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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23화 (23/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3화

나는 우산 끝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얌전히 집에서 자고 오후에 올 걸 그랬나.’

원래의 몸은 그리 아팠던 적이 없어서, 아픈 것에도 너무 무디게 처신했나 보다.

비가 점점 굵어질 기색이어서 얼른 마차를 잡고 싶었는데, 비 때문인지 마차가 잡히질 않았다.

우산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소나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비를 피할 만한 처마를 찾아 들어갔다.

정처 없이 처마 밑을 찾아 들어오느라 어디를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고, 주변에 사람이라곤 안 보였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누군가 지나가 주면 좋을 텐데…….’

찡- 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양 귀에서 울렸다.

‘그래도 주택가니까 어느 집이라도 가면 말을 붙여 볼 수 있을 테지만…….’

어지러움은 점점 심해져 바닥에 주저앉은 뒤 다시 일어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토기가 쏠렸고, 몸에 열이 오름과 동시에 추웠다. 귀인지 어디서인지 심장 박동이 자꾸 들리는 것 같았다. 거기다 더해 등이 쪼개지듯이 아프기까지 했다.

기운이 없다 보니 들고 있던 가벼운 우산마저 떨어트릴 것 같았다.

‘택시 어플이 있던 시절이 좋았지…… 이렇게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다들 마차는 어떻게 잡는 거야?’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사람을 만나다니 운이 좋네.’

난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 보려고 손으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간신히 일어나긴 했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사람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어찌나 시야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는지 그저 커다란 그림자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손을 들어 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니야. 시야가 어지러워서 그림자처럼 보인 게 아니야.’

내게 다가오는 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차림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손에는 뭔가 검은 천 같은 것으로 둘둘 감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 돼.’

도망쳐야 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몰라도, 본능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멀어져야 한다.

나는 벽을 더듬더듬 짚어 뒤로 물러섰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고 귀가 자꾸 쨍하니 울렸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심지어는 시기도 참 부적절하게도 뒤통수가 자꾸 핑 도는 느낌이 나는 게, 이러다 행여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돼. 안 돼. 이렇게 간단하게 당할 수는 없어.’

내가 뒷걸음치는 속도는 아마 거북이보다 느릴 거다. 당연하게도 상대가 내게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휘슬을 겨우 떠올린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상대는 숙련된 솜씨로 손에 든 무기에서 천을 풀어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상에서 보는 칼이라야 식칼 정도가 전부인 현대인에게 살상용 칼을 직접 목격한다는 게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아무도 모를 거다.

나는 온몸의 털이 다 쭈뼛 서는 것 같은 감각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간신히 손에 휘슬이 잡혔지만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젠장.’

쓰러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찼다.

눈이 자꾸 느리게 깜박였고, 시야가 핑 돌았다.

“……안 돼.”

제대로 발음했을지도 의심스러운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하필, 나를 죽이려는 사람 앞에서.

빗물이 가득한 차가운 바닥이 뺨에 닿는 것마저 둔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졌다.

의식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내 위를 덮쳐 오는 그림자의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바닥을 전혀 끌지 않고 걷는, 똑 부러지는 발걸음 소리를.

비몽사몽간에 누군가 내 이마를 자꾸 짚고, 얼음주머니 같은 것을 올려놓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선생님, 빨리 나아! 내일은 근무일이라고? 어? 이렇게 아프면 월급 받을 수 있을 줄 알아?”

“선생님, 빨리 나아요. 응?”

협박 섞인 말이나 징징거리는 소리도, 누가 몸 위를 기어 올라와서 이마에 뽀뽀하는 감촉도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는 잠결에도 손을 뻗어, 따뜻하고 말랑한 작은 존재들을 꼭 안아 주었다.

그 존재들은 가만히 내 품에 기대어 온기를 나눠 주었다. 그들에게 내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 위안에 기대어 겨우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제대로 정신이 든 건 방 안에 노을이 잔뜩 깔릴 때쯤이었다. 온통 붉은빛이 가득 찬 방에서 나는 눈을 떴다.

옷이 흠뻑 젖어 있는 게 기분 나쁘긴 한데, 정말 하나도 안 아팠던 사람처럼 몸이 가뿐했다.

‘내가 정말 추워하긴 했나 봐.’

내 몸 위를 옥죄고 있는 무거운 것을 밀어내고 보니, 두꺼운 이불이 세 채나 되었다. 지금은 따뜻하긴커녕 덥기만 하고, 무거워 죽겠다.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시야의 테두리에 떠 있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이름도, 상태창의 모양도 그대로였다.

‘여전히 이 게임 속이고, 아무것도 변한 건 없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뒤늦게 누군가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왠지 모르게 그 사실이 좀 무섭게 느껴져서 천천히 돌아보았다.

붉은 노을빛에 빨갛게 빛나고 있는 레이커스가 옅게 웃어 보였다.

노을빛이 섞인 잿빛 눈이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심장이 그대로 멈추는 줄 알았다.

“일어났습니까?”

대체 그가 왜 여기 있지?

생각해 보면 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그래, 경감을 만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비를 피하다가 쓰러져서…….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안 죽었어요?”

말하면서 동시에 상태창을 확인했다. 하트는 다행히도 아직 두 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잘생긴 얼굴로 픽 웃었다. 비웃음까진 아니었지만, 어이없다는 듯한 뉘앙스가 그대로 느껴졌다.

‘……뭐지?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몸이 안 좋으시긴 했나 봅니다. 무서운 꿈을 꾸신 모양이에요.”

“……네?”

“광역경찰서 근처에서 쓰러진 걸 경관들이 발견했다고 해서, 마부를 불러 데려왔었습니다.”

그냥 쓰러져 있었다고?

‘그럴 리가.’

하지만 정말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내가 본 게 사실이었다면 내가 살아 있는 게 오히려 이상했고,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이상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그때 몸 상태가 많이 안 좋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이커스가 저렇게까지 당치도 않는다는 듯 말하니까, 내가 정말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몸에서 힘이 쭉 빠져서 나는 침대에 받쳐 놓은 커다란 쿠션에 몸을 폭 묻었다.

‘지금 이 세계도 꿈인지 아닌지 모를 판에, 여기서 더 꿈을 꾸다니. 정말 뭐가 뭔지 이러다 미쳐 버릴지도 몰라.’

난 레이커스와 한 방에 있다는 게 뒤늦게 불쾌하게 느껴져 슬쩍 물러앉았다.

“요즘 어수선한 사건이 많아서 그랬나 봐요. 그건 그렇고…….”

“그건 그렇고?”

“제가 오래…… 잠들었나요?”

“잘 아네요.”

“일을 못해서 잘라 버리려고 오신 건 아니죠?”

레이커스가 나직한 한숨을 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지독히 걱정된다는 듯한 그 은빛 눈동자를 마주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작 눈빛만으로 그에 관한 판단을 이렇게 간단히 흔들어 놓다니. 도대체가.’

나는 입술을 꽉 깨물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대체 왜 여기 계신 거죠?”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 당분간은 지켜보라고 의사가 말했거든요.”

“……공작님이 저를…… 간호했다고요?”

“네.”

내색하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질색하는 기색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레이커스는 픽 웃음을 흘리다가 답답하다는 듯 정색하고 날 바라봤다.

“위험하니 앞으로는 저와 함께 다니시죠.”

“……공작님이랑 같이 다니라고요?”

“샤인과 루나만이 아니라, 그린 양도 저택에서 멀리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쉬는 날엔 제 마음대로 다녀도 괜찮잖아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흉흉한 요즘인데 건강도 좋지 않으시니 해코지라도 당하면 큰일이니까요.”

얼핏 들으면 상냥해 보이는 말인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소리다.

내가 또 아파서 쓰러질까 그런 것도 아니고, 누가 해코지할까 봐 그런다고?

걱정되는 거라면 부하를 시키면 될 텐데 직접 같이 가자는 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누가 내게 해코지를 한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겠지!

레이커스가 다짜고짜 나한테 주먹을 휘둘렀던 장면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어이없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해 주자, 그가 대수롭지 않은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저 팔자 좋은 사람 좀 봐. 웃기만 하면 다들 넘어가 주니까 웃는 거잖아.’

나는 부러 그의 미소를 받아 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씻으러 가려고 수건을 챙겨 들자, 레이커스가 얼른 내게 다가섰다.

“어딜 가는 겁니까?”

“씻을 건데요.”

“일단 기다리죠.”

진심인가 싶어 그를 쏘아보자, 레이커스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진심인 모양이지만 그와 오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말을 막 뱉으려는 순간, 나는 상태창 좌하단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DAY 15.

분명 내가 외출한 날은 DAY 12였다.

‘그 뒤로, 3일이 지났다고……?’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눈을 뜬 순간에도 그가 있었던 걸로 봐서, 만약 지난 3일간 레이커스가 날 간호해 준 거라면…… 더 이상 땍땍거릴 수도 없어서.

‘제발 태도를 하나로 정해 줘.’

어떤 인간인지 점점 더 헷갈리니까.

‘내 방에서 버티고 있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난 입술을 꽉 깨물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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