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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0화 (1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화

앰버는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포기할 수가 없는지 한참 나를 설득하다가 겨우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쉬며 내가 고른 드레스를 바라보더니 주먹을 꼭 쥐었다.

“머리와 화장이라도 제가 꼭 신경 써 드릴게요.”

“고마워, 앰버.”

난 월급이 들어오면 뭐라도 그럴싸한 것을 사 보리라 다짐하며 옷을 앞에 대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뭐, 유행은 백 년쯤 지났을지 모르겠지만 색이 잘 어울렸다.

옷 관리도 잘되어 있었고. 에메랄드빛 머리카락과 눈 색을 더 돋보이게 해 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 드레스를 저 주세요.”

“응.”

앰버는 드레스를 받아 등의 끈을 전부 풀더니 치맛자락을 바닥에 펼치고 몸통 부분을 벌려 잡았다.

계란프라이처럼 바닥에 넓게 펼쳐진 치맛자락을 구경만 하고 있자니 앰버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얼른 지금 옷을 벗고 여기 가운데에 서 주셔요.”

‘아, 드레스는 아래에서 위로 입어야 되는구나.’

등에 끈이 치렁치렁 달린 물건이라 입기 귀찮겠다는 생각만 해 봤지, 어떻게 입는지는 몰랐으니까.

‘하긴 티셔츠처럼 위에서부터 입진 않겠지.’

얼결에 데려온 앰버가 아니었다면 낡은 드레스조차 못 입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입으라고 끈을 온 등에다 달아 놨는지 모를 일이다. 애초에 혼자서 입지 말라고 만든 건가?

입고 있던 일상복을 벗고 드레스의 가운데로 가서 서자, 앰버가 드레스를 끌어올려 소매에 팔을 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앰버가 등의 끈을 당겨 정리해 주는 동안 나는 회색 드레스 차림이 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생 입어 본 적 없던 차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어색해서.

‘어떤 부분은 정말 게임 같고, 또 어떤 부분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구나.’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는 옷을 갈아입을 일이 없는 1인칭 게임이었으니까.’

“자, 이제 여기 앉아 보셔요.”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앰버는 내 머리도 예쁘게 땋아 올려 주었다.

앰버는 땋아서 깔끔하게 올리는 스타일이 유행이라고 종알거렸고, 나는 그냥 그녀에게 맡겼다.

머리 만지는 걸 원래 잘하는지, 그녀는 에메랄드빛 머리칼에 윤기가 도는 기름을 바르고 깔끔하게 말아서 야무지게 정리해 주었다.

단장이 끝난 나를 앰버가 이리저리 돌려세워 보며 점검했다.

여전히 드레스가 많이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녀는 실망을 더 내색하지는 않았다.

“땋은 머리가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 이제 다 됐어요. 가서 연적을 물리치고 오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 작게 웃었다.

연적이라니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지금은 예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무슨 연적.

“고마워. 덕분에 공작님께 누는 안 끼칠 것 같아.”

“에이, 누라니요. 원래 입고 있던 치마는 제가 세탁해서 다시 돌려 드릴게요.”

“응, 고마워.”

“제가 더 고마워요. 아까 블리에 님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정말 이번 달 월급은 받아 보지도 못할 뻔했어요.”

‘그러고 보니 블리에 씨가 그릇 값을 내 월급에서 깐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 수중에 돈이라곤 없는데.

난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신경 써서 머리도 화장도 손봐 줬잖아. 난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생각할수록 앰버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네.”

앰버가 생긋 웃었다.

“에이, 그러면 다른 일손을 찾으셨으면 됐잖아요. 그보다 오늘 가서 재밌게 보내시고 다과회에서 있었던 일, 나중에 꼭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그럴까? 좋아.”

“어머, 정말요?”

“그럼. 그런데 어차피 애들 돌보러 가는 거라, 별다른 일도 없을 테지만.”

앰버는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블란테 공주님 때문에 그러시나 본데, 아르비체 님도 아주 아름다우신걸요.”

블란테 공주라는 이름을 두 번째 들으니까 그 이름이 이번에야말로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분명 게임 내 주요 인물이었다.

4공주랬나, 5공주랬나.

딱히 특이할 점은 없었지만,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였달까.

“공주님께서 오시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어머, 시침 떼시는 거죠? 공주님께서 저희 공작님께 홀딱 반한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이번에도 틀림없이 꼬리 치러 오시는 걸걸요.”

나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무슨 캐릭터 세부 설정이 이렇게 빼곡하단 말인가?

플레이어에게 노출되는 장면도 아닌데 NPC끼리 서로 꼬드기러 방문까지 하다니. 업무 외 수당이라도 받는 걸까?

설령 둘이 사귀든 결혼을 하든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블란테 공주라는 사람도 참 딱하게 됐다.

하필 골라도 그 잔인무도한 공작에게 빠지다니.

“정말로 난 공작님께 아무 관심도 없어. 하지만 재밌는 가십거리가 있으면 꼭 듣고 올게.”

내가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것을 듣고 앰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레이커스 님을 사모해서 가정 교사 일을 승낙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닌가요?”

“내가?”

“레이커스 님을 흠모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아무도 흉보지 않아요. 당당해지셔도 된다고요.”

‘당당하고 뭐고, 애초에 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문득 아주 흥미로운 것이라도 관찰하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레이커스의 눈빛이 떠올랐다.

온갖 관심의 중심인 그에게는, 그를 피하는 사람 자체가 낯설고 재밌을지도 모르지.

‘아르비체 그린도 레이커스를 좋아했다면 더더욱.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처럼 보일 테니까.’

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빠진 멍청이처럼 굴 수는 없잖아.

오늘 오는 손님 중에는 중요한 인물이 많다.

‘레이커스에게 신경 쓰지 말고 다과회에서 내가 할 일이나 실컷 하자.’

이번 기회에 다른 인물들에게 호감도 작업을 해 두면, 나중에 이 저택을 탈출해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캐서 헌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고.

‘아르비체가 거주지를 변경한 것으로 희생자 후보에서 없어진 것처럼, 그녀도 사소한 뭔가를 바꾸는 것만으로 앞으로의 루트가 변경될지도 모르니까…….’

앰버와 인사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문손잡이에 손이 닿기도 전에 먼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똑똑똑.

얼른 대답했지만, 문이 열리는 대신 다시 한번 소리만 났다.

똑똑똑.

그러고 보면 분명 저번에도 이렇게 오만한 방식으로 노크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문을 열어 주자, 남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레이커스가 우아한 자태로 서 있었다. 그는 복도의 희미한 광원에도 재주 좋게 얼굴이 반짝였다.

‘어우, 살인마 주제에 왜 이렇게 잘나 보이는 거야?’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평소보다 더 갖춰 입은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레이스를 주름 잡아 앞 중심에 늘어뜨린 셔츠에, 길이가 짧은 베스트, 통이 좁은 바지에 색을 맞춘 코트 차림이었다.

허리선을 살짝 조이고 아래를 자연스럽게 퍼지게 둔 실루엣의 코트는 진한 청색이었고, 별다른 장식 없이 흰 크라바트 아래에 검정 단추만 앞섶을 따라 나열되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화려한 차림도 아닌데, 이렇게 달라 보이다니.’

워낙 사람이 숨 막히게 아름답고 팔다리가 쭉쭉 뻗어 있어서 조금만 꾸며도 광채가 나는 모양이다.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

‘내 학부 시절에 저런 얼굴 하나만 있었어도 인생 만족도가 다섯 배 올라갔을 테고, 여학우의 학회 출석률이 백 퍼센트였을 거야.’

하지만 그런 건…… 그가 살인마가 아닐 때의 문제다.

나를 들여다보는 은색 눈이 나에 대한 작은 흥미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나는 등줄기를 따라 달리는 소름에 몸이 바짝 굳었다.

‘너무 뚫어지게 봤나?’

나는 궁지에 몰린 토끼 같은 심정이 되어,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조금쯤 비굴하게 말을 골랐다.

“굳이 데리러 와 주실 필요까진 없는데, 영광이네요…….”

“가시죠.”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며 옆을 돌아보니 앰버가 입을 떡 벌리고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뭐, 지나가는 시녀들 얼굴도 그리 다를 건 없었다.

그런 그와 함께 입장이라니, 정말 반갑지 않다.

‘가능하면 누구의 시선도 끌고 싶지 않은데…….’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며 난 최대한 상냥한 척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정말 감사하지만, 그냥 저 혼자 갈게요.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사소한 거절조차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레이커스는 픽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데 폐일 게 있겠습니까?”

“네?”

“이깟 다과회 오백 번을 하든, 오천 번을 하든…… 원하는 사람을 찾아내지도 못할 텐데. 그냥 이제는 습관적으로 하는 일일 뿐입니다. 함께 어울려 주시죠.”

‘사람을 찾는다고?’

정말 이상하지.

살인마가 사람을 찾는다니, 그렇게 끔찍한 말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 레이커스의 구름 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아주 처연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유 없이, 갑자기 그가 나로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주 긴 시간을 버텨 온 존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하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감정에 불과했다.

금세 다시 명랑한 빛을 찾은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은, 다시금 공포라는 감정을 일깨울 뿐이었다.

“누굴 그렇게 찾으시는데요?”

“저주를 풀어 줄 사람.”

“……네?”

워낙 순간적으로 작게 웅얼거리듯 대답하는 바람에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레이커스는 내 반문에 대답하는 대신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내가 이미 허락했다는 듯이 내 쪽으로 다시 한번 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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