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4화
욕실에 들어온 나는 거울을 한참 바라봤다.
땀에 잔뜩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에메랄드빛 머리를 한 내 얼굴은 지난 며칠 사이에 많이 상해 있었다.
의사가 지켜보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갈 정도로.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땀까지 많이 흘려서 볼이 쏙 들어갔고, 낯도 창백했다.
‘정말 몸이 안 좋긴 했나 봐. 밖에서 쓰러지다니.’
경시청에 가겠다고 바보같이 무리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경관들이 발견해서 레이커스에게 연락해 준 게 다행이야.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멍하니 거울을 손으로 짚는데, 가면을 쓴 검은 사내의 이미지가 어른어른 눈에 비쳤다 사라졌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좁은 골목을 배경으로 한.
정말로 꿈이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꿈인 게 맞다.
그랬을 거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깨어나지 않았겠지. 완전히 리셋됐을 테니까.
그때의 내겐 저항할 힘 같은 건 없었을 테니.
다만 기억이 끊어지는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것조차 꿈이었을지 궁금했다.
‘그 사람이 레이커스에게 연락해 준 경관님일 텐데. 누군지 알아야 감사인사라도 할 것 아냐.’
난 아직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며, 내가 누워 있는 시간 동안 바뀐 건 없는지 사건 수첩부터 조회했다.
첫 페이지에는 역시 용의자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었다.
[유력 용의자 : 모리슨 알터(신문 배달부)
6번째 사건인 헌트가 주변에서 목격된 바 없으나, 증언을 수집 중.]
추가 증거가 나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의를 벗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도 수사 방향을 잘못 잡고 있잖아.’
혀를 차며 수첩을 팔랑 넘기자, 다음 페이지에는 이전에 봤던 기사 스크랩이 그대로 나왔다.
그 스크랩 중에는 캐서 헌트의 집을 취재한 것이 새로이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촛농으로 그린 마법진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운 증거란에 적혀 있었다.
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진 채 발견되었던 그녀의 시신을 생각하면, 또 눈물이 흐를 것 같았으니까.
다음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이젠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오른쪽에 적힌 유력 예상 피해자 목록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손을 멈췄다.
[유력 예상 피해자 : 모니카 파울로
거주지 : 왕실
참고 : 동료, 웨인 이슈의 실종 사건 수사에 협조 중. 까마귀 그림이 그려진 편지를 받았다고 함.]
모니카.
그녀는 스토리상 캐서 헌트 다음으로 희생되는 캐릭터다.
차례대로 다음 희생자 후보가 이 수첩에 적히는 것은 게임 속에서 이미 경험해 봤던 일인데도, 나는 마치 처음 겪는 일처럼 그 페이지를 오래 바라보았다.
‘모니카는 왕실 시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왕실 시녀인 그녀가 어쩌다 죽임을 당했더라?’
게임을 할 때는 죽임을 당한 뒤에 단서를 수집하는 데 급급했지, 그녀라는 캐릭터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자세한 정황까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난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수첩을 닫았다.
‘왕실에 갈 기회만 있다면 모니카에게 미리 경고를…….’
왕실에 갈 기회.
공주님의 초대로 왕실 연회에 가는 이벤트 루트가 열렸던 게 번뜩 기억났다.
나는 씻으려던 것도 잊고 다시 방으로 뛰쳐나갔다.
레이커스는 아까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닌지 아직도 내 방 응접실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레이커스 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보다 그린 양, 옷차림이…….”
“네? 아니 그보다, 왕실 연회, 언제죠? 제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 건 아니죠?”
내가 레이커스가 하려는 말을 끊고 다급하게 다다다 쏘아붙이자 그는 눈썹을 밀어 올렸다가 슬쩍 늘어뜨렸다.
“방금 멀리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알겠어요. 그러니까, 언제예요?”
“일주일 뒤입니다.”
내가 반색하며 기뻐하자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구겼다.
“참석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럼요!”
“꼭 가셔야겠습니까?”
“그럼요. 왕실 연회라니, 소녀의 로망이잖아요. 그 화려한 드레스와…… 춤…… 아무튼 그 모든 것들이요.”
되는 대로 둘러댄 내 핑계가 그리 못 믿을 것은 아니었던지, 레이커스는 불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도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려 주긴 했다.
“좋습니다. 대신 저와 동행하시는 조건으로요.”
‘레이커스에게서 희생자를 구하러 가는 건데, 레이커스와 같이 가라고……?’
난 기가 막혀 그를 바라봤다.
“초대하신 건 저뿐인걸요.”
“전 항상 초대받고 있으니 염려 거두셔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린 양, 옷차림이…….”
아니, 그거야 그렇겠지만…… 공주님이 레이커스를 초대한 이유가 뭐겠냐고.
나는 한 번 더 고용주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대꾸했다.
“공주님은 레이커스 님과 파트너가 되고 싶으실 텐데요. 괜히 눈치 없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공주님께도 저와 파트너가 되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뭐, 그린 양이 이 조건이 싫다면 참석하지 않는 쪽으로 부탁하고 싶지만…….”
말이 좋아 ‘부탁’이지, 그게 싫으면 참석하도록 허가해 주지 않겠다는 투였다.
꽤 강경하게 나오는 그를 보니, 절대로 내 마음대로 갈 수는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네.’
나는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대신 거기서 제가 개인적인 사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내버려 둬 주셔야 해요.”
“개인적인 사교 활동이라니, 눈여겨본 사람들이라도 있습니까?”
“그럼요. 저도 사랑을 꿈꾸는 여인인걸요? 연애 상대도 찾고, 친구도 만들어야죠.”
내 말을 들은 레이커스가 피식 웃었다.
“흐음, 뭐. 아무쪼록 눈에 차는 분을 찾길 바랍니다.”
‘기가 막혀.’
마치, 매일같이 레이커스의 잘난 얼굴을 보고 있는 처지인 내 눈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말처럼 들리지 않나?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나 싶다가도 그의 삐뚜름한 미소를 보고 있자면 내 생각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자꾸 든단 말이야.
어쨌든 연회까지 시간도 남았고, 왕성에 방문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모니카는 죽기 전에 먼저 실종된 걸로 기억하는데…… 그 날짜까지 시간이 좀 있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레이커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난 뭐라도 묻었나 싶어 내 볼을 손으로 쓸며 그를 마주 보았다.
“……왜요?”
“그런 옷차림으로 계속 제 앞에 계시면, 사교 활동을 하기도 전에 애먼 소문이 나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네? 그런 옷차림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 눕히며 갈아입힌 듯한 새하얀 원피스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는 사이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꽤 두꺼운 옷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물을 먹은 천은 몸에 딱 달라붙어서 방 안의 어둑한 조명으로도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 내 몸을 가리며 그를 한껏 쏘아 봐 준 나는 몸을 홱 돌려 욕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변태 자식!’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냐.
난 내가 그의 말을 자꾸 잘라 버렸다는 사실 같은 사소한 문제는 뒤로 덮어 두고 새빨개진 양 볼을 감싸며 부끄러움을 가라앉혔다.
레이커스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짧게 씻으려다가, 물이 가득 받아져 있는 탕을 보자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언제부터 받아져 있던 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욕조 안에 손을 넣어 보자 따끈한 물이 손바닥을 감싸는 감각이 딱 기분 좋았다.
이 게임 속 세계에는 연금술에 가까운 애매한 마법이 발달하여 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기술이 탕 온도를 유지하는 거였다.
‘기다리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얼른 생각을 바꾼 나는 푹 젖은 잠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탕 속에 얼른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자, 레이커스가 신문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언제까지 내 방에 머물 생각이지.’
이쯤 되면 무섭기보다 짜증이 난다.
기가 막혀서 그를 쏘아보는데, 카트를 미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블리에 씨의 목소리다.
“그럼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
언제나처럼 붉은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블리에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아직 머리가 젖은 채인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 오는 날에 그렇게 밖에 다니시더니…… 감기가 단단히 걸린 모양이에요. 자자, 머리는 제가 말려 드릴 테니 단호박 수프부터 좀 드세요.”
“어머, 감사해요.”
“며칠이나 일어나지 않으셔서, 다들 걱정이었답니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나는 조금 놀라서 둥근 안경을 쓴 블리에 씨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르비체 그린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하나 없어서 평소 행적을 증언해 줄 사람조차 없이 죽었던 캐릭터잖아. 그래서 누군가가 걱정해 줄 거라곤 기대도 하지 못했는데…….’
“그랬어요……?”
“그럼요. 앰버도 몇 번이나 다녀갔고, 다른 식솔들도 내내 걱정했는걸요. 그리고 샤인과 루나도 하루에도 열 번씩 얼굴을 보겠다고 졸라 대서 유모가 고생했답니다.”
샤인과 루나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이들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당장 내일 아침에 꼭 안아 주고, 그간 못해 준 만큼 칭찬도 많이 해 줘야겠다.’
“내일은 아이들하고 같이 있을게요. 걱정 끼쳐서 죄송하네요.”
“별말씀을요. 아플 땐 낫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블리에 씨는 날 의자에 앉히고 카트를 밀어 와 수프를 앞에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레이커스 님께서 제일 걱정이 많으셨어요. 사과를 하실 거면 레이커스 님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매일 들르시던데…… 혹시 두 분…….”
블리에 씨가 신문을 들여다보는 레이커스와 나를 흘끗흘끗 번갈아 보더니 어딘가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었다.
그런 거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트리버 경감이 내고 다니는 소문이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경감님을 오해했네요. 호호.”
‘그 산타 영감탱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