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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20화 (2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20화

트리버 경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공작님 부탁이라면야 백 번이라도 더 조사할 수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뭘 조사할 게 없소.”

“그……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게 있어요.”

“음?”

“양동이에 물을 좀 준비해 주시면 돼요.”

무슨 어린애 장난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핀잔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경감은 옆에 선 경관 하나를 불러서 내가 부탁한 것을 준비시켰다.

‘의외로 순순하게 따라 주시네.’

아마 나와 공작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협조는 무리였을 거다.

‘비 오는 골목에서 보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시간에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나 봐.’

나는 쓰게 웃으며 내가 요청한 물건들이 준비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넋이 나간 헌트가의 하인이 양동이 두 개를 날랐다.

헌트가의 사람들은 어쩐지 불안한 눈으로 트리버 경감을 흘끗거렸다. 그의 얼굴을 봐서 억지로 입을 다물고 있는 눈치였다.

이미 엉망진창이 된 정원이지만 시신이 있던 자리에 갑자기 물을 붓겠다는데 반길 리는 없겠지.

“이제 어떻게 합니까?”

“아, 이걸 시신을 치운 자리에 부어 주세요.”

경감은 잠깐 시신을 치운 자리를 살펴보는 눈치였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미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버 경감이 손짓하자, 하인이 물을 쏟았다.

처마 밑이라 빗물이 닿지 않았던 자리에 흥건하게 물이 쏟아지자, 그 물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를 머금고 바닥을 적셨다.

나는 핏빛이 섞인 선홍색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슬쩍 경감의 곁에서 멀어졌다.

‘너무 많이 참견했어. 더 이상 주목을 사면 진짜 위험할 거야.’

“도대체 지금 뭐 하시는 거야? 어? 항의해야 하는 거 아냐?”

“쉿, 조용히 있어 봐.”

“하지만 갑자기 청소하는 것도 아니고…… 벌써 바짝 말라서 죽어 나가는 시체가 몇 구인데? 저 경감은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유능한 경감이라는 소문도 다 헛건가. 요즘 불안해서 밤에 잠을 못 잔다니까?”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사이에 붉은 물이 대리석 위로 흘러 나갔다.

오래지 않아 속살거리던 불평 소리가 한꺼번에 잦아들었다. 그 대신 뭔가에 매우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저게 뭐야?”

“……저게 도대체…….”

“뭔진 모르겠지만 기분 나빠…….”

나 또한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흩뿌려졌던 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의지라도 지닌 듯 어떤 선과 모양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물길이 만들어 낸 모양새는 마치 마법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캐서 헌트의 시신이 있던 자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초로 바닥에 그린 그림이야.’

이 문양이야말로 나중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지, 사건 장소마다 남겨져 있었다.

여기서는 지금 당장 발견하지 않으면 비로 인해 흔적이 지워진다. 그것도 겪어 봤지.

경감이 감탄한 얼굴로 내 쪽을 보았다. 난 너무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아서 트리버 경감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아, 이거, 저번 현장에서도 봤던 문양인데!”

경관 중 하나가 경솔하게도 내 귀에까지 들리게 중얼거렸다.

난 기운 없는 몸을 가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쨌든 단서 수집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캐서 헌트의 죽음까지 막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고개를 들어 캐서 헌트의 방이 있었을 창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트리버 경감이 조사를 지시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기껏 구석으로 숨었건만.’

난 감탄한 얼굴을 하는 그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공작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어요.”

경감은 눈을 반짝이며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알겠습니다. 늘 협조에 감사드린다고만 전해 주십시오. 이런 건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러게요.”

“아,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내일 참고인으로 출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별건 아닙니다. 방에 드나든 사람이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의자로 특정할 사람이 없어서 영 골치 아파서 말입니다. 근방에서 목격한 분이 있는지, 뭐 생각나는 게 있는지 간단하게 진술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 뭐 그런 거라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 직전에 이 근처에서 나와 공작이 함께 목격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로서도 누구보다 범인을 잡고 싶었으니 당연히 협조해야지.

“그럼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야죠.”

트리버 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안타깝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쯧쯧, 충격이 크셨나 보구만. 공작님께서도 너무하시군. 이런 험한 현장에 아가씨를 보내고 말이야. 얼굴이 새하얗소. 얼른 들어가시는 게 좋겠소.”

“아녜요. 제가 졸라서 온 건데요. 공작님께 다른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럽시다. 뭐, 연인 간의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니랬으니까요. 어이, 여기 아가씨 좀 댁으로 모셔 드려.”

그는 산타 같은 얼굴로 헛소리를 해 댔다.

나는 혼자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려다가 문득 다리가 풀썩 꺾일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어지럽긴 어지럽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몸이 안 좋은 건 사실이었다.

하루가, 아니 이 밤이 지난하게 길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방에 도착하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마자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사람이 죽었어. 그것도 내가 막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죽인 사람도 아닌데, 내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아니, 난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안 됐다. 노력이 부족했다.

이렇게까지 죄책감이 드는 건 마음속 어딘가에서, 실오라기처럼 이 게임 속 상황을 즐기고 있던 내가 있던 것을 알아서다.

‘그래, 이게 다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어느 순간에 ‘탁!’ 하고 조명이 들어오듯 이 모든 것이 꿈이 되어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

어느 정도는 방관자적인 입장이었다. 무책임했던 순간이 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한참을 울다가 겨우 진정했다.

심호흡하자 가슴이 크게 들락거리는 것도 겨우 멎었다.

세수하고 거울 앞에 섰다.

울고 나니까 조금 개운해지고, 머릿속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손을 내밀어 차가운 거울에 가져다 대었다.

‘진짜 매번 느끼지만 이런 사소한 감촉 하나하나가 소름 끼치게 현실적이라니까.’

에메랄드 빛깔의 눈이 나를 마주 보았다.

‘그래, 아르비체 그린. 어찌 된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지금의 나야.’

나는 물기가 잔뜩 섞인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을 꽉 눌러 감았다.

‘세이브, 로드 같은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으니까. 현실처럼, 아니…… 여기가 지금 내 현실이야. 정신 차리자,’

겨우 진정하고 나자 그제야 레이커스에게 생각이 미쳤다.

헌트가의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나를 마주치고 아주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 가증스러운 표정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 일대는 지금 위험합니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 봐야겠지만…….’

그가 했던 말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급한 일.’

짜증과 화가 솟구쳐 속이 뒤집어졌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돌아와서, 나와 나란히 앉아 뻔뻔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는 게.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느슨해져 있었나 봐.’

그가 나를 구해 주었을 때…… 그리고 그가 내게 총을 두 번이나 돌려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진짜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좋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그런 생각 같은 거, 다시는 하지 말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는다. 꼭 진엔딩을 보고야 만다,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 자꾸만 갈증이 났다. 나는 물을 몇 번이고 들이켜고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아침에 정신이 들었을 때, 이제는 익숙해진 시끄럽기 짝이 없는 새 지저귐과 ‘선생님’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왜 이렇게 모든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지?’

눈을 뜨자 여느 때처럼 사랑스러운 두 얼굴이 머리맡에 서 있었다.

샤인이 나를 보고 심각한 투로 말했다.

“……선생님, 울었어?”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안 울어!”

“바보야, 어른도 울어!”

“바보 아니야! 선생님은 안 울어!”

이런 게 싸울 일인가 싶지만 나도 어릴 때는 종이 인형 하나, 연필 한 자루로도 곧잘 싸우곤 했으니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나는 보기 좋게 동그란 두 머리통을 품으로 잡아당겨 폭 안았다. 내게 안겨서도 쫑알거리며 자꾸 싸우는 둘의 이마에 한 번씩 뽀뽀를 찐하게 해 주고 놓아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29/198)]

“…….”

[루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90/99)]

샤인의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에 팔을 풀고 바라보자 샤인과 루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이마 키스로 그러는 거야? 싫어요?”

샤인이 우물쭈물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아냐. 그냥, 너무 놀란 것뿐이야.”

어쩜 좋아.

‘둘 다, 도대체 어쩌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걸까?’

귀여운 아이들의 이마에 열 번씩 더 뽀뽀를 쏟아 주었다. 둘 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간지러워했고 나중에는 질렸는지 까르륵거리면서 문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따 식당에서 봐요.”

문틈 사이로 은색 금색 머리카락이 왔다 갔다 하더니 문밖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네!”

“응.”

하여간, 귀여워 죽겠다니까.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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