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1화
가격에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다 나올 것 같았다.
“다른 곳도 둘러볼까요?”
내가 놀람을 숨긴 채 애써 웃으며 말하자, 레이커스가 내 눈을 흘끗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응수했다.
“이 부티크의 옷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전담 디자이너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데 실력이 괜찮습니다. 좀 더 둘러보시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
그는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한 벌 정도는 제가 사 드리지요. 이번 궁정 연회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려고 계획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비꼬는 건지 뭔지.’
내 짧은 한마디로 내 가벼운 주머니 사정과 곤란해하는 눈치까지 대번에 알아들은 듯한 그 앞에서 괜히 허세를 부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레이커스가 사 주는 옷을 입는 것도 찝찝하단 말이지.’
우리 어머니는 항상 남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내 주머니로 가져오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은 가치 있는 일에만 돈을 지급한다는 뜻이다.
내가 레이커스에게 도대체 무슨 효용이 있길래 이렇게 척 봐도 값진 옷을 기꺼이 사다 안긴단 말인가?
내 돈으로는 여기에 있는 것 중 가장 싼 드레스도 살 수 없다.
‘역시 나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그의 신세를 지는 것은 싫으니까.’
망설이다 뒤돌아서는데, 레이커스가 내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속삭였다.
“모처럼 공주님께서 초대해 주신 건데, 그럴듯한 차림으로 참석하는 것도 예의 중 하나입니다. 그냥 받으세요. 일을 잘해 주셔서 보너스를 드리는 거로 하죠.”
‘……본봉보다 몇 배나 비싼 보너스가 될 텐데.’
그래도 예의라는 말에 마냥 사양할 수도 없어서 잠깐 고민하는 찰나, 내 앞에 있는 보라색 오프숄더 드레스 옆에 반짝이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드레스
매력+30
궁정, 다과회에서 호감도 이벤트 발생 확률 UP]
난 턱 끝까지 올라왔던 겸양의 말을 얼른 삼켰다.
이상할 정도로 몰입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여긴 게임 안이다.
옷을 잘 갖춰 입는 건 미적인 이유도 있지만 기능의 문제도 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장소나 이벤트에 따라 적절한 옷을 갖춰 입으면 호감도를 쉽게 올릴 수 있는 기능도 분명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옷마다 매력 수치가 각기 다르게 붙어 있었다.
‘……근소한 확률 차이라서 플레이하면서는 굳이 사 본 적이 없지만.’
하지만 지금은 내 목숨이 달려 있다.
아주 사소한 확률 차이가 어떤 결과를 만들지 모른다.
나는 다른 드레스들도 한 번씩 둘러보았다. 드레스마다 각기 다른 문구가 붙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매력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가격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쇼윈도에 가까이 있는 드레스일수록 가격이 높았다.
난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사야 해! 좋은 장비를 갖추는 것은 플레이어로서 당연한 욕심이잖아.’
“……저, 선물이 아니라 잠깐 가불해 주시면 제가 천천히 갚을게요.”
내가 우물쭈물 중얼거리자, 레이커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정 불편하시면 그러셔도 상관없지만, 저한텐 어차피 푼돈입니다.”
“……하지만.”
그는 재밌다는 듯 내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말했다.
“조건 없이 사 드리는 게 불편하시면, 다음에 제가 묻는 단 하나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는 걸 조건으로 하죠.”
……질문이라.
이상할 정도로 그는 내게 궁금한 게 많단 말이야.
나는 별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다. 뭘 물어보든 상관없겠지.
레이커스는 입술을 당겨 조용히 웃었다.
“옷을 사 주기도 까다롭군요.”
그는 부티크 직원을 불러 말했다.
“여기 이 레이디에게 어울릴 옷을 준비해 주게.”
나는 그도 한 벌 맞추러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레이커스는 정말로 그냥 나를 졸졸 따라왔을 뿐인 모양이었다.
나는 직원이 내 몸 치수를 재는 사이에 가게 안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힐끗힐끗 둘러보았다.
처음에 디자인만 보고 고를 때에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던 옷들이 이제 달리 보였다.
‘매력 수치, 그리고 이벤트 발생 확률을 올려 주는 정도를 잘 비교해 보면…….’
한참을 둘러보던 나는 직원이 내게 어울릴 만한 옷을 이것저것 권해 주는 것을 뒤로한 채 벽에 높이 걸린 드레스 앞에서 멈춰 섰다.
[순백의 드레스
매력+40
궁정, 다과회, 살롱에서 호감도 이벤트 발생 확률 UP]
가격표에는 4500G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붙어 있었다. 틀림없이 여기 있는 옷 중 가장 비쌀 거다.
‘어쩔 수 없잖아. 당연히 가격은 성능에 비례하는 거니까.’
풍성한 치마가 경쾌해 보이는 흰 드레스였다.
새하얀 드레스인데도 발랄한 느낌이 살도록 허리부터 얇은 샤스커트 스타일로 만들어져서 웨딩드레스처럼 보이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르비체 그린의 옷장에 있는 온갖 정숙한 드레스와 대비되는 귀여운 스타일인 점도 좋았고.
하지만 역시……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은 성능이지.
“……여기, 이 옷으로 할게요.”
점원이 눈을 빛내며 얼른 달려와 쇼윈도에서 드레스를 꺼냈다. 그러곤 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다 세워 두곤 드레스를 내 앞에 대보았다.
“어머, 안목이 대단히 좋으세요. 여기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고급 드레스랍니다. 물론 가격만큼 퀄리티 좋은 원단을 사용했고, 장인의 자수가 들어가 있으니 돈값은 톡톡히 하지요.”
“풉.”
문득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레이커스를 흘겨보자, 그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서는 날 돌아보았다.
“왜 웃어요? 안 어울리나요?”
“그렇게 사양하시더니, 어떻게 용케도 제일 비싼 옷을 찾으셨다 싶어서요.”
그 말을 들으니 좀 머쓱하긴 했다.
‘가격이 아니라 성능을 보고 고른 건데. 물론 성능과 가격은 비례하지만.’
게다가 이 옷은 내게 썩 잘 어울렸다.
점원의 말이 그냥 영업 멘트만은 아니었던지, 항상 칙칙하고 어두운 색의 옷만 입다가 새하얀 옷을 대고 있자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얼굴도 환해 보였고, 피부도 밝아 보였다.
잠자코 거울을 관찰하는 날 보고 점원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 잘 어울리죠? 에메랄드빛 머리와 옷 색이 딱이에요. 여기에 매치할 구두와 보석도 함께 보시겠어요?”
직원은 자연스레 과소비를 조장했고, 레이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내 월급의 다섯 배 되는 금액의 목걸이와 네 배 되는 금액의 귀걸이를 턱턱 골랐다.
“아뇨,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음? 다른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직접 고르시죠.”
하지만 사양하려고 가까이 다가간 내 눈에, 그 아이템들에 적혀 있는 성능 수치가 또 보이고야 말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점원뿐만 아니라 가게 사장님을 포함해서 총 다섯 명의 직원이 우리를 향해 정수리가 보이도록 허리 굽혀 배웅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큰 지출이긴 했다.
‘……도대체 뭘 물어보려고 이렇게까지 턱턱 사 주는 거야?’
도무지 짐작되질 않는다.
나는 고개를 털어 냈다.
‘그래, 레이커스도 평생을 감옥에서 썩는 엔딩을 맞게 된다면 제가 가진 돈을 딱히 쓸 곳도 없을 테니까.’
내가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고맙다고 생각할 일도 아니야. 됐어. 그만 생각하자.’
부담스러운 인사를 뒤로하고 가게를 나오자, 레이커스는 마차에 타지 않고 한참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뭐라도 있나?’
고개를 들어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여느 때처럼 어두침침한 먹구름과 하늘 높이 솟은 신전의 첨탑, 그리고 몇 개의 굴뚝밖에는 없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워낙 하늘이 어두워서, 하늘과 건물의 경계 사이에 아주 큰 그림자가 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긴 했다.
잘못 보면, 아주 거대한 괴물이라도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보는 건지 물어보려던 질문이 혀끝에 걸렸다.
가장 고운 대리석으로 장인이 오랜 시간 정성 들여 깎아 만든 듯한 얼굴이긴 하다는 생각에, 난 나도 모르게 잠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저런 눈이 있을까.’
정면에서 보는 그의 얼굴과 눈동자도 아름다웠지만, 옆에서 보니까 마치 유리구슬을 박아 넣은 것처럼 보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금색의 둥근 테는, 태양에 있는 불의 고리처럼 반짝반짝했다. 그것을 계속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
깜박.
레이커스의 눈꺼풀이 자연스레 깜박거리는 순간,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어쩜 이렇게 한심할까, 나는.
그리고 저 외모는 왜 저렇게까지 잘난 걸까.
나를 꾸짖으며 내 볼을 꽉 잡아당기는데, 레이커스의 시선이 어느새 내게 닿아 있었다.
그는 재밌고 아주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보는 듯 두 눈을 반짝거렸다.
“……뭘 그렇게 봐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지워지질 않는데.
그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려서 그렇지 않아도 잘난 그 외모를 배는 더 잘나 보이게 만들더니,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잠깐, 볼일이 생겼습니다.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요?”
“죄송합니다. 모처럼 함께 나왔는데.”
‘죄송하다고? 아니야, 정말 좋지. 난 정말 좋은데?’
너무 헤벌쭉 웃으며 반색을 하면 그가 삐질까 봐 입꼬리에 힘을 주어 끌어내리려 애를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혼자 다니지 마시고요. 집으로 바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만…….”
“괜찮아요.”
마치 어린아이 보호자라도 된 양 걱정하는 걸 들으니 기가 찬다.
‘레이커스 없이 혼자 다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내가 왜 집에 가겠어?’
나는 갑자기 들떠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온 김에 아르비체 그린이 살던 집을 가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경시청에 불이 난 원인에 대해서도 탐문수사 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신전에 들러 세이브 시스템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