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 죽이지 마세요 12화
레이커스와 블란테 공주는 리베아의 뒤쪽에 서 있어서, 리베아는 아직 둘이 가까이 서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레이커스는 어딘가 불쾌하다는 얼굴이었고, 블란테 공주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리베아와 내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인데.’
하지만 레이커스가 직접 끼어들지 않는 것을 보니, 내가 어떻게 할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정말 의뭉스러운 사람이라니까.’
난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다시 열었다.
“존경하는 블란테 공주님께서도 방문해 주신 자리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걸 몰라?”
“공주님께서 만약 공작님과 좋은 연을 맺게 된다면, 공주님께도 조카가 되는 셈인데…… 그렇게 아이들에게 함부로 말씀을 하셔도 괜찮은지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공주님’을 언급하는 순간, 좌중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음악 소리마저 멎었다.
리베아는 그 싸늘한 정적에 혹시나 하는 시선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바로 제 뒤에 서 있는 공주님을 발견하곤 얼굴이 창백해졌다.
블란테 공주와 레이커스는 엄한 시선으로 리베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열에 민감하다는 것은, 저보다 낮은 자를 숨 쉬듯 깔아뭉개기도 하지만 저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설설 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레이커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제논 양?”
“……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제가 그런 뜻으로…….”
부정하기에는 증인이 너무 많겠지. 중언부언하며 어떻게 말을 주워담으려는 리베아를 보며 레이커스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실망입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초대장을 드릴 일이 없겠군요.”
“레, 레이커스 님!”
“그리고 제가 아니라 그린 양에게 제대로 사과하시죠. 그린 양처럼 훌륭한 인재가 가정 교사를 그만두면 곤란한 건 저니까요.”
나를 감싸는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귀족들도 이렇게까지 나를 옹호할 줄은 몰랐는지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레이커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과회에 함께 입장한 데다 훌륭한 인재니 뭐니 하는 말까지 하니까, 다들 나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눈치였다.
난 내게 쏠린 시선에 좀 곤란해져서 볼을 긁었다.
‘내가 오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 가정 교사를 해고해 댔다며. 그런 주제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리베아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고서 내게 말했다.
“말이 심했던 건 인정…… 하죠. 미안하게 됐어요.”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쓴웃음이 다 나왔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요.”
그 순간, 알림창에 메시지가 떴다.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80/99)]
‘레이커스도 아니고 블란테 공주의 호감도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블란테 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공작과 곧 결혼할 사이처럼 언급한 게 마음에 든 눈치였다.
블란테 공주의 호감도를 얻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미리 호감도 작업을 해 두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블란테 공주처럼 제 감정에 솔직한 사람과 친해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예의에 어긋나는 인사가 아니길 빌며 치마폭을 잡고 살짝 몸을 숙여 보였다.
[호감도 이벤트 : 왕궁 연회 방문]
이어 알림창이 하나 더 떴다.
왕궁 연회 방문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다.
왕궁 연회에 가는 이벤트는 어지간히 호감도 작업을 해서는 얻을 수 없는 이벤트였다. 나도 카페 등에 올라와 있는 공략까지 참고해 가며 같은 구간을 몇 번이나 플레이해서 겨우겨우 들어갔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공주님을 통해 갈 수 있게 되다니…… 뜻밖의 수확인데?
처음 나와 마주쳤을 때는 날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리어먼드가의 가정 교사라고?”
난 호감도 이벤트에 신이 나서 얼른 대답했다.
“네, 아르비체 그린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 사람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명석한 여인을 만나 기분이 좋구나. 며칠 뒤 나의 연회가 있으니 들러 주련?”
“영광입니다, 저하.”
공주는 그것으로 볼일을 다 봤는지 나를 향해 흐뭇하게 웃곤 레이커스에게로 돌아갔다.
그제야 얼굴이 새빨개진 리베아가 슬쩍 인파를 벗어나 구석으로 도망치듯 떠나갔다.
하지만 나를 향한 주위의 시선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레이커스의 옹호에다 공주의 초대까지 받은 마당이니까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게 주목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최대한 모르는 척 와인을 들이켜며 구석진 곳으로 몸을 빼는데 사람들끼리 숙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릴 걸 그랬나 봐.”
“그러니까 말이야. 어휴, 공주님 눈에 띌 기회인 줄도 모르고.”
“그래도 입이 떨어져야 말이지. 저 가정 교사 여자애도 지금은 좋겠지만 리베아 제논 아가씨한테 찍히면 곤란할걸?”
“에이, 공주님이 아예 내 사람이다 찍어서 초대까지 했는데 아무렇게나 못 대하지 않을까?”
“뭐…… 그것도 그러네. 괜히 말 얹었다가 나까지 같이 찍힌 건 아닌지 몰라.”
“나도. 레이커스 님의 그 차가운 눈빛이라니. 어휴, 말조심할걸.”
“그러니까 말이야.”
계획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따가울 정도의 시선과 목소리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리베아가 창백한 얼굴로 구석 와인 바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쯧쯧.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 속을 긁어.’
루나와 샤인을 다시 찾았지만, 둘은 그새 졸린다고 투정을 부려 방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제 내 방패도 없어진 셈이니, 나도 오래 머물지 말고 올라가야겠다.
마지막으로 캐서 헌트와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으로 그녀를 찾아 목을 쭉 빼고 둘러보는데, 문득 등 뒤에서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 부러지고 재밌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영리하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낮은 저음에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레이커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들은 늘 제 눈치를 봅니다. 제게 알랑거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아이들을 단호하게 단속하는 분도 처음이고…….”
그가 내 눈을 흥미롭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제 파티에서 큰 소리를 내시는 분도 처음입니다.”
헉.
‘살인마의 즐거운 사교 파티를 내가 망쳐 버린 걸까?’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알림창이 반짝였다.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84/298)]
호감도가…… 올랐다.
그저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을 뿐인데, 자꾸 이렇게 호감도를 쌓아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누구의 이목도 사지 않고 얌전히 저택에서 지내다가 돈을 벌어서 탈출하겠다는 내 계획, 괜찮은 거겠지……?’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내색하지 않으며 레이커스를 바라보는데, 그가 저 잘난 줄 정말 잘 아는 사람 특유의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정말 재수 없는 건 그런데도 정말로 잘생겼다는 거다.
“지금까지는 둘 중 하나였거든요.”
“……네? 뭐가…….”
“가정 교사 말입니다. 일을 못 해서 제가 잘랐거나, 아니면 스스로 못 견뎌서 나갔거나. 자랑도 불평도 아니지만, 리어먼드가의 식솔들이 워낙 보수적이라…… 쉽사리 누군가에게 사근사근하게 구는 편이 아닌 걸 저도 압니다.”
“……그래 보이긴 하더라고요.”
내 솔직한 답변에 레이커스가 또 쿡쿡 웃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유쾌하신 분이군요.”
“……아닌데요.”
“이렇게까지 제 눈치를 보지 않고 아이들과 대하는 분은, 솔직히 처음 봅니다. 무엇보다 저를요.”
‘저를요’라고 말할 때, 그의 눈이 아주 재밌다는 듯 초승달처럼 휘었다.
하지만 그는 뭔가 잘못 알고 있다.
‘나만큼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절대적인 권력과 미모, 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경은 알지만, 내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원래 이곳에서 살던 사람이 아니라서다.
그리고…… 나에게 레이커스는 잘생긴 대부호 공작이 아니라 좀 더 그를 특정하기 좋은 다른 호칭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살인마.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레이커스는 저 혼자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내 포도주 잔에 제 잔을 부딪치더니 말했다.
“월급은 원래 제안했던 것보다 두 배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정식으로 계약하도록 하죠. 저희 리어먼드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배.
원래 받기로 했던 월급이 대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파격적인 제안임은 틀림없다.
당장 수중에 가진 돈이 0원인데다, 얼른 도피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에서 이 제안은 퍽 달콤했다.
돈이 들어올 다른 루트도 전혀 안 보였으니까.
‘메인 캐릭터의 호감을 올리니까 이런 좋은 일도 생기긴 하네.’
이 집에서 당장 달아나지 못한다는 것 자체는 불행이지만…….
물론 아주 어린 아이들이더라도 내가 누굴 가르칠 전문 인력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좀 찔리는 부분이었는데, 그건 레이커스가 판단해서 날 자르고 말고 할 문제지 내가 먼저 실토할 필요는 없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마치 피처럼 보이는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와, 맛있어.’
쓴 뒷맛이 강하게 남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부드럽게 목으로 흘러들었다.
와인이 속을 따뜻하게 덥혀준 덕분에, 난 간신히 딱딱한 표정을 풀며 대답할 수 있었다.
“좋은 제안 해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레이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제가 초대해 놓고 신경을 못 써서 죄송했습니다. 저쪽에 계신 분들과 인사를 좀 하실까요? 한창 괴담을 나누고 계신 모양입니다.”
나는 목을 한껏 움츠렸다.
‘티 파티에서 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이 많을 텐데, 하필 괴담이라니.’
레이커스와 친한 사이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레이커스와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공포 게임 속에서 듣는 괴담이라니.
‘으……. 공포 게임의 전형적인 플롯이잖아. 괴담을 듣고 났더니 괴담의 내용 그대로 살해당하는 거.’
나는 최대한 창백한 낯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