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9화
“……지금 뭐라고 하셨죠?”
레이커스가 눈썹을 으쓱했다.
“범인이냐고 묻는다고 범인이 ‘내가 범인이오’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워낙 그린 양이 예외적인 구석이 많아서 말이죠.”
“……기가 막히네요.”
‘지금 날 상대로 장난치나? 떠보는 건가? 아니, 도대체 얼마나 신경 줄이 뻔뻔하면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내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픽 웃었다.
“대답은 들은 거로 하죠.”
갈수록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손톱의 때만큼도 모르겠다.
“대답을 들은 거로 하겠다니…… 그게 그럴 질문인가요?”
“대신 내 총 훔친 거, 모르는 척해 줄 테니까 넘어가는 게 어때요?”
‘……이런.’
언제까지고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알아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총은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정말 눈치 하나는 쓸데없이 빠르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볼이 뜨거워졌다.
‘무슨 좀도둑이라도 된 기분이네.’
나는 소파에 놓아둔 은색의 리볼버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이나 손에 쥐고 레이커스를 겨눴던 총.
헌트가 앞에서 레이커스가 내게 총을 돌려주며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건 다시 잘 넣어 두십시오. 호신 장비 하나쯤 있는 건 좋은 일이죠.’
그걸 알면서도 내게 총을 돌려준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하다.
방금도 제 것인 줄 알면 내게서 총을 빼앗아 갈 수 있었는데 그냥 내게 준 거잖아.
누가 보면, 이렇게 살벌하고 무서운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호의처럼 보일 것 아냐.
‘몇 번이고 드는 생각이지만,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야.’
나는 잔 안의 얼음을 골라 왼쪽 볼에 물었다.
얼음의 차가운 감각이 볼 안쪽을 얼리는 감각 덕분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들었다.
‘정신 차리자, 잘생긴 사이코패스가 잘해 주는 척한다고 속을 거 없어.’
어쨌든 질문을 하나씩 주고받기로 한 거다.
내가 새 질문을 고르는 동안 레이커스는 진실게임이 뭔지 모르는지, 술을 혼자서 홀짝홀짝 마시다가 빈 잔을 다시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냉정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럼 제 차례네요.”
“그렇죠.”
“아까 만났던 그 괴물…… 그러니까, 거미 모양의 크리쳐 말이에요. 도대체…… 그런 무서운 존재가 왜 있는 거죠? 도심에…… 게다가 어떻게 한 거죠? 한 방에 슥삭 하고…….”
레이커스가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질질 끌다가 말했다.
“질문이 두 갠데. 그런 크리쳐가 왜 생기는지는 비밀이고, 어떻게 그렇게 잘 죽이는지에 대한 질문은 같은 일을 너무 많이 하면 능숙해진다고만 해 두죠. 이걸로 됐습니까?”
‘같은 일을 너무 많이 했다니…… 죽이는 것 말인가?’
등줄기가 오싹해져서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질문이야말로 역린이었을지도 몰라.’
“대답하기 곤란하면, 술을 마시는 거였나요?”
그렇게 말하며 빙글빙글 웃는 그에게 난 고개를 저었다.
“이 대답이면 됐어요. 더 물어보실 게 있으세요?”
“그럼요.”
“……뭐죠?”
레이커스가 그 신비로운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결국, 헌트가 앞에는 왜 갔던 거죠?”
그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자꾸만 입장이 바뀐 질문뿐이잖아. 무슨 생각인 거야?’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는데, 문득 그 정적 사이로 경관들의 고함이 들렸다.
“살인 사건이다! 에잇, 누가 이렇게 길을 막아 놓은 거야! 길을 비켜! 살인 사건이다!”
“살인 사건이다! 거기, 마차 비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의 레이커스를 보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혹시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고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경찰들이 캐서 헌트의 시체를 발견한 거야. 원작 그대로…….’
확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서 중얼거렸다.
“아, 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실례할게요.”
“이런 시간에 말입니까?”
“네.”
“하지만…….”
레이커스가 내 등에 대고 뭔가를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를 그대로 지나쳐서 응접실을 나왔다.
그러곤 정신없이 계단을 날듯이 뛰어 내려가 현관문을 지났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에, 조명이 밝지 않은 마차 길은 어둑어둑했다.
나가 보니 집안의 온 식솔들이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경관들의 목소리가 워낙 컸거니와, 최근 살인 사건에 대해서 모두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탓일 거다.
그중에는 앰버도 보였다. 그녀는 내가 다가서자 울상을 하고 날 돌아봤다.
“아르비체 님, 어쩜 좋아요!”
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래?”
“캐서 헌트 님이 변고를 당하셨다나 봐요, 글쎄.”
떨리는 목소리가 내뱉는 말이 둔기처럼 나를 때렸다.
정확히 그대로 일어났다.
그렇겠지.
지금까지 내가 본 인물들이 모두 여기에 있고, 내가 본 건물들을 배경으로 보았던 사건들이 차례로 일어났으니까. 이것도 어떻게 바뀌지 않았겠지.
헌트가 저택의 앞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를 맞으며 서 있던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가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그와 함께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형체를 띠고 있던 크리쳐의 모습도.
그저 말 한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처음 게임에 들어와서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참혹한 심경이었다.
플레이어로서 캐서의 사건을 통보받았을 때는, 탐정 사무실에 온 편지를 조회하는 게 다였다. 이번처럼 그녀와 얘기를 해 본 적 따윈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다.
붉은 머리에 웃는 미소가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생각났다.
몇 시간 전에 방문했던 헌트가는 그 짧은 사이에 많은 인파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번의 사건 현장과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을 매단 것이 아니었다.
추락사였다.
떨어진 시체는 마차를 대는 쪽의 정원으로 떨어졌는데, 거대한 대리석을 여럿 깔아 둔 위에 정확히 떨어져 흰 바닥과 붉은 피가 아주 대조적으로 보였다.
더 이상한 건 그녀의 시체 또한 DAY 1에 봤던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 건조한 미라처럼 바싹 말라 있다는 점이었다.
그 바짝 마른 시체 주변에는 피 웅덩이가 있었다.
흰 천으로 덮어 둔 시체 주변에는 잔뜩 굳은 인상의 경관들이 지키고 서 있었고, 헌트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조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천으로 덮여 있는 시체가 어떤 상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등에 칼이 꽂힌 채라는 걸.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증언하겠지, 캐서의 방에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고.
“어휴, 이번에도 같은 범인이래요?”
“모르겠어요. 저번의 범인은 잡혔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야. 아직 안 잡혔다니까? 틀림없이 그 신문 배달부가 범인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방에 들어간 사람이 없다면서요.”
“그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에 버티고 서 있자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때 새까만 마차 한 대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바퀴가 아주 크고,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마차였다.
경관 두 명이 지휘해서 사람들을 비키도록 유도했고, 나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눈앞을 지나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비켜요, 비켜!”
아.
순간 그 마차가 뭔지 기억났다. 게임 내에서 하도 자주 봐서 그리 큰 감흥이 없었는데, 저건 시신을 운구하는 마차였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아니, 설마 지금 당장 시신을 옮기려고? 안 돼. 시신에 남은 증거도 사라질 테고, 비라도 내리면 여기 정원에 남아 있는 증거는 그대로 끝장이다.
하긴 과학 수사랄 것도 없는 시대다.
루미놀 반응 검사를 하겠어, 아니면 지문을 뜨겠어? 대충 정황 증거를 수집하는 데 오래 걸릴 필요도 없겠지.
사망한 캐릭터의 생전 기억을 보는 ‘부검’이라는 이벤트가 있긴 한데, 그건 한참 더 진행된 후에야 개방되는 이벤트니까 지금 시점에서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다급히 눈을 굴려 트리버 경감을 찾았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코가 새빨간 산타 같은 양반이 뒷짐을 지고 현장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너무 주목을 사는 것도 달갑지 않지만, 캐서 헌트의 죽음이 이런 식으로 헛되게 지나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경감님,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다가가자, 그는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아가씨로군요. 수첩은 잘 전달해 드렸습니까?”
“……그럼요!”
경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 몸을 살짝 숙였다.
나를 의심이라도 하는 걸까 싶어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두 분께서 그렇게 친한 사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분들께는 제가 본 건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
콧잔등을 찡긋하며 다 알고 있다는 듯 신호를 보내는 그를 보니 기가 막혔다.
레이커스와 함께 으슥한 골목에서 비를 맞고 있었던 걸 보고, 무슨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게 틀림없었다.
밀회나 그런 게 아니었다고!
난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을 내저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음?”
“저 캐서 헌트의 시신이 놓인 곳…… 자세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요.”
경감은 그저 일반인에 불과한 내가 수사에 참견하겠다는 듯 굴자 불쾌한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툴툴거리듯 물어 왔다.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거요?”
“마, 맞아요.”
거짓말은 어째서 해도 해도 안 늘까. 나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