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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21화 (21/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1화

“……어라?”

방금 눈을 떴을 때 느꼈던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시야가 자꾸 비스듬하게 보였고,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니, 뜨거운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견딜 수 없이 추웠다.

‘계절이 하루 만에 바뀐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이마를 한번 짚어 보자 평소보다 따끈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해.’

게임 속에서 살아가게 된 뒤로 모든 날이 힘들었지만, 어제만큼 힘든 날은 없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 쏘다녔던 데다 정신적으로 갖은 충격을 다 받았던 날이었다.

거미 크리쳐, 낯빛이 변해서 덤벼드는 레이커스, 캐서 헌트의 죽음.

어제 겪었던 것 중 무엇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자리에서는 어떻게든 일어났지만, 자꾸 오한이 들고 땀이 나서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곤욕이었다.

제대로 차림을 갖추고 식당에 내려가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꼴로 나타나면 괜히 걱정만 시킬 거고, 무엇보다도 입맛이 없었다.

‘사실…… 다른 걸 다 떠나서 레이커스의 얼굴을 보기가 싫어.’

레이커스에 대해서는, 그를 보지 않을 때는 정말 아주 쉽게 모든 감정과 논리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얼굴만 보면, 특히 그 눈빛을 보면 모든 게 흐려지고 어려워지는 기분이 든다.

정말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비유라는 걸 아는데, 아주 가끔 갈 곳을 잃어버린 강아지 같은 눈빛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그를 판단하기가 어려워졌다.

‘……뻔뻔한 살인마일 뿐이야, 그자는.’

난 마음을 꼿꼿하게 다잡으려 애쓰며 아침 식사에서 빠질 만한 좋은 핑계를 떠올렸다.

‘트리버 경감이 출석해 달라고 했었지.’

마침, 어제 내가 그에게 귀띔해 준 것에 대해서 괜히 떠벌리고 다니지 않도록 입단속도 해 두고 싶었으니까 경감을 만나러 가는 것은 기꺼운 일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지도를 떠올렸다.

미니맵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살인자들의 밤>의 도시 구성은 몹시 간략했다.

전체 맵의 이름은 ‘파크’.

그 파크의 가장 중심되는 곳에 왕성이 떡하니 있고, 그 주위에 방사형으로 등장인물들의 집이나 주요 건물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 식이다.

왕성, 경찰서, 은행, 양조장, 방앗간, 도서관, 신전, 마탑, 서커스 공연장, 푸줏간 같은 곳들은 각기 다른 아이템과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플레이어가 함부로 방문할 수는 없다.

반드시 관련된 캐릭터와의 이벤트를 통해서만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경찰서 안에도 분명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이것저것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 가 보는 게 좋지.

‘다만 아쉬운 것은 모처럼 외출하는 거니 돈이라도 조금 있다면…… 어라?’

문득 상태창의 위쪽을 바라본 나는 0G밖에 없던 불쌍한 내 잔고가 200G로 늘어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월급일! 오늘이 이달의 말일이구나.’

이 세계관 안에서 꽤 괜찮은 식사가 1~2G 하는 걸 생각하면, 200G는 꽤 후한 돈이었다.

‘고용해 주는 것 가지고 어지간히 유세를 부리더니, 고용 조건은 나쁘지 않네.’

내가 아주 마음에 드는 척 굴던 레이커스의 미소가 저절로 떠올라서 얼른 고개를 휘휘 젓고 억지로 기운을 차려 옷을 갈아입었다.

한참을 쉬어 가며 겨우 몸을 일으킨 나는 얼굴을 익힌 키친 메이드 한 명을 붙잡아 오늘 아침 식사를 거를 거라고 전해 주길 부탁하곤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바깥 공기는 축축하고 습했다. 언제 소나기가 또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구름이 가득 낀 날씨였다.

날이 흐리니까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데 기분까지 축축 처졌다.

‘아, 정말, 유럽인들이 볕이 나면 참새들처럼 공원에 옹기종기 앉아 햇볕을 쬐는 이유를 알겠어.’

매일같이 날씨가 흐린 공포 게임 안에서 살자니 아주 죽겠다.

들숨에 ‘살인마 새끼’ 날숨에 ‘진엔딩을 보고야 만다, 내가.’를 중얼거리며 기억하는 대로 큰길을 따라 걸었다.

자꾸 숨이 더웠고 머리가 핑핑 돌긴 했는데, 뭐, 빨리 볼일만 보고 돌아가면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지 오 분도 안 돼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와. 안 되겠어.’

그렇게까지 멀지도 않은데 너무 힘들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플레이어 시절에는 이동 속도를 올릴 수도 있었고, 어지간해서는 이벤트 장소로 자동으로 이동했다.

그걸 지금 와서 다 도보로 이동하자니 죽을 것 같았다.

난 별도리 없이 마부에게 피 같은 돈 중 2G를 내겠다고 하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돈을 쓰는 게 좋긴 좋다.

마차는 보기보다 안락했고, 대로를 지나는 동안 느긋하게 건물들의 위치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건 즐거웠다.

그리고 앞쪽 창을 내리면 마부와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멋들어진 중절모를 쓴 아주머니는 나와의 수다를 반갑게 받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경시청으로 가주세요.”

“경시청은 뭐 하러 찾아가시나요?”

“아, 그냥 뭘 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어머, 누군가 했더니. 그린가 아가씨 아니세요?”

나는 깜짝 놀라 능숙하게 고삐를 놀리는 아주머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르비체 그린은 원래 빨리도 퇴장하는 그저 그런 캐릭터다. 주목을 살 일도 없고, 신분도 내세울 게 못 되는.

그런데 지나가는 NPC까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만큼 얼굴이 팔려 있는 줄은 몰랐다.

“절 아세요?”

“그럼요! 리어먼드가 가정교사로 계시다지요?”

“그런 것까지 아세요?”

아주머니는 씩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만큼 소문에 빠른 사람도 없을걸요? 아가씨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파다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레이커스 님께서 집에 사람 들이는 걸 얼마나 까다롭게 보시는데요? 애들이 입양된 지 일 년도 넘었는데 가정교사 후보들이 일주일을 못 버티고 족족 잘려 나갔었는걸? 아가씨께서 정식 가정교사로 일을 하는 것만 해도 온 도시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떠들어 댔지요.”

‘와…… 주목을 사고 싶지 않았는데…… 완전 그 목표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네.’

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봐 주시니 좋네요.”

“어휴, 전생에 아주 큰 덕을 쌓으셨나 봐요. 리어먼드 공작님을 매일같이 뵈면서 일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 그래?”

“……글쎄요.”

애초에 이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 건 외부인들에게 레이커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서였는데, 다 틀렸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대와는 달리 이 마차꾼 아주머니는 내가 뭐라고 말을 더 붙이기도 전에 입에 침이 마르게 레이커스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어휴, 얼굴만 잘생기고 몸만 좋으신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요?”

“그럼요. 어찌나 성정이 고우신지, 신전과 의료원에도 기부를 많이 하신다니까요. 그 덕분에 우리 조카도 불구가 될 뻔했던 손가락을 치료받았지 뭐예요. 우리 조카는 경비 일을 한답니다.”

“……다행이네요, 정말.”

“어휴, 그럼요. 경비를 서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일어나 보니까 손가락이 잘려져 있었다나? 진짜 말도 안 되는 사고를 당했는데 애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고. 아주 난리였다니까요.”

‘음? 기억이 없다고?’

뭔가, 그럴듯한 것이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레이커스 찬사를 듣다 보니 잡힐 듯하던 상념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 예찬을 듣고 있자니 점점 더 기가 막혔다.

살인마치고 뭐 평소에 ‘저 살인마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도 없겠지마는 이렇게까지 찬사를 받고 다니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

하긴 이미지 관리를 이 정도는 해야 연쇄살인 현장에서 목격당하고도 소환 한번 안 당하는 거겠지?

심지어 마부 아주머니는 내가 리어먼드 댁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쯤 되면 그냥 신분이 높아서 칭찬해 준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다들 그의 외모에 속고 있는 걸 거야.’

그래, 반반한 그의 얼굴만 보고 있자면 나도 어디서 천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휘광이 내리쬐는 것 같고 그랬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차꾼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레이커스의 선행에 대해 칭찬하다가 나중에는 그의 완벽한 기럭지며 얼굴에 대해 한껏 칭찬하고서야 마차를 세워 주었다.

광역경시청 앞에 내려설 때는 머리가 띵한 게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인지 레이커스에 대한 고민 탓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안녕히 가십쇼!”

마부는 주겠다는 돈도 사양하고 기분 좋게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밀었던 동전을 쥐고 다시 주머니에 넣자, 상태창의 줄어들었던 돈이 다시 원래대로 늘어났다.

‘에휴, 모르겠다.’

난 레이커스의 평판 정보를 더 수집하는 걸 포기하고 일단 경시청 건물로 향했다.

온통 새파란 색으로 칠해 놓은 5층짜리 건물은 정말 쓸데없이 컸다.

입구에는 무슨 도롱뇽인지 뭔지 하는 게 그려진 깃발 하나와 손바닥에 새싹과 별을 쥐고 있는 깃발 하나가 나란히 꽂혀 있었고, 입구는 3미터는 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트리버 경감을 찾자, 그들은 나를 곧장 안내해 주었다.

아쉽게도 경감은 자리에 없었다. 말라빠진 경관 한 명이 나를 데려가더니 제자리 맞은편에 앉히고 펜을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참고인 조사만 하면 되니까, 금방 끝날 겁니다…… 이거, 그런데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으십니까?”

“……아, 네.”

경관은 내 안색을 한 번 더 살피더니 펜을 몇 번 까닥거리곤 조심스레 물었다.

“캐서 헌트 씨와 친분이 있었습니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본 게 전부예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젯밤 헌트가 앞 골목에는 왜 갔던 거죠? 그리고 혹시 골목에서 목격한 사람은 없었습니까?”

목격한 사람.

레이커스도 나와 함께 발견되었으니 그의 이름을 굳이 입에 올리는 건 소용도 없겠지.

“사람은 없었고, 어떤 괴물을 봤어요.”

“괴물이요?”

“그게 아주 거대한 거미의 형상을 한 괴물이었는데…….”

“……그날, 쓰러지셨다고는 들었습니다. 꿈이라도 꾸신 모양이군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경관에게 내가 마치 헛소리를 한다는 취급을 받으니, 그 거미가 등장했던 게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을 확인받은 것 같았다.

이래서야 경관에게서 정보를 더 캐내는 것은 무리다.

한층 성의 없어진 태도로 대충대충 대답을 이어 나가던 내 눈에 문득, 그의 책상 옆에 엉망으로 쌓인 자료 속에 놓인 사건 파일 목록이 들어왔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몽롱하던 중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를 의심하는 사람이, 이 경시청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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