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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3화 (13/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 죽이지 마세요 13화

“전 좀 쉴래요. 루나와 샤인을 보다 보니 좀 피곤하기도 하고…… 리베아 양의 말대로 이런 차림으로 너무 나대 봤자 공작님께 누만 끼칠걸요?”

“그런 건…….”

“정말 피곤해서 그래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레이커스는 살인마 주제에, 정말로 교양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신사인 척 나에게 몇 번을 더 함께 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내가 완고하게 거절을 반복하자 이상할 정도로 아쉬운 얼굴로 간신히 내 곁을 떠났다.

“……휴.”

레이커스와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 얼마나 기력이 쪽쪽 빨리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피곤하다는 건 핑계였지만, 그가 떠나고 나자 정말로 피곤해서 도저히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쉬게 할 곳을 찾아 테라스로 향했다.

“……리어먼드가에도 전해 내려오는 괴담이 많지 않나요?”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인 시체가 있다는 괴담이 있지요.”

“어머, 그거 저도 들은 적 있어요. 밤마다 쇠사슬 소리가 들린다면서요?”

“꺅, 무서워요!”

“저주받은 시체가 잠들어 있다나?”

“꺄악!”

안 들으려고 해도 자꾸만 들려오는 뻔한 괴담 이야기를 최대한 흘려들으려 애를 쓰며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흰 커튼이 반쯤 드리워져 있는 테라스로 나가자, 겨우 사위가 조용해졌다.

어둑한 조명, 얼굴로 쏟아지는 바깥의 시원한 공기, 어둠에 파묻혀 희미하게 보이는 늦은 시간의 정원.

‘아, 좀 살 것 같아…….’

숨이 탁 트였다.

테라스에 놓인 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깜깜한 정원을 멍하니 구경하는데, 문득 구둣발 소리 하나가 가까워졌다.

‘누구지?’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캐서 헌트?’

계속해서 말을 걸어 보려고 했던 그녀가 제 발로 내 곁에 와 있었다.

곧 희생자가 될 여인.

캐서도 괴담에 열광하는 분위기에 질려 잠깐 쉬러 왔는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숨을 돌리는 것 같았다. 어딘가 창백한 얼굴이 지쳐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저기…….”

“네?”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는데, 망설임은 점점 더 진해졌다.

‘내가 캐서에게 뭐라고 경고를 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어.’

내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멀뚱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자, 캐서는 눈을 깜박이다가 문득 웃었다.

“아까, 리베아 양과 싸운 거 봤어요. 그분 맞죠?”

“……아. 보셨구나.”

“리베아 양이 요즘 워낙 천방지축으로 굴어서 보기 불편하였던 참이었는데…… 통쾌했지 뭐예요.”

아까의 사건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는 쉽게 말문을 터 주었다.

“이름이……?”

“아르비체 그린이라고 해요.”

“전 캐서 헌트예요. 잘 부탁해요.”

[캐서 헌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28/198)

호감도 이벤트 : 초대]

“그린 양이라면 한 번쯤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데요.”

어쩐지 밝고 생기 있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가 게임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생각 같은 것은 날아가 버렸다.

정말로 눈앞에 존재하는 사람처럼만 느껴져서 어떻게든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해?’

곧 살인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 사건의 중심에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니 몸조심해라? 주위에 살인할 것 같은 사람은 없냐? 우리 공작님하고 일주일 뒤에 만나지 마라?

나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아아, 뭐라고 하지.’

와인을 마시며 머리를 최대한 굴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최근에 살인 사건도 있고 해서 영지 전체가 온통 흉흉하더라고요. 무슨 일은 없으시죠?”

살인 사건이라는 말에 캐서는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흉측한 사건이었죠. 제대로 범인을 잡았다는 기사도 안 나고.”

“그런 사건을 보면 요즘 정말 손님 함부로 집에 들이는 것도 안 되겠더라고요.”

“정말 그래요.”

“캐서 씨도 댁에 못 믿을 사람은 절대 들이시면 안 돼요. 알았죠?”

‘8일 뒤엔 특히요.’

맥락 없이 튀어나온 내 말이 조금 웃겼는지, 캐서 헌트는 붉은 눈을 접으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사람 좋아 보이는 분인데…….

뭘 어떻게 더 설명할 길이 없네.

순간 베리아 남작에 대해 트리버 경감이 했던 얘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말을 던졌다.

“그…… 까마귀가 그려진 편지…… 혹시 들어 본 적 있어요?”

그녀는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휙 나를 돌아보았다. 캐서의 눈에 순간 스친 감정을 나는 보았다.

공포. 아주 깊은 공포심.

“……그린 양? ……저는.”

“신문에 보니까 그런 게 돌고 있다고 해서요.”

“……아녜요. 저는 생각해 보니 이럴 때가 아닌데. 남편이 기다릴 거예요. 먼저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잠깐만요!”

더 잡을 겨를도 없이 캐서는 뛰쳐나가다시피 테라스를 벗어나 다과회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말실수한 걸까? 그녀는 왜 그런 눈을 했을까? 내가 뭐라고 해야 했을까?’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씁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애초에 언제 어디서 죽을 거라고 말해 주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텐데, 차라리 모른다면 마음이 편할 것을.

너무 무력한 기분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일주일 동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간 아이들과도 친해졌고, 이 게임에서 아르비체로 살아간다는 기묘한 일에도 조금 적응했다.

뜬금없이 생긴 가정 교사라는 직책에도, 숨 막히게 잘생긴 살인자가 앉아 있는 아침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일에도.

가정 교사로서 봉급을 올려 받게 된 것만 변했을 뿐, 공포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치곤 꽤 반복적이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레이커스와 식사 자리를 빼곤 마주치지 않도록 애쓰며 쥐 죽은 듯 지내는 것에만 애를 썼기 때문에, 별다른 사건 수사도 해 보지 못했다.

다만 레이커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다.

‘정말 캐면 캘수록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야.’

참 답답하게도 그에 대한 평은 호평 일색이었다.

왕가의 신임을 사고 있는 공작이며, 이따금 왕궁에 불려 간다는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로 일 처리에 대해서는 깐깐하게 굴긴 하지만 사람 좋기로 유명한 듯하다.

정말 어쩜 그렇게 칭찬 일색이고 화 한번 내는 법이 없다는 평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직장에서 부하들이 상사 칭찬만 하는 걸 본 적이 있냐고?’

이들에게 고용주가 레이커스인 이상 틀림없이 어느 구석에서는 불만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사람이란 털면 먼지라도 나오기 마련인데.

“주인님은 너무 영지민들밖에 모르시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

“그렇다니까. 사람을 너무 챙기셔. 본인도 좀 돌보셔야 할 텐데.”

“세금도 과하게 걷지 않으시고, 기부도 얼마나 성실히 하시는데?”

“그뿐이야?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어찌나 애쓰시는지…… 글쎄, 거지가 없는 영지는 우리밖에 없다니까?”

아주 평판이 하늘을 찔렀다.

호감도를 쌓으면 뭐가 좀 나올까 했다. 일주일 동안 나를 외면하던 고용인들과 그래도 조금쯤은 오해를 풀고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호감도가 어느 정도 오른 자들도 칭찬만 해 대니 지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과회를 자주 주선하는 것치고는 특별히 유지하는 교우 관계가 많지는 않은 것 같고, 그렇게 잘난 얼굴인 주제에 연인을 만들었던 이력조차 없다고.

역시 평판만 좋다 뿐이지, 보기 좋은 가면을 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임에 틀림이 없다.

‘아, 역시 내가 플레이어였던 시절에 증거를 모조리 모아서 진엔딩을 봤어야 했는데.’

진엔딩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챕터 직전까지 갔었는데 거기서 막혀서 한참을 헤매는 바람에 마지막 챕터로 진입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나는 인제 와서 해도 너무 늦은 후회만 자꾸 해 댔다.

게임에 들어온 지 딱 11일째가 되는 날.

리어먼드 저택에 웬 손님이 찾아왔다.

가주의 지위가 높은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고용인들이 대단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리어먼드 저택에는 이상하리만큼 손님이 없는 편이었다.

그나마 나와 루나, 샤인이 저택 안의 방을 여기저기 쏘다니며 수업을 하고, 술래잡기하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적막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는 긴장에 못 이기던 나도 그 반복적인 일상에 조금쯤 젖어 가고 있던 참이라 새로운 손님이 반가웠다.

그 손님을 만난 건, 응접실에서 아이들에게 읽어 줄 동화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때였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쑥 들어온 은발 곱슬머리에 훤칠한 키의 남자는 내 눈에도 퍽 익은 얼굴이었다.

좋은 기억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랑비엘 맥레이.

‘8번째 희생자…… 였던가?’

정확한 순서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살인마의 희생양이 되어 신문에 실린 것을 사건 수첩에서 본 적이 있었다.

레이커스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었다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꽤 인기가 많았을 법한 사내였다.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눈동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휘었다.

“선객이 계셨군요. 이거, 그러고 보니 그 까다로운 레이커스가 모처럼 새로운 사람을 정식 고용했다고 하던데…… 아가씨인가요?”

“……네?”

“리어먼드가를 대대로 모셔 온 가문 출신이 아니고서야 새 고용인을 들이는 건 처음이라고 알고 있는데. 재밌군요.”

저택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사람, 어딘가 느끼하지 않아? 버터를 열 개는 먹은 것 같네.’

지나치게 능글능글한 말투는 듣기에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 레이커스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하긴, 살인마에 비하면 버터 먹은 남자가 차라리 낫지.’

나 혼자 멋대로 둘을 저울질하는 사이에 레이커스가 그답지 않게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린 양에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랑비엘.”

그 순간, 알림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랑비엘 맥레이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12/189)]

‘응? 지금 호감도가 오를 만한 일이 뭐가 있었던가?’

난 당황해서 랑비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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