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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30화 (3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0화

하지만 침착하기 짝이 없는 그의 옆얼굴만으로는 어떤 감정을 읽어 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저 그는 이 소란스러운 광경이 아주 뜻밖이라는 듯 긴 속눈썹을 두어 번 우아하게 팔랑이더니 곤란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여긴.”

나는 능청스레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방긋 웃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어머, 저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데요?”

레이커스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파에 끼어들었다.

레이커스도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돌아갈 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뒤로 똑 부러지는 그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가까이에서 보자, 현장은 참혹했다.

도대체 누구의 머리카락일지도 알 수 없을 수없이 많은 머리카락이 한데 엉켜져 강둑 아래 뒹굴고 있었고, 무슨 의식이라도 행한 것인지 촛농이 다 타들어 간 초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그 바로 옆의 벽에는 커다란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우리.

죽음을 바라는 자, 눈을 떠라.

죽음을 피하려 하는 자, 눈을 감아라.

죽음은 죽음을 낳을지니.]

플레이어로서 이곳에 왔을 때는, 그냥 상투적인 문구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걸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을 모두가 웅성거리며 보고 있었다.

‘저게 다 뭐래?’

‘어휴, 모르겠어. 끔찍해 죽겠어.’

‘요즘 왜 이렇게 뒤숭숭한지 모르겠어.’

‘글쎄, 실종자들과 관련됐다는데?’

‘실종자?’

‘어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구만? 요즘 여기저기서 사람이 없어진다니까?’

‘살인 사건만 해도 밤에 잠을 못 자겠는데, 실종 사건까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일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한숨 섞인 낮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일부러 이런 곳마다 찾아다니는 겁니까……?”

내 옆으로 와서 선 레이커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천연덕스레 말했다.

“……어머,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것보다 저것 좀 보세요. 저 머리카락들…… 실종자들의 것일까요?”

“……저야 모릅니다만, 글쎄요.”

“경감님도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정말이지.”

“이렇게 돌아다녀 봤자…… 그렇지 않아도 그린 양은 주목을 사고 있는 존재인데 괜히 이목만 더 끕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레이커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주목? 이목을 끈다고? 누구로부터?’

누군가 여기서 주목을 산다면 내가 아니라 그일 것이다.

‘일단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도 그랬고, 정말 길 가다가 살인마인 걸 모르고 마주친다면 후광이 보인다고 생각했을 법한 그런 외모잖아. 게다가 누구 못지않을 정도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람이기도 하고.’

역시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삼삼오오 모여 있던 군중들이 슬슬 레이커스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오오, 공작님이시다.”

“어머, 이렇게 가까이에서 뵐 수 있다니, 오늘은 수지맞았네!”

“레이커스 공작님! 부디 범인을 빨리 잡아 주세요!”

“그래, 말 잘했다! 대대로 리어먼드가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잖아. 이 일을 해결해 주실 분은 공작님밖에 없어.”

“봤어, 봤어?”

“눈이 너무 부셔서 못 봤어. 하…… 어쩜 저렇게 수려하실까?”

뭇 여인들의 눈에 서려 있던 공포심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동경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여인들이 레이커스에게 다가와 격려와 인사로 치장한 사심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감탄과 안타깝다는 듯한 한숨 소리를 들으며 난 쓰게 미소 지었다.

레이커스의 정체를 모르는 여인들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안타까워서.

나는 이렇게 된 거 슬쩍 이 데이트에서 도망쳐서 저 증거 수집의 현장에 가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보다 좀 더 좋은 선택지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여어, 이거 공작님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보고드릴 참이었는데…… 여기 이리 가까이 와 보시겠습니까요?”

모자를 벗어 들고 이쪽을 향해 그렇게 외쳐 준 고마운 사람은 바로, 산타처럼 생긴 트리버 경감이었다.

트리버 경감은 리어먼드가로 직접 찾아와 사건에 대해 보고할 만큼 레이커스와 아주 친하잖아.

‘내가 없는 곳에서 레이커스와 경감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 내가 못 듣잖아. 지금 이야기하면 딱 좋지.’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커스를 돌아봤다.

“어머, 경감님께서 부르시는데…… 얼른 가 봐요.”

레이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속내를 살피듯 나를 바라보았다.입가의 미소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내 입꼬리가 잘게 떨릴 때까지.

“……모처럼 그린 양과 둘이서 나온 외출이니 경감과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죠.”

뻔뻔하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자자, 얼른 가요. 저렇게 기다리시는걸요.”

“……그린 양,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러죠. 대신 짧게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갑시다. 이런 악취가 풍기는 곳에 오래 있는 취미는 없어서.”

그가 냉큼 내 제안을 수용해 줬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신이 나서 그와 함께 모나 강의 짧은 다리를 건넌 뒤, 경관들이 진을 치고 있는 강둑 쪽으로 난 경사길을 내려갔다.

곧 정보들을 얻을 생각에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레이커스가 경사길에서 내가 미끄러지지 않게 허리까지 잡아 가며 부축해 주는 것도 떨치지 않고 내버려 뒀을 정도였다.

레이커스와 내가 경관들의 앞까지 가자, 트리버 경감은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 붉어진 얼굴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휴. 이건 뭐, 갑자기 줄줄이 터지는 사건 때문에 쉬는 날도 따로 없이 아주 죽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오늘은 뭡니까?”

“아직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간 실종자들이 좀 많이 발생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엔 이 머리카락들이 다 그 실종자들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종자들이라.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났습니까?”

“실종자 중에 왕실에서 일한 웨인 이슈라는 시종이 있는데, 아주 독특한 머리카락 색이었거든요. 여기, 발견된 머리카락들의 색이 다 제각각인데, 그중에 웨인 이슈의 머리 색과 일치하는 연한 파란색이 섞여 있습니다.”

“허어. 정말 끔찍한 사건입니다.”

나는 대화를 귀담아들으면서 레이커스의 얼굴을 흘끗흘끗 살폈다.

그는 뭔가 답답해 보이는 얼굴이었을 뿐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연기를 아주 잘하든지…… 아니면 실종 사건과 연쇄살인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건이든지.

‘……집 지하에 가둔 사람도 여기서 데려온 거냐고. 응?’

레이커스의 얼굴에선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아쉽게 시선을 돌리는데, 경감이 작은 소리로 속닥이듯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연쇄살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신문에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부분에서, 같은 특징이 발견되어서 말입니다.”

“특징?”

경감은 그라피티의 끝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그라피티보다는 꽤 작은 손바닥 정도의 크기로 오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아이 낙서처럼 보일 뿐인 오망성이지만 붉디붉은색으로 그려져 물감이 아래로 번진 흔적까지 있으니 꽤 오싹하다.

그러고 보면, 이 게임의 로딩 장면마다 등장했던 아이콘이 오망성이었지.

오망성에 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그쪽을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려는데, 레이커스가 슬쩍 걸음을 옮겨 내 앞을 막아섰다.

“왜 그러세요?”

레이커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내게 다리 위쪽을 가리켰다.

“이렇게 이목이 많은 곳에서 당신과 함께 사건에 대해 논하는 게 좋은 일인지 전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제 슬슬 이야기도 끝났으니 장소를 옮기죠.”

장소를 옮기다니?

‘이런 훌륭한 증거 수집의 현장을 두고?’

플레이어로 내가 여기에 왔을 때는 각 지점마다 돋보기 표시가 다 있어서 눌러 보고 증거를 수집할 여유도 충분히 있었고, 이런 방해자도 없었다.

‘게다가 어딜 가도 주목을 사는 걸 즐기는 주제에, 언제부터 이목을 신경 썼다는 거야?’

기가 막혀 하는 나와는 상관없이 레이커스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경감과 악수까지 나누었다.

“흥미롭군요…… 추가로 더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언제든 리어먼드가에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손이 바쁘실 터인데…… 제가 여러 가지로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말에 경감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아무래도 공작가쯤 되면 지원 규모도 남다르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이렇게 돈을 써서 호인인 척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을 보니까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렇게 돈이면 되는 세상에서 정의가 과연 똑바로 실현될 수 있느냔 말이야.

레이커스는 경감과 인사를 하고선 아쉬움이 가득한 눈을 한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제 괜찮으십니까?”

“……네?”

“멀미, 하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콜록.”

하지만 이젠 그 어설픈 연기가 먹혀들지 않았나 보다. 레이커스는 ‘마차에 가서 좀 더 쉬시죠. 여긴 공기가 탁합니다’라며 나를 이끌었다.

난 사건 현장을 아쉬운 눈으로 돌아봤다.

그래도 오망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면 가장 중요한 정보는 얻은 셈이긴 하다.

난 혹시나 다른 정보를 얻을 순 없을까 싶어 자꾸 현장을 돌아보며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실종 사건 현장을 지나쳐 온 우리는 마차를 타고 부티크가 있는 상점가 골목으로 향했다.

상점가 골목은 그래도 ‘파크’ 전체에 퍼져 있는 죽음과 사건의 진한 냄새에서 조금쯤 격리된 듯한 밝은 분위기가 풍기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 시끌벅적한 공기가 꽤 마음에 들어 기분 좋게 부티크로 들어갔다.

레이커스와 함께 찾은 부티크는 척 보기에도 고가의 물건들만 전시된 곳이었다.

부티크의 입구에 깔린 카펫부터가, 내가 신은 싸구려 구두 같은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긴 분홍색 털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것을 밟고 지나자 구름을 밟는 것 같은 푹신한 느낌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애초에 드레스니 장갑이니 구두니 부채니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금색과 흰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부티크에 걸려 있는 드레스들을 보자 눈이 조금 돌아가긴 했다.

확실히, 그런 로망이 있긴 하지.

굳이 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 유행하는 이유는 현실에서는 볼 수조차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내 캐릭터에게 입힐 수 있기 때문일 거다.

그걸 직접 입어 볼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긴 할 거다.

나는 개중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발레복처럼 생긴 오프숄더 드레스로 슬쩍 다가가 가격표를 바라보았다.

3200G

갑자기 부풀어 오른 솜사탕 같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응, 아니야.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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