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2화
레이커스는 전혀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내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니, 제가 경관을 한 명 보내드리겠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실 거죠?”
‘경관을 왜 보내 줘……?’
마치 그가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게, 진짜 내 호위라도 하려고 그랬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우습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파크의 경찰들과 레이커스가 얼마나 친한지는 뻔하잖아. 내 감시를 맡기려는 게 틀림없어.’
내가 어디 가서 레이커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할 심산이겠지.
‘그렇게까지 날 의심하는 것 같지 않다가도, 이럴 때면 목덜미가 간질간질해진단 말이야.’
모처럼의 자유가 좀 줄어드는 게 아쉽긴 하지만,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우선 그린가에 잠깐 들를 생각이에요.”
그린가를 방문하는 이유는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캐릭터를 범인이 지목한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캐서 헌트를 비롯한 다른 캐릭터들도…….
최종장 직전까지도 게임 속에서 습격당하는 캐릭터 간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들 귀족이라는 점 이외에는 성별도 나이도 달라, 어떤 공통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희생자 물망에 올라 있다가 잠깐 빠져 있는 거니까.
혹시 그린가에 가 보면 어떤 기준으로 아르비체 그린이 범인에게 지목당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레이커스는 탐탁잖은 눈치였지만 나를 말리진 않았다.
“그간 샤인과 루나를 돌보느라 본가를 오래 떠나 계시긴 했죠. 다녀오십시오. 그러면 거기로 경관을 보내겠습니다.”
“네. 전 알아서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셔요.”
“알겠습니다.”
레이커스는 어딘가 안심이 안 된다는 얼굴로 나를 한 번 더 바라보았지만, 정말로 급한 볼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른 마차를 잡아타고 왔던 길을 지나 사라졌다.
경관을 보내 주는 것도 조금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지만……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지.
쐐애애액-.
문득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어딘가에서 거대한 크리쳐가 울부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제법 세게 부는 바람은 건물 사이를 스치며 기묘한 소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그런 소리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오싹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걸음을 재촉해 얼른 마차에 올랐다.
그린가는 파크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 변두리에 있는 만큼, 주변은 꽤 슬럼화되어 있었다.
그래도 널려 있는 빨래나 밖에 내놓은 화초같이 사람이 사는 흔적들을 보고 있자니, 오싹한 느낌에 움츠러들어 있던 몸이 조금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얼마죠?”
“아, 부티크에서 미리 돈을 지급하셨습니다.”
‘고객 대접 하나는 확실하게 하네. 하긴, 그만큼 큰돈을 쓰긴 했지.’
레이커스가 그 가게에서 펑펑 써 댄 돈이 얼마였는지 대충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려다가, 0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 생각을 멈추었다.
괜히 신세 진 느낌이 드는 것도 싫고, 고마워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그 대신 눈앞에 선 그린가 저택을 관찰했다.
주위의 살풍경한 분위기에 맞게 꽤 낡은 녹색 지붕의 저택에는 담장을 따라 넝쿨이 무성히 자라 있었다.
레이커스의 으리으리한 고저택에 비하면 정말 아기 장난감 같은 저택이었다.
정원이라고 할 만한 부지도 거의 없었고, 건물 규모도 작았다. 게다가 그마저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지, 빗물받이에 나뭇잎이 가득 쌓여 있는 데다 깨진 창문도 몇 개 보였다.
나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굵직한 쇠 손잡이를 쥐고 문을 몇 번 두드렸다.
똑똑.
끼익.
내 키의 두 배가 조금 안 되는 높다란 문이 열리면서, 시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처음에는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더니, 이내 시종의 눈이 커졌다.
“……어머, 세상에. 이게 누구세요. 아르비체 아가씨?”
“그간 잘 지냈어?”
난 깜짝 놀라는 시종에게 뻔뻔스레 알은체했다.
“그럼요! 아가씨께선 괜찮으셨어요? 아니, 괜찮으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요……. 아가씨께서 워낙 내성적이라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아냐. 괜찮았어. 잘 지냈어.”
“……정말요? 처음 보는 사람하곤 말도 못 섞으시면서…… 처음 가셨을 땐 아가씨가 하녀들에게 도도하게 군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나서 얼마나 속이 상했는데요?”
사용인들 사이의 소문은 정말 빠르게 도는 모양이지.
난 어깨를 으쓱하곤 손을 저었다.
“괜찮았어. 아이들도 워낙 예쁘고. 그리고 거기 리어먼드가분들도 다 잘해 주시는걸?”
시종이 내 외투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다 말고 눈을 깜박거렸다.
“……어딘가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당당해지신 것 같고.”
“그래?”
“아가씨도 소심하시지만, 리어먼드가의 텃세도 워낙 말이 많으니까요. 절대 적응하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희에게도 항상 가기 싫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적응하시다니…….”
시종은 눈물까지 글썽거려 댔다.
‘아르비체 그린’을 걱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니까,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따뜻해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마움을 담아 시종을 꼭 껴안아 주었다.
시종은 그런 날 보고 또 한 번 많이 변했다고 중얼거리며 사람을 불러 내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넣었다. 그리고 나를 1층의 응접실로 데려갔다.
따뜻하고 향긋한 홍차를 한 입 마시기가 무섭게 쿵쿵거리는 급한 발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녹색의 머리카락을 턱 길이에 맞게 짧게 자른 여인은 날카롭게 생긴 얼굴에 퀭한 눈, 척 보기에도 탐욕이 어지간해 보이는 신경질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아르비체의 고모인가?’
고모라고 해도 연녹색의 머리카락만 빼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나는 보고만 있어도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나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어서 오거라, 알비. 그간 얼굴이 많이 폈구나. 호호, 앉으렴.”
가까이 다가가자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그 짧은 사이에 그녀가 두르고 있는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가 꽤 고가품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순금을 두르고 다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쪽이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걸친 옷 하나만은 보란 듯이 꽤 허름했다. 드레스 자락 끝이 너덜너덜했고, 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차가 날라져 왔고, 공작가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꽤 형편없는 과자들이 함께 내어져 왔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내게 어필이라도 해 보려는 모양이었지만, 저런 꼴을 하고서…….
내가 차를 한 잔 홀짝이기가 무섭게, 고모는 내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알아는 봤니?”
“네?”
“우리 아들 말이야, 둘째 아들. 괜찮은 일자리가 있다면 주선해 달라고 공작님께 말씀드려 봤느냔 말이야.”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지만 강요나 다름없는 말투.
그러고 보면 뭉쳐 둔 편지에서 그런 내용을 봤던 듯도 하다.
난 탐탁지 않아서 입술을 비뚜름하게 구겼다.
‘소개장을 맡겨 놨나…….’
아르비체가 공작가에서 일을 하는 것도 그녀가 군입을 줄이려고 보내 버린 걸로 알고 있었다.
아르비체가 이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가정교사 노릇을 할 만큼 숫기가 있는 편이 아니라는 것도 저 고모에겐 큰 관심사가 아니었을 거다.
사실 공작저의 가정교사 자리는 시시때때로 사람을 자르기로 유명한 혹독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아르비체를 내보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이제 와서 잘 정착하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비벼 보려는 거고.
우습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공작님께서 바쁘셔서, 그런 건 물어보지 못했네요.”
고모의 얼굴이 불만스레 변했다.
“아니, 하지만…… 그 가정교사 자리에 얼마나 붙어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니니? 있을 때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고 나와야지. 그게 현명한 거라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거라. 누굴 위해서?
난 비웃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이용할 수 있는 걸 다 이용하는 게 현명한 거다…… 그래서 제 부모님 유산도 가로채셨나요?”
내 담담한 말에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창백한 시선이 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네까짓 것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느냐는 듯.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
난 순간 울컥해서 굳이 관심도 없던 유산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두 달도 안 되어 나왔는걸요. 먹여 주고 재워 주셨다고 해도, 보호자 명목으로 대리 수령하신 유산보다는 훨씬 적은 금액일걸요.”
그녀가 새된 소리로 나를 탓했다.
“아르비체! 네가 이렇게 돈밖에 모르는 아이였니?”
“그럼요, 고모님.”
게임 속의 아르비체가 이런 고모에게마저 반항하지 못하고 굽히고 살았던 이유가 뭘까.
파들파들 떨며 하얗게 질리는 고모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의문을 떠올리다가 문득, 나도 그렇게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남의 일이니까 쉬워 보이는 거다.
남의 일이니까…….
사람은 생각보다 저를 깎아내리는 사람 곁에 있으면 점점 더 사리 분별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나도, 그랬다.
어느 순간에 우울증과 함께 찾아온 병 때문에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었고, 더 이상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게 되었던 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깎아내리는 것을 내버려 두고 살았었다.
힘들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답답해서 매일매일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어디든 좋으니, 도피할 곳이 있기만 하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그곳이 내겐 게임이었다.
“……윽.”
뭔가가 기억나려는 순간, 갑작스레 또 두통이 머리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