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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22화 (22/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2화

“수고하셨습니다. 출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아, 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는 내 입과는 달리, 내 몸은 의자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망설였으면서도 나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고용주님 사건 파일이 있는 모양인데, 좀 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

게다가 경찰서 안에서도 따라다니는 경관이 있으니,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경찰서 내에서 아이템을 얻을 장소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그래도 하나는 손에 넣어서 다행이야.’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소한 성과만을 올린 채 경시청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와 아이템 창을 열자, 6연발 리볼버 옆에 새로 생긴 아이템 슬롯에 은색의 반짝이는 휘슬이 그려져 있었다.

[휘슬 : 사용 시 반경 30미터 내에 경관이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대단한 아이템은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든든하다.

‘뭐…… 거미 얘기를 꿈 취급하는 경관을 보니까, 크리쳐를 만났을 때는 경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게임 속에는 크리쳐가 출몰하는 지역이 딱 정해져 있었다. 이 ‘파크’를 둘러싼 핏빛 숲과 던전이었다.

크리쳐 사냥을 떠날 때는 미리 신전에 가서 인간 외의 종족에게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무기를 얻어야 했다.

그게 있다고 해서 내가 그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아이템을 얻는 루트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전은 또 다른 세이브 포인트였으니까. 혹시 모를 것을 실험해 볼 수도 있을 테고.

‘기왕 나온 김에 신전을 들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거기까진 무리일 것 같았다.

경찰서 내에서는 그래도 어떻게 다른 것에 정신을 쏟느라 내 몸 상태가 나빠진 것도 몰랐는데, 경찰서에서 나오고부터는 몸이 급격히 무거워졌다.

휘청휘청 걸어서 경찰서 앞, 비둘기가 잔뜩 앉은 분수대로 가서 주저앉았다.

“아, 이거, 또 뵙습니다.”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자, 분수대에 먼저 앉아 있던 경감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앉아 있는 줄도 몰랐네.’

진짜 몸이 안 좋기는 한가 봐.

경감은 과장되게 모자까지 벗어 가며 내게 인사를 했다. 난 그러는 게 웃겨서 픽픽 웃으며 트리버 경감이 내미는 손을 마주 쥐었다.

“이거, 지난번에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말씀해 주신 것 덕분에 놓칠 뻔했던 증거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현장도 다시 조사해 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거, 공작님께서 밝히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니 공식적으로 감사 인사를 드릴 수도 없고.”

난 목에 식은땀이 나서 어설프게 웃었다.

“아무튼, 다음에도 뭔가 목격하시거나 증거를 보신 게 있으면…… 아니, 공작님께서 말씀해 주신 게 있으면 꼭 전해 주십시오. 허허.”

“그럼요.”

트리버 경감은 아무래도 공작과 내가 연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 아주 공손해진 태도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수사에 진전이 있다니 다행이지만, 뭐 얼마나 대단한 정보를 얻을지는 미지수다.

‘경찰의 수사로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으면 게임에 플레이어는 필요 없겠지.’

막막한 기분은 해소되지 않았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어쩐지 숨이 뜨거운 것 같아서 내 이마를 짚어 보는데, 파드득- 하며 비둘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간을 조금 두고 발 두 개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누구……?’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은발 곱슬머리에 말랐지만 훤칠한 남자.

랑비엘 멕레이.

“이거…… 두 번째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랑비엘도 공작가의 귀한 아드님이신데 왜 이렇게 길바닥에 수행원도 없이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이 사람, 희생자가 될 예정인 사람이니까……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많이 해 두고 싶어.’

내 응낙에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르비체 그린. 이름 맞게 기억했나요?”

고작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 가난한 남작가의 딸일 뿐인데, 한 번 본 공작가 영식이 기억할 만한 이름일까.

대체 어쩌다 그가 내게 호감을 보이는지 아직도 모르겠는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옆에 앉아도 괜찮습니까?”

“아, 네.”

예정 희생자라면 최소한 그는 믿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거기다 정보를 교환해 둘 수도 있겠고.

나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이에요, 멕레이 씨.”

[랑비엘 멕레이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40/198)]

이 사람, 호감도가 너무 쉽게 오르는 거 아냐?

내가 작게 웃는데, 랑비엘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까 경감님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혹시 최근 캐서 헌트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네?”

“뭔가 목격한 게 있다거나.”

이상할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는, 희생자가 될 사람이니까.

절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난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경감님께서 그렇게까지 인사를 하시던데요.”

“에이…… 그냥, 그냥 하신 거예요.”

“흐음.”

내 대답이 마치 아주 재밌는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랑비엘은 눈까지 접어 가며 빙그레 웃었다.

랑비엘은 그 대화 이후로도 싱글싱글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처음의 대화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뿐이지, 그는 달변가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는 재밌었다.

분숫가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뭐, 생각보다 랑비엘이 말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일방적으로 듣는 처지였지만.

랑비엘과 레이커스가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 왔다는 이야기나, 둘이 꽤 오래 알고 지냈으며 두 가문 사이에 은원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며…… 어쩔 수 없이 서로 경쟁심이 있는 사이라 레이커스가 그만 보면 으르렁거리지만 실은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랑비엘의 이야기에는 레이커스에 관한 내용이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마치 레이커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랑비엘 씨는, 혹시 그 이야기 알아요?”

“흠……? 어떤?”

“까마귀가 그려진 협박장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요.”

캐서 헌트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캐서는 황급히 돌아가 봐야겠다며 자리를 피했었다.

그녀는 그 협박장을 받은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랑비엘도 같은 처지일까 싶어 물어본 거였지만, 그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내게도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으니까…… 죽는 순서대로 협박장이 도착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혹시 주변에 무슨 일은 없어요?”

“어떤 일요?”

“뭔가…… 아니, 그냥, 요즘 워낙 흉흉한 사건이 많으니까요.”

랑비엘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하나도 걱정할 필요 없지 않나요? 전 호위도 있는걸요.”

“……아, 그렇긴 하지만…… 걱정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랑비엘 씨는 저희 공작님의 친우이시니까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묘한 공백에 랑비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랑비엘이 재밌다는 듯 히죽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노을에 비친 그의 그 미소가 어딘가 섬뜩해 보인 건 나의 착각일까?

“……왜요? 생각나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는 픽 웃었다.

“아니, 생각나는 건 없고…… 레이커스가 그린 양을 왜 그렇게까지 끼고 다니나 생각했는데, 볼수록 재밌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네?”

“혹시, 레이커스와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랑비엘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살인마와 내가 무슨 사이라니, 그런 끔찍한 말은 농담으로도 사양이다.

“절대로. 절대 아니에요.”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입술로 호를 만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면 아직 저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이네요.”

“……네?”

“데이트 신청해도 괜찮죠?”

“……데이트요?”

그럴 마음의 여유 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생겼단 말이야.’

그리고 원래도 데이트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고.

하지만 내가 거절의 말을 내뱉기 직전, 랑비엘이 작게 소곤거렸다.

“바로 좋다고 하지 않네요. 이건 또…… 드문 이야긴데.”

난 기가 막혀서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커스도 그렇고, 랑비엘도 그렇고. 이 게임 속에는 저 잘난 줄 아는 남자들밖에 없는 건가? 거절당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는 저 반응은 대체 뭐람.’

“……죄송해요.”

“아뇨, 죄송하다뇨.”

[랑비엘 멕레이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0/297)]

이번에야말로 화내거나 실망할 줄 알았는데.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때, 툭 하고 하늘에서 굵은 물방울 하나가 내 옆으로 떨어졌다.

랑비엘은 제 손에 있던 커다란 까만 우산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 저 주셔도 괜찮아요?”

“그럼요.”

“……하지만.”

“다음엔 꼭 데이트 신청 받아 달라는 의미로.”

‘더 부담스럽잖아.’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랑비엘은 환하게 웃으며 우산을 펴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쏴아-.

순식간에 거세진 빗줄기 사이로 그의 속삭임이 들렸다.

“부디, 무사히 돌아가세요. 리어먼드 저택까지.”

그 다정한 걱정의 말 어딘가가 음산하게 느껴진 것은 내 착각인 게 틀림없으리라.

눈을 깜박, 하고 감았다 뜨자 랑비엘은 어느새 길 건너편까지 비를 맞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젖어 버린 그의 은발을 보다가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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