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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4화 (14/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4화

랑비엘은 웃음으로 내 시선을 받아치곤 레이커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커스. 왜, 내 앞에서 숨기고 싶을 정도로 관심 있는 사람이 생겼나?”

“헛소리.”

“그러고 보면 저번 다과회에서도 재밌는 일이 있었다지?”

‘대체 무슨 대화야? 레이커스랑 내가 친해 보여서 호감도가 오른 거야?’

얼핏 봐서는 레이커스가 랑비엘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랑비엘이 일방적으로 레이커스에게 관심이 많은 느낌이랄까?

당최 호감도가 오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호감도를 올려 둬서 손해 볼 일은 없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레이커스는 나를 보곤 어딘가 곤란한 듯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만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아, 그렇지. 괜찮다면 올라가는 길에 이걸 내 방에 가져다 둬 주겠어요?”

그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그냥 별 특징이 없는 백과사전류의 책이었는데, 뭔가 그걸 방에 가져다 두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날 내쫓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난 얼떨떨하게 책을 받아 들었다.

방 안에 있는 은발 금발의 미남자들을 한번 돌아보는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미래의 희생자와 살인마가 한자리에 있는데 내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잘하는 일일까?’

하지만 여기에 멀뚱히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나가기 전까진 레이커스는 자리에 앉을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었으니까.

난 별도리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동화책들 위에 백과사전을 받아 들고 방을 나섰다.

레이커스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오래된 고서들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레이커스 방의 두 벽을 가득 채운 책장은 내 키보다도 훨씬 높고 아주 거대했다.

그 풍경에 압도당해 한 바퀴 휘둘러본 나는 베이지 톤으로 정갈하게 디자인된 그의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지금 살인자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거야.’

심장이 두근두근 내달렸다.

플레이어였을 때 이 방에 들어왔던 적은 없다. 처음 오는 공간이다.

‘그가 정말 살인자라면 이 방 어딘가에 증거가 있을 거야. 아니, 혹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지. 아주 영리한 살인마라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가슴을 충동질했다.

‘증거를 손에 넣어서, 그것을 경감에게 가져다준다면…… 진엔딩을 바로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하나.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괜히 목숨만 또 달아나는 거야. 하트가 이제 두 개밖에 없잖아.’ 하는 생각 하나.

밖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자국 소리가 자꾸 나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그 고풍스럽고 너른 방을 멍하니 둘러보기만 하다가,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너무 오래 머물러서 의심받을 필요는 없어.’

당장 그럴듯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건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다.

‘책만 얌전히 두고 나가자.’

그럴듯한 소득을 손에 넣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백과사전이 들어가기에 어울리는 공간을 찾아 두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책장으로 다가섰다.

실로 엮어 만든 책등이 드러난 책, 장정이 두꺼운 책, 아름다운 금박이 들어간 책, 책등에 그림이 그려진 책 등등.

책에 대해 그리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유서 깊은 책들이 가득 찬 책장은 아름다워 보였다.

압도당할 것 같은 기분에 넋을 놓고 보다가 문득 눈높이와 비슷한 곳에 내가 받아 온 책과 같은 붉은 장정의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딱 한 권이 비어 있는 곳도 눈에 띄었다.

‘여기군.’

거기에 책을 밀어 넣었다.

툭.

책은 뭔가에 걸린 듯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뭐지?’

책들의 무게가 상당해서 낑낑대며 틈을 벌리고 보니, 그사이에는 가로로 뉘어진 책이 있었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꽂아 두면 어떻게 해?’

다시 제대로 꽂아 두려고 쓱 당기는데, 책의 무게와 감촉이 이상했다. 뭔가 책 안쪽이 움직이며 덜컹, 하는 듯한 느낌?

가져온 책을 꽂아 두고 빼낸 책을 열자, 거기에는 은색의 권총이 들어 있었다.

‘힉.’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공작의 방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물건인데 왜 이렇게 소름이 돋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템 : 6연발 권총. 전용 총알 6개. 사용법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시야 한쪽 구석에 알림창이 떴다.

‘와, 파밍을 살인자의 방에서 하다니.’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겠지. 지문도 아직 제대로 조회할 수 없는 시대다. 탄흔을 알아내는 건 더 무리겠지. 이게 증거가 되기나 할까?

하지만 증거가 아니라 아이템이 될 수는 있겠지.

순간 떠오른 것은 캐서 헌트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무엇 하나 기댈 곳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아이템이 하나라도 생기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걸 가져갔다는 걸 추궁당할지도 모르겠지만, 게이머의 본능으로 일단 총을 집어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역시 파밍하라고 있는 아이템을 보고도 줍지 않는 건 솔직히 태업이지.’

책은 원래 있던 것처럼 가로로 눕혀 안 보이게 두었다.

아까보다도 좀 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나는 후다닥 방에서 물러났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가지고 온 권총의 사용법을 먼저 열람했다.

[사용 난이도 : 낮음

조준점을 바라보면서 방아쇠를 당겨 주세요.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주의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짧은 설명을 읽고 직접 해 보니 사용법을 익히기는 쉬웠다.

권총을 손에 들고 안전장치를 풀자 시야의 한가운데에 작은 사각형의 조준점이 보였다. 게임 속에서 많이 접해 본 인터페이스였다.

몇 번 안전장치를 풀었다 채웠다 해 보니 충분히 급할 때도 사용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리볼버를 서랍에 숨겨 두려다가 문득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새 체온이 옮아 가 따뜻해져 있는 은색 리볼버는 어딘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게임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무섭지만……. 이것도 무섭네.’

이렇게까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에서 내가 누군가를 해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공포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내 안위도 챙기지 못하면서 무슨.’

나는 어찔한 머리를 흔들곤 얼른 서랍에 권총을 밀어 넣었다.

총이 손에서 떨어져 나간 것만으로 어딘가 마음속에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방을 나서서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 주려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 안도감이 내내 나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점점 더 이 게임 속 세계에 살아간다는 것에 몰입하는 내가 불안해서.

마음속 한쪽에서는 언젠가 이 기나긴 꿈이 끝나고,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매일매일 게임 속의 공간과 시간에 적응해 갈수록 그런 믿음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거니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면 정신병에라도 걸릴 것 같아서 최대한 외면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어쩌다 이런 곳에 와 버린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결국 나는 캐서 헌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리볼버를 훔쳐 나온 것은 그녀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공포 게임 속에 있다는 것 자체를 일주일간 잊고 지내 왔지만, 오늘 밤만은 그럴 수 없을 거니까.

‘오늘이 캐서 헌트의 죽음이 예고된 밤이야.’

딱 한 번 만났을 뿐인데도, 직접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녀를 봤다는 게 내겐 못내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냥 데이터가 아니라, 게임의 한 요소가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도,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NPC에 불과한 게 아니니까.

‘……어떻게 하지?’

‘그녀의 죽음이 예정된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작 이런 작은 리볼버 하나로 뭘 할 수 있지?’

아이들의 방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 복잡한 생각들은 제대로 출구를 찾아내지 못하고 엉망으로 어그러졌다.

문득 계단을 오르려는데, 샤인과 루나가 서로 손을 잡고 방문 앞 짧은 계단참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둘은 나를 보고 손을 확 들어 보였다.

“어머, 방에 있지 왜 나와 있어요?”

“선생님, 왔다! 루나 졸려요!”

“선생님! 나 오늘 숙제 다 했다!”

나는 그렇게 각기 제 할 말을 종알거리는 두 꼬마를 와락 껴안았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단정히 묶어 올린 루나와 찰랑이는 머리칼을 하고 인형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동화책을 읽어 주기 전부터 벌써 졸린지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는 것까지 더해 미치도록 귀여웠다.

아이들 특유의 높은 체온이 품에 가득 느껴졌다.

아이들이 위로받는 게 아니라, 내가 아이들로 인해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이 공포 게임이라는 공간을 잊게 해 주는 존재들.

나는 둘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곤 꼭 안아 주었다.

“또 시작이야! 머리 헝클어져!”

샤인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안겨 왔다.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89/99)]

샤인은 볼이 빨개져서는 머리를 매만졌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제 나이에 받을 사랑도 받지 못한 걸까.

이런 사소한 애정 표현마다 일일이 감동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기분 좋을 때도 있지만 이따금 짠해서 눈물이 났다.

“자자, 동화책 읽어 줄 테니까 얼른 자요.”

“선생님도 같이 자자.”

“아니.”

샤인은 통통한 볼을 불퉁하게 부풀렸다.

“우리한텐 요즘 맨날 집 안에서만 놀라고 하고, 선생님만 재밌는 데 놀러 가려고 그러는 거지? 다 알아.”

난 쓰게 웃었다.

‘공포 게임엔 공포스러운 곳밖에 없지…… 재밌는 곳이 어디 있겠어.’

“요 조그만 입이 그런 말을 했나요?”

샤인의 볼을 쭉 잡아 늘이자, 샤인이 늘어난 입으로 억지로 웅얼거렸다.

“애가 어가 저그매(내가 뭐가 조그매)!”

“공작님께서 다 루나와 샤인을 위해서 멀리 가지 말라고 한 거니까 속상해하지 말아요. 요즘 워낙 위험한 사건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읽어 주는 동화 듣고 우리 일찍 자요. 응?”

루나가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분홍색 입술을 오물거리며 외쳤다.

“선생님은 루나가 지켜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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