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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6화 (16/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6화

“비 오는 날은 싫은데, 일감까지 많군.”

그 순간,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지만 짜증 난다는 말투가 들렸다.

‘무, 무서워…….’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말투에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가누며 어떻게든 다시 눈을 떴다.

“꺄악!”

언제 내 앞으로 이동했는지, 기괴한 크리쳐와 내 사이에 레이커스의 등이 보였다.

‘이상해……. 괴물과 살인마가 눈앞에 있을 뿐인데, 이 사람의 등을 보니 조금쯤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다니…….’

크리쳐가 우리 쪽으로 한 걸음(?)을 더 다가온 덕분에 그 기괴한 형상이 더욱더 잘 보였다.

가스등의 빛에 희번덕거리는 주먹만 한 여덟 개의 새까만 눈동자, 기이하게 얇고 긴 여덟 개의 다리,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이식되듯 붙어 있는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인간의 얼굴과 상체.

그 거미를 닮은 크리쳐는 레이커스와 나를 목표로 삼았는지, 우리를 향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인간은 절대 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얼굴이 마치 반으로 갈라져 위아래로 열리듯 거대하게 쫙 벌어져 있었다. 거기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기괴한 형상의 크리쳐라면 공포 게임의 단골 메뉴다.

‘<살인자들의 밤>에도 분명 크리쳐들이 나왔지만, 그걸 내가 직접 볼 줄이야.’

그것을 직접 눈앞에서 대면하는 감각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공포와 충격이었다.

‘현대에서는 기껏해야 사파리 체험밖에 안 해 봤단 말이야!’

크리쳐의 기괴한 눈이 내 쪽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팔딱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 거미가 훌쩍 도약했다.

놈은 그 거대한 덩치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안 돼!’

죽는다.

그런 확신이 드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골목을 가득 채운 어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광이 눈앞에 번뜩였다.

후두둑. 쿵. 쿵.

묵직한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

따뜻한 뭔가가 내 몸에 튀는, 아주 차가운 빗줄기와는 다른 어떤 감각.

코앞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도저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서 나는 한참 눈을 깜박였다.

나와 레이커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대신에,

“괜찮습니까?”

하고 여상한 물음과 함께 레이커스는 나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의 손에는 도대체 어디에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사람 키만 한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검이라기보다는 아주 검고 긴 비늘처럼 반들거려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레이커스가 검을 손안에 넣듯이 갈무리했다. 눈을 깜박이고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 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비켜선 그의 어깨 너머로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하고 있는 거미의 사체가 보였다.

‘……세상에. 저걸 지금 한 방에 잡은 거야?’

게임에는 어느 게임에나 통용되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다.

척 보기에도 기괴한 아름다운이 느껴지는, 꼼꼼하게 디자인된 데다가 사이즈까지 크다면 그건 아주 강력한 몬스터라는 뜻이다.

아무리 숙련자라도 한 방에 잡을 수는 없다.

오히려 바닥에 펼쳐지는 공격 범위, 소위 말하는 ‘장판’을 피하지 못하거나 크리쳐의 공격 패턴을 숙지하지 못하거나 방심한다면 플레이어 쪽이 한 방에 당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레이커스는 내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그 짧은 사이에 몬스터를 쓰러뜨렸다.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어.’

“……도대체 어떻게.”

내가 덜덜 떨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가 혀를 차며 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레이커스의 은빛 눈동자에 한 줌의 긴장감이나 안도감이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 뭐야?’

살인마라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너무 추웠고, 모든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되질 않았고,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노출된 뒤였다.

나는 생각을 더 이어 나갈 수도 없을 만큼 지쳤다. 순간 다리가 꺾여 몸이 휘청였다.

탁.

내 몸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대신 단단한 품에 갇혔다.

‘레이커스가 나를 왜…….’

하지만 그가 나를 안아드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거절할 기력 같은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쯧.”

레이커스는 나를 완전히 품에 감싸 안은 채로 혀를 차더니 나에게 뭔가 따뜻한 모포 같은 것을 둘러 주었다.

비가 내리는 와중인데도 몸이 한결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많이 놀란 것 같군요.”

그리고 이어지는 다정한 음성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갈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몬스터로부터 나를 지켜 주고, 나를 달래듯 말하다니.

‘다음 중 살인마가 할 올바른 행동을 고르시오, 라는 문제가 있다면 말이야. 살인, 폭력, 상해 같은 온갖 보기는 정답이 되겠지만 이건 아니잖아.’

제 먹잇감을 빼앗기긴 싫다거나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다. 그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아주 많았다.

‘알리바이를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걸까?’

갖은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어떤 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눈이 부셔 찡그리며 돌아보자 묵직한 부츠 소리와 함께 경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옷 차림의 경관들 한가운데에 선 트리버 루악 경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거, 누구신가 했습니다.”

“늦은 밤에도 순찰을 도시는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경감과 살인마가 사이좋게 인사를 주고받는 광경이라니, 정말 흐뭇하기 짝이 없군.’

비딱한 생각을 하는 동안, 트리버 경감은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이거, 두 분께서 이렇게 사이가 좋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비 오는 날까지 데이트를 하실 정도라니.”

데이트……?

‘방금 우리를 습격했던 그 거미의 사체를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한다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질려 바닥을 돌아보는데, 좁은 골목의 바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덟 개의 눈을 가진, 질리도록 괴상하게 생긴 그 거미의 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데, 레이커스가 아직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린 양을 집까지 호송해 주겠습니까? 몸이 아무래도 좋지 않은 듯한데.”

“아, 그러면 병원에라도 데려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놀란 것 같으니까요. 제가 급한 볼일이 있어 함께 갈 수가 없으니, 좀 부탁드립니다.”

“허허, 어려운 일도 아닌데 무슨 부탁씩이나 하십니까.”

내 신병은 그렇게 경관들에게 간단히 인도되었다.

경관 중 한 명이 나를 둘러업는 것을 본 레이커스가 곧 경감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지는 것이 흐려지는 시야 한구석으로 보였다.

갑작스러운 긴장이 풀리자, 이상할 정도로 잠이 몰려왔다.

‘캐서 헌트의 집 앞까지 왔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하지만 생전 겪어 본 적 없던 종류의 공포를 연속해서 겪은 밤이다.

레이커스를 갑자기 맞닥뜨린 것도, 거대한 크리쳐를 만난 것도 내가 쉽사리 견뎌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지 정신은 속절없이 빠르게 아득해져만 갔다.

경감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레이커스의 희미한 목소리를 들은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리어먼드 공작가에 도착해 있었다.

공작저 현관문 앞에서 나를 업은 경관이 블리에 씨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를 어렴풋하게 듣다가 정신이 들었다.

“……캐서 씨는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에 블리에 씨가 눈을 깜박였다.

“네?”

“……아니에요.”

“세상에, 안쓰럽게도.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어디까지 나가셨던 거예요?”

블리에 씨는 내가 열이라도 올라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혀를 끌끌 차더니 하녀들에게 목욕물을 가져오라 지시했고, 하인에겐 나를 업어서 방까지 옮겨 줄 것을 청했다.

우비를 벗자, 정말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날 만큼의 오한이 끼쳐 들었다.

따뜻한 담요를 둘러싸고 따뜻한 물이 준비되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에도 머리가 자꾸만 지끈거렸다.

게임 속이라지만 내가 직접 만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스토리상 이 도심 속에 등장한 적도 없는 그 기괴한 크리쳐를 만났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게임 속에 그런 크리쳐가 얼마나 있을까? 아까처럼 도심 속을 막 돌아다니는 걸까?’

그런 기괴한 크리쳐를 권총 같은 것으로 상대하겠다는 건 어림도 없는 생각이리라.

그런 존재를 또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과연 도망은 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래 스토리에서 크리쳐가 출현하는 이벤트 같은 건 아주 후반부에나 있었는데. 그것도 여행을 떠날 때만 만났고.’

이런 도심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건 그 크리쳐를 만나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던 레이커스다.

심지어는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크리쳐를 사냥하기까지 했지.

‘이제 레이커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크리쳐의 존재보다도 레이커스가 나를 지켜 주었다는 것이 더 경악스러웠다.

‘자꾸 레이커스에게 고맙다고 느끼는 것도 싫고, 그에게 한순간이나마 의지했다는 것도 싫어.’

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거지?

범죄자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항상 범죄자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곤 하잖아.

그냥 그런 걸 거다.

‘사이코패스나 살인마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일 테고…… 이해할 필요도 없어.’

그가 식사 자리마다 얼굴을 내밀며 아이들을 아주 아끼는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다과회에서 나를 감싸듯 말을 해 주었다고 해도, 크리쳐로부터 날 구해 주었다고 해도.

그것들은 별 의미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냥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게 맞다.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게 맞아.’

하지만 한참을 심호흡하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보아도 나는 뇌리를 빙빙 도는 공포와 의문들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달그락.

그때, 문득 어디선가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이렇게 늦은 밤중에……? 레이커스가 돌아온 걸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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