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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7화 (17/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7화

난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안에서 축 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뒤늦게 이 빗속에 그 어두운 골목까지 갔던 이유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서 캐서 헌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레이커스를 현장에서 딱 마주쳤을 때,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총을 들고 갔는데 써 보지도 못했다.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해…….’

따뜻한 물을 두 손으로 퍼 올려서 바라보자 아주 흐릿하게 에메랄드빛이 반사되어 일렁거렸다.

그럴 때가 아닌 줄 아는데, 물을 몇 번이고 퍼 올려 세수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한숨과 함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떤 이유가 눈물을 낳건, 눈물은 가라앉아 있던 내면의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낸다.

‘이딴 공포 게임 속에서 대체 언제까지 살아야 한단 말이야…….’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막막함 같은.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들은 소리가 정말 레이커스가 돌아온 소리였다면, 지금 그를 만나야겠어.’

나는 후다닥 목욕을 마치고 나와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창에 바짝 붙어 서서 마구간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직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시야가 그리 탁 트이진 않았지만, 어른어른한 그림자만 봐서는 레이커스가 타고 나갔던 말이 돌아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사건 수첩을 꺼내 넘겨 보고 정보도 조회해 보았지만, 아직 ‘아르비체 그린’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갑작스레 죽음이 예정되지도 않았고, 거처가 바뀌지도 않았다.

나는 비가 때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일단, 레이커스를 찾아가자.’

내가 먼저 선수를 쳐 그를 찾아가지 않으면, 그가 언제고 나를 추궁하려 들 테니까. 내가 거기에 왜 갔으며 총은 왜 가지고 있었는지.

모처럼 이 저택에 남을 수 있게 되었고, 사용인들과도 조금쯤 친해졌고, 봉급까지 조율된 판이었다. 인제 와서 쫓겨나고 싶지도, 살해당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안정적인 지금 상황을 유지하려면 해명은 필수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레이커스가 나를 당장 죽이지 않을 거야.’

당장 죽일 거라면, 더 죽이기 좋은 곳이 있었잖아.

어째서 날 살려 두는지 모르겠지만, 얼마간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거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몇 가지 것들을.

‘그가 말하는 일감이 뭔지, 그 거미는 대체 뭐고, 레이커스는 왜 그런 것에 하나도 놀라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도…….’

방을 나서려던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총을 챙겨들었다.

이젠 아이템이 있다고 해서 잘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은 없어졌지만, 없는 것보다는 든든할 것 같아서.

원피스의 허리선에 있는 벙벙한 주머니에 총을 밀어 넣은 뒤 방을 나섰다.

하지만 결심이 빨랐던 데 비해서 레이커스의 방으로 가는 발걸음은 아주 느렸다.

‘이론상으론 그가 당장 죽이지 않을 걸 알아도, 무서워 죽겠는 걸 어떻게 해.’

나는 아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레이커스의 방문 옆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문득 태피스트리 형태의 큰 시계를 보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1시가 넘었어. 너무 늦었잖아.’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큰 용기를 낸 보람도 없이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일단 방에 가서 쉬고…… 내일 생각하자.’

그렇게 다짐하고 발을 돌리는 순간.

와장창-! 쨍그랑!

요란하게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같은 것이 방 안에서 들려왔다.

“……하아. 하…….”

어딘가 헐떡거리는 신음 같은 것도 들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커스의 방문은 언제나와 달리 조금쯤 열려 있었다. 그 문틈으로 들리는 소리임이 틀림없다.

‘어딜 다치기라도 했나?’

아니, 그럴 리가. 그의 절대적인 강함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건 마치 같은 몬스터를 아주 많이 반복해서 잡아 봐서 숙련된 플레이어처럼, 게임을 켠 김에 보스까지 한 번에 본다는 소위 ‘켠왕’도 손쉽게 시도하는 그런 플레이어처럼 보였다.

내가 떠올린 말을 스스로 부정하며 무심코 문틈 사이를 바라보는 순간,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커스의 인영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뭐야, 지금 쓰러진 거야?’

망설임은 아주 잠깐이었다.

문을 열자, 정말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긴 몸이 보였다. 레이커스는 소파도 아닌 바닥 러그 위에 쓰러져 있었다.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살인마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까?

하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공작님, 공작님! 괜찮아요?”

대답은 없었다.

사람을 부르러 일어나던 나는 잠깐 멈칫했다.

아주 잠깐 어떤 유혹이 속삭였다. 이대로 그를 아픈 채로 내버려 둔다면, 혹시 앞으로의 살인들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

그 순간 문득 그의 숨을 체크해 보려 올린 손에, 축축하게 젖은 옷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내게 뭔가를 걸쳐 줬다.

‘제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준 것이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홀딱 젖은 건가?’

이타적인 살인마라니…… 대체 이해가 안 된다.

‘그냥 이대로 두면?’

나는 내가 떠올린, 어쩌면 살인마만큼이나 악한 생각을 겨우 떨쳐 내고 사람을 부르러 몸을 일으켰다.

문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끼쳤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을 향해 내질러진 뭔가가 볼 옆으로 훅 스쳐 지나갔다.

쐐액!

‘방금 뭘 본 거지? 주먹? 주먹이었나? 검은 비늘 같은 것을 본 것 같은데.’

뒤돌아본 나는 그대로 굳었다.

몸을 돌려 마주한 것은 비틀거리며 서 있는 레이커스였다.

‘아니, 레이커스가 맞나?’

얼굴에는 검은 비늘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고, 손에도 큼직한 상어 비늘 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언제나 보던 차분하고 아름다운 은빛의 눈이 아니라 먹이라도 푼 것 같은 검디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 눈동자 속의 공허는 어디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게 대체.”

그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대뜸 손을 뻗어 내 몸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거칠게 책장에 팽개치듯 부딪힌 등이 지독하게 아팠다.

“……큭.”

밀쳐 내려고 쥔 그의 왼팔에 순간 무슨 갑각류의 껍질 같은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의 시커먼 눈이 나를 찾아내는 바람에 그런 생각 따위 이내 잊어버렸다.

오싹한 공포가 등줄기를 따라 내달렸다.

‘젠장, 그의 방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캐서 헌트의 집 앞에서 어째서인지 날 살려 보내더니, 여기서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면 누가 와 줄지도 모르겠지만, 그전에 죽을 거다.

‘어떻게 하지?’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핑핑 도는 중에 어쩌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총이라도 지금 들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아이템 창이 열렸다.

[아이템 : 6연발 권총. 전용 총알 6개. 사용법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설명 옆에 나타난 총 모양으로 손을 뻗자, 차가운 감촉이 곧장 느껴졌다.

그게 그렇게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짜증이 났다.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고 다닐 수 있다니. 진짜 이런 건 미리 알려 줘라, 제발.’

난 리볼버의 손잡이를 고쳐 쥐자마자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그에게 내밀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순식간에 그 행동을 해치울 수 있었다.

때를 맞춰 레이커스가 내 목을 낚아챘다.

당장이라도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강한 악력에 나는 총을 그의 관자놀이에 들이밀며 나지막하게 을렀다.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 레이커스. 내가 죽더라도 네 머리통에 구멍을 내 버릴 테니까.”

알아들은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날 죽일 듯 굴던 그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틀림없었다.

내 목을 죈 손이 살짝 헐렁해졌다. 게다가 까맣게만 보이던 그의 눈동자에 검은 막이 살짝 걷히는 것 같았다.

‘지금, 눈빛이 조금 돌아온 것 같은데?’

하지만 여전히 내 목을 쥔 그는 완전히 제정신을 차린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쩌지? 증거도 다 확보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여 버릴 수도 없잖아.’

그랬다간 틀림없이 내가 감옥에 갇히는 끔찍한 엔딩으로 치달을 텐데.

나는 덜덜 떨리는 왼손을 들어 그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잘생긴 얼굴의 한쪽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데,

[레이커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70/297)]

띠랑- 하는 작은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지금? 이 순간에?

저기요,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뺨을 때렸는데요?

“하아…….”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그가 비틀거렸다. 그러곤 물에 젖은 개처럼 머리를 양옆으로 가볍게 흔들더니, 얼굴을 몇 번이고 큰 손으로 쓸며 눈을 계속 깜박거렸다.

나는 총을 든 손을 덜덜 떨며 물끄러미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눈에 들어온 건 아까와 달리 아주 깨끗한 그의 팔과 손이었다.

아깐 검게 보인 것 같았는데. 정말 정신없어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이거…… 까딱하다간 죽을 뻔했습니다.”

나른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저거다.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거야? 아니면, 지금부터 죽이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조금 진정됐는지 레이커스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나를 바라봤다. 아까 그 미치광이처럼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아르비체가 익히 알고 있는 매혹적인 잿빛 눈이었다. 그는 아주 느리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정말 잘생기긴 했다. 새하얗고 처연한 얼굴에 입술에 피가 터져서 관능적이기까지.

이 매우 급한 와중에도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다가 그의 눈이 나를 내려다본다는 것을 깨닫고는 몸을 굳혔다.

숨을 쉬면 숨결이 닿을 거리에 서 있던 그가 슬쩍 한 걸음 물러나며 내 손을 감싸 쥐곤 손에 든 총을 빼내려 했다.

“뭐 하는 거죠?”

“이제 괜찮습니다. 실례를 범하긴 했지만, 당분간은 또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믿으면 멍청이지.’

그를 그저 노려만 보고 있자, 레이커스가 웃으며 내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이건…… 잊는 게 좋겠군요.”

그가 빙그레 웃더니 어딘가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억 삭제.]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들리는 것 같은 기묘한 말이었다.

순간, 호감도 같은 메시지들이 뜨곤 하는 왼쪽 아래의 알림창에 메시지들이 연달아 표시되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가 아르비체 그린에게 삭제 기능을 사용했습니다.

대상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기능입니다.

:: SYSTEM E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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