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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26화 (26/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6화

나는 그의 호감도가 가장 많이 올랐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레이커스가 내게 평소와는 썩 다른,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로 ‘기억 삭제’라고 말했고, 처음 보는 시스템 에러 메시지가 뜬 직후였다.

뭔가의 이유 때문에, 내가 그를 흥미진진하게 만든 거다.

‘만약에 그가 쓸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능력이라면?’

그렇다면 그에게 증거 인멸이란 정말 껌일 거다.

그런데 경시청을 자꾸 들락거리고, 현장마다 고개를 내밀고 다니는 내가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내가 아주 걸리적거리겠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싶은 거야.’

내가 생각해도 정말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무슨 생각인가 했는데, 하루 종일 바쁜 일과 중에도 꼭 짬을 내어 나를 구경하러 오는 그 모양새는 어딜 봐도 ‘감시’였다.

‘……세상에.’

내가 떠올린 생각에, 몸이 오싹하게 굳었다.

나는 짧은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어쨌든 그가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당장 죽였을 거야……. 지금 당장은 내가 받은 협박장도 없고, 사건 수첩에도 내 이름이 안 나오니까 괜찮을지도 몰라.’

그런데 트리버 루악 경감과 블리에 씨는 남의 속도 모르고 우리 둘 사이에 무슨 달콤한 연애담이라도 오가는 줄 알다니.

나는 창백해진 내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내가 지금 다른 희생자를 걱정할 때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젠 내 몸만 챙기려다가 다른 사람이 봉변당하는 걸 볼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내 몸만 챙기려고 해도…… 뭘 해야 그 비정상적인 남자의 관심을 끊을 수 있을지 이젠 전혀 모르겠고.’

일단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다음, 주말이 되는 대로 외출할 생각이었다.

연회장에 가서 입을 옷을 맞추겠다는 핑계로 내가 쓰러진 골목으로 가 보려고.

혹시 나를 발견해 준 경관님이 누군지 마주치게 된다면 감사 인사라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왕실 연회에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이 외출까지 막진 않겠지? 드레스를 맞추겠다는 훌륭한 핑곗거리도 있고.’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문제더니, 이젠 돈이 있어도 쓰러 나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한다.

‘정말 첩첩산중이라니까.’

한숨을 푹푹 쉬던 나는 양쪽 다리에 누군가 매달리는 감각에 황급히 생각을 정리했다.

“선생님, 우리 숨바꼭질해.”

“숨바꼭질!”

은색, 금색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신이 나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런 눈을 하고 요구해 오는데,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내가 먼저 들어준다고 한 거니까.

귀엽기 짝이 없는 두 아이가 온갖 가정교사들에게 그동안 제대로 된 훈육을 받지 않은 이유는 리어먼드 가문의 위세가 대단한 탓도 있겠지만 이 둘이 워낙 귀엽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피식 웃으며 둘의 머리를 나란히 쓰다듬어 주자, 샤인이 문득 내 안색을 살피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뭐, 아직도 비실비실해서 못하겠으면 그렇다고 해도 돼. 난 숨바꼭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으니까.”

루나가 제 오빠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는 듯 젖살이 오른 보드라운 두 팔을 위로 치켜들며 강하게 항변했다.

“아냐! 루나는 하고 싶어!”

샤인이 다 큰 어른처럼 허리를 쭉 펴며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 귀족은 아랫사람을 보살필 줄도 알아야 한댔어.”

“……아랫사람? 알비는 선생님인데! 난 숨바꼭질하고 싶어!”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아르비체가 또 아파서 눕는 게 보고 싶어?”

루나가 떼를 쓰려는 듯 두 팔을 번쩍 들다가, 그 말에 화들짝 놀라서 내 쪽으로 울망한 눈길을 보내왔다.

“헉! 알비 선생님 또 아파요? 아플 거예요? 아니야, 그러면 숨바꼭질 안 해도 괜찮아요.”

‘뭐야,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들은.’

그렇게 3일이나 앓았던 건 신체적으로도 지쳐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주 멀쩡했다.

게다가 이 귀여운 아이들의 저런 다정한 염려를 듣고 있자니, 더 완벽히 나은 기분이었다.

난 픽 웃으며 둘을 안고 나긋하게 속삭여 주었다.

“선생님 이제 안 아플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정말로요?”

“그럼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샤인은 제가 어른스레 말했던 것을 모두 다 잊은 것처럼 대번에 신이 난 얼굴이 되었다.

숨바꼭질 안 해도 괜찮다며.

절로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얼굴에 내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나는 최대한 엄한 얼굴을 연기해 보였다.

“대신, 오늘 내준 과제를 다 하고 나서 하도록 해요. 오늘 다 못하면 놀이도 못 하는 거예요.”

오늘의 과제는 독후감 쓰기였다.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책은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책 읽기 시간 동안 자꾸 딴짓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두 아이를 위해 마련한 과제였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샤인은 얼른 책을 주워 들며 퍽 비장한 얼굴까지 해 보였다.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두 아이를 보니 속으로 웃음이 샜다.

‘숨바꼭질이 대체 뭐라고, 저렇게 하고 싶을까.’

하긴, 나도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게 퍽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샤인과 루나는 생각보다 활동적인 일들을 좋아했다.

멀리 나가지 말라는 레이커스의 분부가 떨어진 이상 갈 수 있는 거리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샤인과 루나는 공작가의 정원에서 주로 놀았다.

크로켓이나 배드민턴과 비슷한 라켓과 공을 이용한 놀이, 줄넘기도 했고, 이따금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산책를 하거나 보물찾기를 하기도 했다.

오늘 하는 숨바꼭질이 그중 가장 넓은 범위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거니까 아이들이 저렇게 신이 날 법도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망령이 있어도 오백 마리는 있을 법한 이 음산한 고저택을 돌아다니며 어두운 옷장과 낮은 서랍장을 열어젖힐 각오를.

아이들이 독후감을 쓰는 사이에, 정적을 틈타 혼자 창밖을 구경하던 나는 손님의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 바퀴 굴러 가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마차는 새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경찰의 마차였다.

내 방만큼은 아니었지만 수업하는 이 방의 창문으로도 이 집에 드나드는 마차가 잘 보였다.

레이커스가 대단한 인사이긴 한 모양인지, 공작저에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경찰 고위 간부와 지역 유지들 같은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커스와 살인 사건에 대해 논의해서 어떤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 짜고 치는 건지…….

나는 방문을 살짝 열고 귀를 기울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들과 수업하는 방이 레이커스의 집무실과 아주 가깝다는 점이었다.

문을 살짝 열어 놓으면 오가는 경감과 경관들이 복도에서 나누는 이야기 같은 것은 쉽사리 엿들을 수 있었다.

“어제는 무슨 개들이 짖어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다는 민원이 자꾸 들어오질 뭔가.”

“그러니까 말이야. 안 그래도 일손이 딸려 죽겠는데 개 짖는 것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질 않나?”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 달리 있는 게 아니지.”

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온 도시의 개가 일제히 짖기 시작하는 순간……?’

그런 장면이 종종 있었던 것이 문득 기억났다.

‘개들이 짖는다라…… 무엇을 경계해서?’

게임 안에서는 그리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듣고 있자니 몹시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들고 있던 작은 메모장에 내가 기억해 둬야 할 것 같은 내용을 빠르게 갈겨 적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레이커스가 있는 쪽의 방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대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거, 항상 여러모로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놓고 가는 것은 이번 캐서 헌트 살인 사건 현장에서 보였던 특이점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하실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

생각보다도 레이커스와 트리버 경감은 친밀했다.

심지어 사건의 내용을 레이커스에게 직접 보고하러 올 줄은 몰랐다. 보고서까지 정리해서.

‘아니, 이건…… 경찰의 기밀 유출 아냐? 정경유착 뭐 이런 건가?’

속으로 경악과 불만을 토로하며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레이커스가 그 자료를 검토해 보는지 꽤 오랜 침묵이 이어지더니, 부드러운 그의 음성이 이어 들렸다.

“이거, 흥미로운 정보가 가득하군요. 역시 경감님께선 정말 유능하십니다.”

“다 레이커스 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걸요. 상부에서도 이번에는 좀 증거를 찾아냈다고 기뻐하시더군요.”

“흠? 제가 뭘요.”

“하하, 하여튼 겸손하시단 말이지요. 그보다 저번에 드린 자료 말입니다만…….”

“아아, 바로 일전에 주셨던 사건 파일이요. 틀림없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찾아내면 즉시 연락드리죠.”

“하하, 이거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 청에 있는 자료 창고에 불만 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부탁드릴 일은 없었을 텐데요. 오래 묵은 자료들이 싹 불에 타는 바람에…….”

‘……불이 났다고?’

불.

눈썹까지 찌푸려 가며 스토리를 자세히 떠올려 보자, 아주 짧게 한 줄 정도로 언급되고 지나갔던 사건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 청사의 자료 창고에 불이 났었다.

별것 아닌 사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얼마 전, 참고인 증언을 하러 직접 경시청에 방문했을 때.

그때 레이커스에 관련된 사건 파일이 목록에 있는 것을 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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