 곧장 들른 곳은 신전이었다.

신전은 게임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른 장소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안내 없이도 마차에서 내리자 아주 익숙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일반 마차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신전으로 향하는 강을 건너는 유일한 길인 다리의 초입까지다.

나는 신전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돌다리의 초입에 서서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잠깐 넋을 놓았다.

그곳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인파가 신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 위까지 아주 긴 줄을 서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에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이게 뭐죠?”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경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작은 파크에 살인 사건이 몇 건이나 연달아 생기고 있는 데다가, 실종 사건까지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직 범인도 잡히지 않고…… 시민들이 불안해할 만도 하죠.”

‘……이 많은 사람이 다 불안해서 신전에 온 거구나.’

어쩐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도시 전체에 사람이 적다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다들 신전에 모여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는 것도 없는데, 그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모인 거잖아.

‘공포게임 속 사람들이라고 해서, 공포에 둔한 것도 아니고 죽음에 의연한 것도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모든 것이 한결 더 무겁게 다가왔다.

또 한 번, 계속해서 잊으려 노력한 스산한 공포가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생각하지 말자.’

목이 빳빳하게 굳고, 숨이 가빠지려는 것을 이겨 내려 눈을 꾹 눌러 감은 순간이었다.

쿠아아악-!

절대 인간의 성대로 낼 수 없을 것 같은 기괴한 비명 같은 것이 저 위쪽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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