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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1화 (11/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화

난 내 앞에 뻗어진 레이커스의 팔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거절할 수는 없겠지.

‘별수 없지.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그를 두려워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그에게 닿을 자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레이커스의 옷소매에 손가락이 닿을락 말락 하게만 손을 올렸다.

그는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입꼬리까지 휘어 웃더니 먼저 걸음을 뗐다.

한숨과 함께 뒤돌자, 앰버가 부채를 쥐여 주며 신이 잔뜩 난 얼굴로 파이팅 포즈를 해 보였다.

연회장은 핏빛 와인 잔과 악기 선율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악단이 연주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장해서 보니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둘러싼 손님들의 합주인 모양이었다.

앞다투어 재능을 뽐내는 아가씨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화려하게 꾸민 수컷 공작새가 생각난다.

‘살인마에게 잘 보여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데.’

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다과회장을 둘러보다가, 문득 레이커스와 내게로 똑바로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레이커스.”

그녀는 가슴골을 내놓고 다리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흑발이 인상적인 공주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게임 트레일러에서 그녀의 얼굴을 봤던 기억이 났다.

“바로 지난주에도 뵈었던 것 같습니다만.”

“어머, 그랬나? 그래서 불만이라도 있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참석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레이커스가 블란테 공주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인사하는 사이에 나는 슬쩍 몸을 뺐다.

블란테 공주는 레이커스와 함께 입장한 내가 도대체 누군지 관심 있게 보는 것 같았다.

‘저는 레이커스에게 관심이라곤 없답니다.’

난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자 치맛자락을 잡고-남들이 레이커스에게 이렇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참고했다- 살포시 인사를 하고 물러섰다.

‘둘이 결혼을 하든 지지고 볶든 알아서 하세요, 저는 바쁜 볼일이 있어서요.’라는 뜻이다. 잘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살인마를 떠맡기다니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블란테 공주에게 뭐라고 해 봤자 괜히 소문이 새어 나가면 내 목숨만 위험해질 거다.

후다닥 멀어지는 그때, 레이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린 양?”

‘아아아아아, 아무것도 안 들려.’

나는 최대한 뻔뻔스레 레이커스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로부터 멀어졌다. 의아한 눈빛이 나를 좇는 게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공주님을 버리고 내게 다가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사람들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은 내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캐서 헌트의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을 텐데, 기억이 잘 안 난단 말이지.’

워낙 조연이라 인상이 희미하게만 남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무리를 눈으로 좇다가 자기소개 하는 정도로만 어울리기 시작했다.

지독히 권위적인 무리와 인사를 나누고 어울리는 척하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피곤한 일이었다.

어깨가 하늘 높이 치솟은 자들과 인사할 때마다 그들은 꼭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 가정 교사로 계신다는 그 남작가의 아가씨구나.’ 하는 비웃음 아닌 비웃음을 듣는 것도 차츰 적응되었다.

‘귀족들은 일하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긴다는 건가? 아주 잘나셨어.’

투덜거리며 와인을 석 잔쯤 마셨을 때, 드디어 다가간 마지막 무리에서 캐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희생자가 될 인물.

붉은 머리가 확 눈에 띄는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내가 그녀의 얼굴을 쉽사리 기억해 내지 못한 이유를 떠올렸다.

‘플레이어로서는 캐서 헌트가 살아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윽.

갑작스레 오한이 끼쳤다.

등줄기를 달리는 소름을 떨쳐 내려 애를 쓰는 순간 누군가가 내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선생님, 나 왔어!”

“선생님, 나 왔어요!”

“꺅!”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단장 때문에 조금 늦은 루나와 샤인이 새침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나는 치마를 크게 부풀린 새하얀 미니 드레스를, 샤인은 스리피스의 갈색 정장을 입었다.

‘천사야, 뭐야? 귀여워 죽겠네.’

난 놀란 와중에도 지독하게 귀여운 둘을 향해 몸을 낮추고 시선을 맞추었다.

“왔어요?”

“응.”

나는 새침한 얼굴의 인형 같은 둘을 차례로 바라보며 엄포를 놓았다.

“오늘 얌전히 재밌게 잘 놀아야, 다음에 또 오게 해 줄 거예요. 알았죠? 지금 당장 재밌는 것만 생각하느라 다음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귀족은 아니죠?”

지금이라도 달려 나가 다른 이들에게 시비를 걸 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샤인은 내 말에 입술을 비죽거렸다.

샤인은 자존심을 긁는 게 참 잘 먹힌다니까.

‘과외도 하고 조카들과 왕왕 놀아 줬던 경력이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난 픽 웃어 주곤 둘의 머리도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가정 교사 복지 최고네.

흐뭇한 얼굴로 내가 흩트려 놓은 둘의 머리를 다시 정리해 주며 고개를 들자, 캐서 헌트는 그 짧은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는데 등 쪽에서 들으라는 듯 큰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자가 방금 공작님과 함께 들어왔던 여자인가요?”

“그러니까요.”

“저 옷 좀 봐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옷인데…… 그린 남작가가 망했다고는 들었지만, 어지간히 망한 게 아닌가 봐요?”

틀린 말은 아니라서 나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 말소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 성질을 긁기 시작했다.

“돈 없고 빽 없는 집안에서 자란 여자가 그나마 성공하는 길이라 봐야 입주 가정 교사 하는 거죠. 그렇게 치면 성공한 셈이죠?”

“본인은 공작님이라도 꼬드길 생각일 텐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할걸요? 지금 마음은 벌써 레이커스 님의 부인일걸?”

“여기서 일하는 하인한테 들었는데, 들어온 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해서 공작님이 난감해하셨다면서요? 곧 쫓겨날 거라던데?”

“하긴, 리어먼드가의 가정교사가 한 달 이상 버티는 걸 본 적이 없긴 해요. 저 여자라고 별수 있겠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나는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해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빤히 노려보았다.

대화를 주도하는 건 구릿빛 피부와 도톰한 입술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그녀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리베아 제논.

대단치 않은 조연이긴 했지만, 워낙 말을 잘 옮기는 호사가라서 증언이나 소문을 수집할 때 접촉하기 좋은 NPC였다.

‘따지고 보면 내 얘기가 아니라 아르비체 그린의 얘기긴 하지만 막상 그 캐릭터가 된 처지에서 듣고 있으니까 썩 유쾌하진 않은데?’

내가 기가 죽을 줄 알았던지 쏘아보는 내 시선과 마주친 자들은 하나같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우아하게 생긴 여인들과 꽤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들이 모여서 한다는 게 고작 힘없는 여자 하나 망신 주기인가? 그래, 신분이 다르다 이거지?’

짜증은 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최대한 성질을 죽였다.

‘뭐 좋을 대로 지껄이라지.’

게임 캐릭터들이야 그냥 설정값대로 행동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뭐, 엄연히 신분제 사회니까 분수에 맞지 않게 굴었으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어쩐지 그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다들 레이커스의 눈길 한 번 받아 보겠다고 저렇게 화려하게 차려입고 악기까지 싸 들고 왔는데, 변변찮은 신분에다 싸구려 옷을 차려입고 온 내가 레이커스의 팔짱을 끼고 들어왔으니까 짜증이 난 거다.

‘유치해.’

그러니까 아마 거기까지만 들었으면 나는 그냥 무시하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도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저런 식으로 딴마음 먹고 들어온 여자한테 애들을 맡겨도 되나 몰라. 무서운 세상인데.”

“리어먼드 공작님께서도 본인 아이들이면 맡겼겠어요? 부모 없는 불쌍한 더부살이 조카들이라 저런 여자한테 맡기는 거겠죠.”

“정말 공작님도 착하셔서 탈이라니까요. 갈 곳 없는 형의 애들을 돌봐 주시는 것만 봐도 대단하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없이 사는 것들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데.”

난 깜짝 놀라 아이들의 안색을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샤인과 루나는 서로 옷 장식을 두고 장난치느라 저자들의 말을 전혀 못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서열이 낮은 사람들을 기죽이고 쫓아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부모 없다느니 하는 얘기를 꼭 해야겠어?’

샤인과 루나까지 나를 깎아내리는 도구로 전락한 것 같아서 순간 속이 뒤집어지게 화가 났다. 참아 넘기려야 넘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듣고 있으면 상식적으로 말을 가려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게 죄는 아니잖아. 내가 저들에게 뭘 부탁한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들어야 해?’

발끈하는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아니다, 참자. 여긴 살인마의 저택이고 누군가의 눈에 띄면 안 된다. 그러니까…… 아니, 안 되겠다.’

성깔 죽이고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을 0.0001초 정도 했지만, 루나와 샤인이 보모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게 보이자 나도 모르게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저급한 건 그쪽인 것 같네요, 제논 백작가의 아가씨.”

“……지금 뭐라고?”

백작과 남작은 같은 귀족이지만 그 지위의 격차가 컸다.

남작가 딸 따위에 불과한 아르비체가 제 성질을 긁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리베아 제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이 계집이?”

“제게 왜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샤인과 루나에게 더부살이 조카들이라 저 따위에게 맡긴다고 한 건 사과해 주셨으면 해서요.”

리베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나를 깎아내리려다가 말이 조금 심해졌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겠지.’

하지만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는 남작가 출신의 내게 굽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리베아는 눈썹을 구기며 턱을 들었다.

“어디, 내가 틀린 말 했어?”

저렇게 나오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할까?

분을 삭이려고 주변을 한번 휘둘러보는데 바로 근처까지 다가와 있는 블란테 공주와 레이커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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