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9화
“……아니에요. 괜찮아요.”
습관적으로 대답하고서야 난 그렇게 좋은 핑계를 거절한 나 자신을 원망하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하니까 몸이 안 좋은 게 맞는 것 같아요.”
“네?”
“오, 오늘 숨바꼭질은 여기까지 해요. 콜록, 콜록.”
급조해 낸 내 기침 소리를 들은 그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뒤에 숨은 비밀을 한 번에 꿰뚫어 볼 듯한 아주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난 최대한 저택의 지하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내 표정에서 대체 뭘 읽어 냈는지, 그는 내가 저택 쪽을 신경 쓰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로 자꾸 내 뒤를 바라보았다.
히끅.
히끅.
갑자기 딸꾹질까지 터져 나왔다.
“……푸핫.”
뭔가 나를 추궁할 기세였던 레이커스가 짧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쪽으로 살짝 굽혔던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그린 양은 거짓말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완전히 잘하는데요.”
발끈해서 대답부터 하고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가?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되나?
“……아뇨, 생각해 보니까 거짓말 완전 못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레이커스는 햇살마저 녹일 듯한 맑은 웃음을 피식피식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몸이 안 좋으시다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이 숨바꼭질 이벤트가 결코 여기에서 끝이 난 게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심장이 아직 붙은 채로 숨바꼭질이 멈춘 게 어디야.
잘그럭, 잘그럭.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까 들은 그 소름 끼치는 쇠사슬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것만 같은 환청에 시달렸다.
‘정말로 대체 뭐였을까? ……정말로 실종자일까?’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니까 늦여름의 따뜻한 기온에도 괜히 춥게만 느껴졌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간 나는 괜히 사건 수첩을 펼쳤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읽었던 바와 같이, 실종 사건에 관련한 기사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별 소득 없이 수첩을 덮은 나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거기에 레이커스가 누군가를 가둬 뒀다면, 그리고 그게 실종자라면…… DAY 1 이전부터 계속 납치하고 있었던 거겠지?’
어떻게 이렇게 증거가 즐비한데, 그는 이렇게까지 멀쩡하게 공작으로서 대접받으며 뻔뻔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정말 소름 끼치는 사람이다.
난 침대를 벗어나 책상에 가 앉았다.
그러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실종 사건 현장들을 죄다 써 내려갔다.
실종 사건은 게임의 메인 흐름과는 관계없는 가십처럼만 나왔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을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냥 실종 사건이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가 없게 됐어.’
실종된 사람이 당장 발밑 지하실에 있을지도 모른다니. 너무 끔찍하잖아.
그리고 그 사람들이 레이커스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지.
나는 최대한 기억을 쥐어짜 냈다.
아주 희미한 기억을 더듬고 더듬는 사이에 몇 개의 장소를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시간만 잘 맞춘다면 그곳들에서 어떤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혹은 경찰이 수사하고 있는 장면이라도 목격할 수 있겠지.
메모한 내용을 다시 몇 번이나 읽어 보는 사이에도 쇠사슬 소리가 들리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주의 토요일. 내가 일을 쉬는 날이 돌아왔다.
그날까지 나는 틈틈이 아이들과 놀아 주는 척하며 고저택 내를 둘러보았다.
플레이어로서 내가 갔던 장소 중에는 문이 꼭 잠겨서 들어갈 수 없거나 가 보지 못했던 곳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내 이목을 끈 곳은 지하로 가는 통로인 듯 보이는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나무문이었다. 그 문은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지나가는 척하며 나무문 옆에 서서 가끔 귀 기울여 소리를 들어 보기도 했는데, 레이커스와 정원에서 숨바꼭질할 때 들었던 그 소름 끼치는 쇠사슬 소리 같은 것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 안을 둘러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하실에 들어가 보기는커녕 애당초 찾아보려고 했던 레이커스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일은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다.
사용인들이 여기저기 있는 데다가, 샤인과 루나도 내가 보이면 쪼르르 쫓아오곤 했으니까.
“……하아.”
나는 성과를 조금도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길게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오늘은 원래 예정대로 궁정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핑계 삼아 외출을 할 예정이었다.
‘뭐, 레이커스라는 강제 동행이 생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증거를 수집하려면 집 안이 아니라 이 저택 밖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요즘이었으니까.
나는 풀 죽지 않고 최대한 기운을 내기로 했다. 그가 억지로 따라오겠다면 그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몸을 사리는 것도 좋지만, 이대로 지내다간 어느 순간 차례차례 모두 죽어 버릴 테니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침잠해 있던 생각에서 황급히 건져 올려지듯 생각을 끊어 냈다.
‘레이커스…… 겠지?’
나는 거울에 비친 문 쪽을 흘끗 바라보고 내 모습을 다시 훑어보며 점검했다.
전체적으로 유행에 뒤처진 옷차림이긴 하지만 퍽 정갈하고 말끔한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에 작은 미소를 억지로 떠올려 보자, 굳은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다 좋지만 내가 그를 의심하는 기척을 보이면 끝이야.’
첫 번째 하트가 사라졌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를 의심하는 말을 뱉은 직후, 내 하잘것없는 목숨이 어떻게 스러졌는지.
이번에는 그런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을 거다.
뭐…… 참고할 표본은 많잖아.
레이커스만 보면 좋아 죽는 그 수많은 여인과…… 남자들을 생각해 보면.
‘할 수 있어. 아무튼, 의심하는 기색만 덜 비추자.’
똑똑똑.
재촉하는 것은 아닌 듯한 느긋한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가라앉힌 뒤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레이커스가 보낸 시종이 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레이커스 본인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단정하고 화사한 옷차림은 옷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퍽 격식이 느껴졌다.
재단해서 맞춘 것이 확 티가 나도록, 넓은 어깨나 잘록한 허리에 아주 잘 맞는 두꺼운 소재의 정장은 한숨이 나오게 잘 어울렸다.
빗어 넘겨 고정한 금발 머리며, 엷은 은색처럼 보이는 눈동자며…….
솔직히 살인마만 아니라면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해서 전 인류의 눈을 이롭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너무 차려입으신 것 아닌가 해서요…….”
“부티크에 갈 거니까요.”
“……그렇게까지 차려입고 가야 하나요?”
“그렇게 화려해 보이나요?”
그의 질문을 듣고서야, 나는 화려한 것은 그 옷차림이 아니라 그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낀 잘생긴 남자 필터를 아직 다 빼내지 못한 모양이지.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도리질을 치며 레이커스가 내민 팔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뭔데.
내가 질겁하며 손을 젓자 레이커스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여튼…… 항상 이상한 부분에서 좋아한다니까.
“갈까요?”
“그러시죠.”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마차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모나 강 근처에서 갑자기 몸을 구부리고 기침을 시작했다.
“콜록, 콜록.”
“괜찮습니까?”
레이커스가 놀라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 들며 최대한 처연한 척 머리를 짚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만 바람을 쐬고 가도 괜찮을까요?”
“바람이요?”
레이커스는 이미 열려 있는 마차 창문으로 잘만 들어오는 강 내음을 한번 맡는 듯하더니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멀미하는 것 같아서요.”
난 기가 막힌다는 듯한 그의 눈을 기대에 가득 차서 바라보았다.
부티크까지 가는, 고작 10분 남짓한 길도 견디지 못하는 이런 나약한 여자와 함께 쇼핑을 못 가겠다고 돌아가 버려도 좋을 텐데.
하지만 살인마에다 납치 감금까지 취미로 하고 계신 저 잘생긴 미치광이는 이상할 정도로 신사적으로 굴었다.
그는 내가 못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려서 좀 걸으실까요? 벤치에서 좀 쉬어도 괜찮고요.”
“……그래요.”
그가 따라오는 것도 좋지. 자유는 잃겠지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고 아무 의도도 없다는 듯 모나 강의 두 번째 다리를 향해 걸었다.
DAY 17의 모나 강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평소라면 한가하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인파와 놀러 나온 아이들이나 있을 강가는 경찰들로 가득했다.
트리버 경감과 득실거리는 경관들이 여기저기서 그라피티가 어지럽게 그려진 벽을 살피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다른 경관들을 독촉하는 괄괄한 경감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에 강둑 가까이에 나와 기웃거리고 있기도 하고, 혹시라도 이 소란에 잘못 휩쓸리기라도 할까 두려워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창문의 겹창까지 닫아걸기도 했다.
여기가 바로, 내가 기억하는 실종 사건 현장이다,
나는 흘끗 레이커스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사건의 가장 중심에 서 있을 그가,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가 궁금해서.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지, 아닐지.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