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5화
아, 미쳤다. 기절한다.
인형처럼 귀여운 꼬맹이 여자아이에게 그런 선언을 듣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아 버린 나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샤인도 내 품에 안긴 루나를 보더니 팔짱을 끼고 말했다.
“리어먼드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우리 옆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나는 픽 웃었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음, 글쎄.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지. 여기가 제일 위험할 수도 있지 않겠니? 리어먼드 가문에 살인마가 있다면 말이야.
저만 믿으라는 듯 새침하게 턱을 들어 보이는 샤인이 귀여웠다. 나는 팔을 뻗어 얼른 샤인도 품으로 끌어들였다.
“이 귀염둥이들, 대체 어느 선생님네 귀염둥이지요? 응?”
“알비 선생님네!”
아르비체라는 발음이 어려운지 루나는 이제 나를 알비라고 불렀다.
“아고, 대답도 잘해요.”
나는 리볼버니 까마귀가 그려진 편지니 하는 고민거리들을 순간이나마 모두 잊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의 나는 지독히 외롭고 불행했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온전히 믿음을 받는다는 게, 나를 향한 의심할 필요 없는 호감과 사랑을 받는다는 게 게임 속임에도 이렇게나 행복했다.
그런데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의 나……?
게임을 하면서 몇 날 며칠을 보낸 기억은 있다.
‘그런데 정확히 내가 뭘 하다가 잠들었지? 아니, 마지막 기억이 뭐지?’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동화책의 첫 장을 펴다가 머리의 뒤쪽에서 강한 통증을 느꼈다.
“……윽.”
“선생님, 괜찮아?”
그 목소리에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억지로 불빛을 비춰 본 듯 부옇게만 떠오르는 기억들을 떨쳐 내자, 간신히 두통이 멎었다.
루나와 샤인이 걱정스레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보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너무 반복적인 일상은 잘 기억나지 않게 마련이니까. 그냥 그뿐일 거야.
나는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떠밀리듯 얼른 동화책을 폈다.
공포 게임 속 동화책 특유의 잔인해 보이는 일러스트를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책을 고쳐 잡으며 난 천천히 첫 문장을 읽어 내렸다.
결국, 밤은 찾아왔다.
이르게 잠든 척하려고 방에 돌아온 뒤로 내내 불을 끄고 있던 나는, 밤이 깊어지는 것을 보고서는 창에 붙어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건 수첩을 자꾸 들춰 보아도 캐서 헌트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바뀐 내용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희미한 가스등이 밝혀진 빗속의 정원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는데, 문득 희끄무레한 인영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아주 수려한 그 실루엣만 보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예상한 대로다.
‘비까지 맞으며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거겠지. 살인마 새끼…….’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쏘아보았다. 아니, 빗방울이 달라붙어 흘러내리는 창문에 비치는 나를 바라보았다.
긴 녹색 머리, 에메랄드색의 눈, 가정 교사 특유의 단정한 옷차림새.
아직도 현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캐릭터로 살았던 며칠 동안 점점 더 든 확신은, 그렇다고 해서 이 반복되는 일상이 단순히 꿈일 리는 없다는 것.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 세계든, 이곳 또한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
그래서 더더욱 첫 번째 날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순간은 지나치게 현실 같았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써야 할 정도로 캐서 헌트와 어떤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루나와 샤인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나를 지켜 주겠다고 말하는, 그 무해한 아이들의 모습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마냥 수수방관하더라도 나는 괜찮을까? 어떤 일이 있고 나서…… 내가 그 아이들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아, 몰라.’
모르겠다.
‘아아아아. 그냥 내 안위만 생각하고 싶은데.’
빌어먹을.
나는 내 머리를 한껏 헝클어트리고선 옷장에서 봐 두었던 비옷을 챙기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손바닥만 한 총을 집어 들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총집을 상의 아래 허릿단에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고는 방을 나섰다.
늦은 시간이라 1층까지 가는 길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현관에서 보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곧장 캐서의 집으로 향했다.
캐서 헌트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시간까지 똑똑히 기억했다. 밤 10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발걸음을 재촉해 부지런히 걷자 30분 남짓 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가끔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빗소리로 가득한 밤의 골목은 적막하고 어두웠다.
‘으, 너무 무서워.’
비옷의 후드를 푹 눌러쓴 채 골목에 몸을 숨겼다. 범인이 그 집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현관이 잘 보이는 쪽이었다.
후두두둑. 후두둑.
아무리 비옷을 입고 있다지만 연신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체온이 조금씩 떨어져서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추위보다는 초조함과 두려움에 이가 절로 딱딱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허리춤을 슬쩍 만져 보았다. 매끈한 금속의 감촉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정말 이런 아이템 하나로 레이커스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스스로도 들지 않았다.
‘정말 어쩌자고 온 건지.’
다만 그냥 방구석에 앉아서 이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고만 있다간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한 후회가 점점 머리를 지배해 갔다.
‘방금 뭐지?’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문득 옆으로 그림자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총을 손으로 꽉 움켜쥐고 옆을 돌아봤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빗방울? 고양이? 아니, 사람인가?’
머리털이 쭈뼛 섰다.
벽 쪽으로 몸을 더 바짝 붙이며 뒤를 한번 휙 돌아봤다가 앞을 보는데, 그제야 누군가의 인영이 앞에 선 것이 보였다.
발견이 늦었다.
반사적으로 총의 잠금장치를 풀며 조준했지만, 상대는 능숙하게 내 총구를 쳐 내어 조준을 흐트러뜨렸다. 그러곤 다시 재조준할 새도 없이 상대의 발이 나를 걸어 넘어뜨렸다.
악력이 강한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붙들고 짐승처럼 나를 덮쳐 눌렀다.
‘상대가 안 되잖아!’
절대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또 죽는다.
그런 직감이 들어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어느새 비가 그쳤던지 거짓말처럼 구름 새로 드러난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비쳤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매끄러운 피부와 우수에 찬 잿빛 눈동자, 완벽한 비율을 구현해 놓은 얼굴. 놀랄 것도 없이 레이커스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레이커스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내 목과 손목을 꽉 움켜쥐고 죽일 듯 눌러 오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그의 확장된 동공에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그린 양? 아르비체 그린 양? 아니…… 지금 이게 도대체…….”
‘왜 놀란 건진 몰라도, 지금이 기회야.’
난 순간적으로 꽉 움켜쥔 총을 다시 조준하려 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내 의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렇게 놀란 중에도 간단하게 내 손목을 비틀어 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허탈하기 짝이 없는 심정의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그가 나를 다시 죽이려 들거나, 내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궁할 줄 알았다. 이번 데드 엔딩은 그런 식으로 맞이하겠다고 생각하는데, 레이커스가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납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불쑥 나타나 놀라셨더라도 상대도 확인하지 않고 총부터 들이대면 안 되죠.”
‘확인 안 한 게 아니라, 레이커스 당신이란 걸 알아서 총을 꺼낸 건데.’
“그건…….”
“이건 다시 잘 넣어 두십시오. 호신 장비 하나쯤 있는 건 좋은 일이죠. 그보다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총을 갈무리해서 다시 돌려주는 그 때문에 오히려 내 쪽이 혼란스러웠으니까.
‘왜 나를 죽이지 않지?’
캐서 헌트의 집 바로 앞에서 만난 이상, 나는 거추장스러운 목격자일 거다. 아르비체가 어디에 가서 괜히 그를 봤다고 나불거리면 곤란한 것은 그일 텐데.
‘이런 식으로 나에게 연기해 가며 살려 둘 필요가 있나?’
그의 의중이 궁금해서라도 뭐라고 떠보고 싶었지만, 레이커스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렸던 공포 때문에 몸이 덜덜 떨려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원한다면 금방이라도 날 죽일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럴 수 있고.
딱딱 부딪치는 이와 몸을 어떻게 추스르려 애를 쓰는데, 레이커스가 무슨 소리라도 들리는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들고 건물 위쪽을 살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 일대는 지금 위험합니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 봐야겠지만…… 이런 꼴로 있다간 감기가 들겠군요.”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차다가 다시 한번 고개를 홱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뒤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박쥐의 날갯짓 소리 같기도 하고,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나 들릴 법한 매미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하고 낮은 괴음.
쇅!
쇄액!
그리고 골목의 나무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우리를 덮쳤다.
빗속에 어두운 가스등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명이었기 때문에 나는 순간 내가 착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갑작스레 머리 위의 높은 건물에서부터 뛰어내리듯 내리꽂힌 그 그림자는 분명 크리쳐(몬스터)였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인간의 몇 배 크기는 되는 그것은 거미와 닮아 있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미와 닮은 무엇.
‘저, 저게 뭐야……?’
압도적인 공포에 질려 나는 눈을 질끈 내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