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8화
시스템 에러라는 건 이 게임 속 세상에 꽤 적응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도 처음 보는 방식의 메시지였다.
“기억 삭제라니…… 그게 뭔데?”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간 순간, 피곤한 듯 제 얼굴을 쓸며 내 손에서 총을 뺏으려던 레이커스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날렵하고 수려하게 생긴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고,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총을 놓지 않고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 자체가 아주 놀라운 일이라는 것처럼. 마치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라도 본 것처럼.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네?”
“지금…… 뭐라고 했냐고 물었습니다.”
왜 저렇게 진지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말을 했다고.
‘나를 죽이려 들었다가, 또 나를 달래듯 굴던 방금의 레이커스를 떠올려 보면, 아무튼 그는 정상이 아니니까 이해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지.’
뭐라고 하는 게 사이코패스를 덜 자극할 수 있는 말일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내 어깨를 붙들고 채근하듯 시선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기억하는 겁니까? 방금 일.”
어지간히 당황한 듯한 그의 얼굴이 눈앞 가까이 다가온 것은 심미적으로는 행복한 일이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숨 막히는 일이었다.
나는 긴장되어 팔딱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총을 고쳐 쥐었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제가…… 까딱하다간 죽을 뻔한 일을 잊어야 하나요?”
레이커스의 잿빛 눈에 감도는 감정들을 내가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속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 청량한 기운을 머금은 그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스쳐 지나는 놀람, 당황에 이어 서서히 스며드는 흥미를 엿보았다.
꽤 오랜 침묵 끝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레이커스가 사냥감을 노려보는 고양이처럼 나를 아주 집요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삭제.]
뒤이어 같은 오류 메시지가 한 번 더 떴다.
레이커스는 내 눈빛을 살피더니 그답지 않게 입까지 딱 벌리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정말로 안 먹히는 모양이군요.”
‘뭐라는 거야?’
나는 이제 대화조차 성립하지 않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 그를 보면서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래서 계속 내 손아귀에서 총을 빼앗으려 하는 그의 손길에 총을 내주었다.
하지만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총을 쥔 모양 그대로 한동안 펴지지 않았다.
레이커스는 총을 빼앗아 든 뒤, 그것의 손잡이를 내 쪽으로 오게 해서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이걸로 두 번째.’
그가 내게 총을 돌려주는 게.
당최 이해할 수 없고, 굴욕적이기만 한 그의 손을 가만히 쏘아보다가 총을 받아 들자, 레이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린 양이 흥미롭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나요?”
“……네?”
“그 말, 철회해야겠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얼마든지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려 주는데, 레이커스가 느릿하게 말을 덧붙였다.
“흥미롭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소린데?’
내가 똥 씹은 표정이라도 했을까. 혹은 두려워하는 얼굴이라도 했을까?
그는 내 표정의 어디에서 재미를 발견했는지 한동안 나를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당겼다. 평소에 거의 안 보이던 보조개까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살인마의 해사한 웃음은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뭔가, 단서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서?’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1/396)]
그리고 알림창이 하나 뜨더니,
[호감도 이벤트 – 숨바꼭질 개방]
[호감도 이벤트 – 서커스 개방]
[호감도 이벤트 – 왕실 연회 개방]
[호감도 이벤트 – 사냥 개방]
[호감도 이벤트 – 고급 부띠끄 개방]
다섯 가지 알림창이 연이어 주르륵 떴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이벤트 루트가 한꺼번에 개방된 건 처음이었다.
난 깜짝 놀라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그가 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책장 앞에서 슬쩍 한 걸음 물러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그러곤 소파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이야기를 좀 나누시죠.”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총과 넓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응접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방금 막 날 죽이려 했던 레이커스와 단둘이 남아 있는 것은 정말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좋아요.”
나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지쳐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레이커스는 사람을 부르는 대신 응접실 한구석에 놓인 미니바에서 컵 두 개와 얼음이 든 바스켓, 독해 보이는 술이 든 병 하나를 가져왔다.
“브랜디입니다. 몸이 좀 따뜻해질 겁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데.’
하지만 나는 내 앞에 조르륵 따라진 술을 사양하지 않고 손에 들었다. 크리스털 잔 안에서 얕게 찰랑거리는 주황색 액체는 보기보다 훨씬 달콤한 향이 났다.
레이커스가 먼저 술을 입에 털어 넣는 것을 보고 내 몫을 입에 머금어 봤다.
입 안에 포도 향이 기분 좋게 감돌았다.
향이 좋아서 그런지, 먹어 본 적 없는 술인데도 목으로 잘 넘어갔다.
“독하지만 먹을 만하네요.”
탁.
깔끔하게 빈 잔을 앞에 내려놓자, 그가 마치 날 걱정이라도 하듯 얼음을 잔에 먼저 채운 뒤 손톱만큼의 브랜디를 따라 주었다.
“그래서, 하자는 이야기가 뭔데요?”
레이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그린 양도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닙니까? 여기, 그린 양의 방에서 아주 멀 텐데.”
난 뜨끔해서 시선을 떨구었다.
‘저 살인마는 어쩜 손마저 완벽한 건지.’
얼음이 달각거리는 술잔을 쥔 레이커스의 손은 길고 마디가 굵었다. 언제까지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처럼, 한숨이 나오게 잘생긴 손이다.
짜증스레 시선을 떼어 내고 고개를 들자, 아직 나를 직시하고 있던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서로 궁금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번갈아서 물어보죠. 어떻습니까?”
레이커스의 제안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시간에 그의 방 주변을 서성였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의문을 품고 있다는 데 다다른 것을 보면 내가 그간 보인 날 선 태도에서 뭔가를 눈치챘던 걸지도 모른다.
‘하긴 그게 아니더라도, 직전에 본 그의 모습만으로도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생기긴 했지.’
다만, 내게 물어볼 기회를 준다는 건 그만큼 그도 내게서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은 물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기껏 얻어 낸 안정적이고 보수가 높은 직장과 내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에 땀이 옅게 배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요. 진실게임을 하자는 거죠?”
“그게…… 뭡니까?”
“서로 질문을 하고, 대답하기 곤란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거예요. 잔을 깨끗하게 비우는 게 벌칙인 거죠.”
“뭐든 좋습니다. 그린 양이 먼저 물어보시죠.”
레이커스는 술이 콩알만큼 들어 있는 내 잔과 크리스털 잔 가득 술이 담긴 그의 잔을 번갈아 보고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우선, 방금 제가 봤던 모습이요.”
“네.”
“지금…… 절 죽이려고 하신 뒤에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사이코패스에게 너 왜 미쳤냐고 물어보는 게 잘하는 짓은 아니지.
하지만 그걸 묻지 않으면, 이 저택 안에 있는 동안 또 언제 살해위협에 노출될지 모르잖아.
레이커스는 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사과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아주 강단 있게 대처해 주신 것에는 감사드리고요.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죽일 뻔했으니까요.”
‘그게 지금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기가 막혀서 그를 쏘아보자 레이커스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허망함이 섞인 눈빛을 보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결정적인 부분의 이야기는, 사정이 있어서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헌트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상태가 좀 안 좋았다는 것만 우선 밝혀 두죠.”
“상태가 안 좋으면 사람을 죽이나요?”
“뭐, 미수에 그치지 않았습니까?”
‘미수에 그치지 않았으면, 죽였을 거 아냐?’
기가 막혀서 그를 재차 쏘아보는데, 레이커스는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오갈 곳을 잃어버린 것처럼.
눈썹 끝이 축 늘어진 그 표정은 너무나 그답지 않은 것이다.
정말, 미에 대한 본능적인 찬사가 너무 싫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 마음속 깊이 뉘우치는 무해한 피해자처럼 보인단 말이지.’
난 짜증 나서 말을 돌렸다.
“……헌트가에는 왜 가신 건데요?”
그의 표정이 다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뻔뻔하고 유들유들한 표정을 보자, 마음속 한편에서 안심이 피어나는 스스로가 짜증 났다.
“질문은 번갈아 가며 하나씩, 아니었나요?”
‘결국 제대로 된 대답도 해 주지 않은 주제에.’
나는 짜증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는 달리 나는 딱히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숨겨야 할 것도 없다.
뭐든 물어보라지.
“궁금한 게 뭔데요?”
레이커스가 손안에서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당신.”
“네?”
“범인입니까?”
‘뭐?’
너무 황당해서,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