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화
그리고 또 알아낸 것은, 이 가문이 정말 대단한 가문이라는 거?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상징물인 듯해 보이는 훈장이 장식장에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레이커스의 이름도 몇 번이나 찾을 수 있었다.
‘전쟁 통도 아닌데 무슨 대단한 공을 그렇게 세웠는지 모르겠다니까.’
그 밖에도 집주인 레이커스의 동선을 파악해 보려고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드나들 만한 비밀 통로가 있을까 하고.
하지만 허탕이었다.
고저택에는 필수라는 비밀 통로가 하나쯤 있을 법하지만, 외부인이 쉽게 알아낼 수 있으면 이미 비밀 통로가 아닐 것이다.
‘딱 하나, 서재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비상 통로는 게임에서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서재에는 그의 수하들이 온종일 죽치고 있어서 확인해 볼 수가 없단 말이지.’
그렇게 복도 여기저기 서성거려 보았지만, 손에 넣은 그럴듯한 아이템도 딱히 이렇다 할 성과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동안 알아낸 건 이 캐릭터의 스테미너가 생각보다 낮다는 거다.
쉬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면 빨리 피로감이 들어서 왜일까 생각했는데, 상태창 아래에 희미하게 떠 있는 파란색 바가 아주 빨리 줄어들었다가 천천히 회복되는 게 보였다.
‘살인마에게 쫓기면 그대로 죽겠는데.’
스테미너를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나 이벤트도 찾아야겠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순간 주방 쪽에서 나오던 여자 메이드 하나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으악!”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을까?
긴 갈색 머리를 하고 있는 메이드는 나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게 카트를 부딪쳤다.
와장창-!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접시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고, 비싸 보이는 커피 잔이 두 동강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내 치마에도 온통 진한 색의 커피 물이 쏟아졌다.
“헉! 어쩜 좋아. 괜찮으세요? 어머…… 어쩜 좋아, 정말.”
하녀가 사색이 되어서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내 치마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가 질겁한 것에 더 놀라서 하녀를 일으켜 세웠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요?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일도 끝나서 이 치마는 빨려고 했는걸?”
“……하, 하지만…….”
“그런 건 괜찮으니까, 손은 안 다쳤어요?”
하녀는 내 말에 우물쭈물하며 내 치마를 자꾸 만지작거리다가 눈물까지 고인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주방 보조 막내 둘이 갑자기 출근을 안 하는 바람에, 일이 너무 늘어나서……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러다 언제까지고 사과만 듣겠는걸.
그때 마침맞게 요란한 소리를 듣고 달려온 듯한 블리에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의 그녀는 이 완벽한 저택의 복도에 펼쳐져 있는 난장판을 보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또 저질렀군요, 앰버. 요즘 피곤한 건 이해하지만 이런 식이면 급여를 받을 수가 없어요. 알죠?”
난 나도 모르게 블리에 씨 앞으로 나섰다.
“그…… 이번 일은 앰버가 아니라 제 잘못이에요. 제가 앞을 안 보고 다녀서…… 죄송해요, 블리에 씨.”
블리에 씨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흘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여기 치울 아이들을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너도 어서 빗자루를 가지고 오렴.”
고작 이런 일로 엄청나게 혼날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던지, 앰버는 그렇게 꾸지람이 끝나자 얼굴이 환해져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복도에 둘만 남자 블리에 씨는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마저 깔끔하게 넘기며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아, 그리고…….”
“네?”
“오늘 식당에서, 샤인 님과 루나 님에게 해 주신 이야기 저도 옆에서 들었어요. 조금 감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깊고 저희까지 배려해 주시는 분인 줄 미처 몰랐어요.”
부드러운 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야, 먹을 것으로 장난치면 안 된다고 아이들을 따끔하게 나무란 것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게 그렇게 감동할 일인가?’
밥 한 톨도 농부의 피땀으로 키운 거니 아껴야 한다는, 상당히 귀족적이지 않은 한국식 마인드에서 비롯된 내 멋대로의 잔소리였을 뿐인데…….
난 어딘가 쑥스러워서 볼을 살짝 긁었다.
“뭘요…….”
“아르비체 님이라면, 어쩐지 그만두지 않고 가정 교사 일을 오래 해 주실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블리에 화이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9/198)]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떴다.
첫날 지켜본 바로는 아르비체 그린은 사람들과 전혀 친해지지 못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수월하게 호감도를 올려도 괜찮은 걸까?
앰버가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블리에 씨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얼른 청소할 사람을 더 보내겠다며 바삐 사라졌다.
블리에 씨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서야 앰버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꽤 키가 작은 앰버는 내 양손을 꽉 움켜쥐고서 투명한 밤색 눈을 빛냈다.
“……아르비체 님께선 저희 따위 우습게 생각하셔서 말을 안 거신다는 소문이나, 어차피 곧 그만두고 남작가로 돌아가실 거라던 소문 같은 거 전 안 믿어요! 이렇게 친절하신 분이신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사용인들과 아르비체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소문이 있었구나.’
하긴, 갑자기 가정 교사로 온 주제에 제 신세 한탄만 하느라 방에서 제대로 나가지도 않은 모양인데 좋은 이미지를 쌓을 시간 같은 건 없었겠지.
뭐, 그만두겠다는 소문 자체는…… 헛소문이 아니라 정말 그럴 참이었던 것 같지만.
‘그리고 나도 그만둘 생각이었고.’
인제 와서 그만둘 수 없게 된 건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어쩐지 양심이 찔리는 걸.’
난 앰버의 손을 마주 쥐었다.
“앰버라고 했어? 난 친한 사람이 없어서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는데…… 그렇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앰버만 괜찮으면 자주 이야기하자.”
“정말요? 정말이죠?”
“그럼.”
“……제가 이렇게 실수만 했는데, 화도 안 내시고 이렇게 좋게만 말씀해 주시다니…… 앞으로 아르비체 님께 더 잘할게요.”
앰버가 눈을 반짝이며 결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앰버 레몬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20/99)
호감도 이벤트 : 드레스 업]
호감도 이벤트 이름이 ‘드레스 업’?
그게 뭔지 잠깐 생각하는데, 앰버가 조잘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르비체 님, 오늘 오후에 있는 다과회 명단에서도 뵈었어요. 참석하시는 거죠?”
“어? 어…… 그렇지. 모처럼 초대해 주셔서.”
“옷도 제가 다 망쳐 버렸으니까, 다른 옷이랑 머리하시는 거 제가 도와드릴까요? 저 이래 봬도 솜씨가 꽤 좋아요. 시녀로 발탁될 뻔한 적도 있다니까요?”
“……어?”
“아르비체 님도 어차피 저희 공작님께 관심이 있으신 거죠? 후후, 다 알아요. 눈빛만 봐도.”
‘아닌데, 절대로 아닌데. 내 눈빛이 뭐가 어때서?’
도리질을 치기도 전에, 앰버가 보조개까지 들어가도록 방긋 웃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블란테 공주님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 드릴게요. 어머, 시간 좀 봐. 준비하려면 빠듯하네요. 어서 가요!”
“아니, 공주님에게 뒤지지 않을 필요 없어. 괜찮아…….”
“자자, 부끄러워하지 마시고요.”
주목을 사는 게 제일 싫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의견을 피력해 볼 틈도 없이 복도를 치울 하인들이 도착하자 나는 앰버에게 떠밀리듯 내 방으로 올라갔다.
앰버와 나는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앰버는 짐조차 제대로 풀지 않은 내 방의 꼴을 보고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옷장과 짐에서 옷을 살펴봐 주었다.
그린 남작가의 가난한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편없는 옷들을 본 그녀의 손이 한참 방황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조금 답답해 보일 정도로 목깃이 올라오는 밝은 회색의 수수한 드레스를 골랐다.
“정말로 이걸 입으실 거예요……?”
앰버는 정말 이것만은 말리고 싶다는 얼굴로 다른 드레스들을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하긴 어깨를 부풀리고 목깃이 턱 끝까지 올라오는 회색 드레스는 모르긴 몰라도 시대를 100년은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이상해 보여?”
“하지만 어깨를 부풀린 이런 스타일은 저희 할머니 대에 유행했던 옷인걸요.”
앰버는 모처럼 나를 꾸며 주기로 결심한 김에 그럴듯한 옷을 꼭 찾아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꼭 이 옷만 그런 게 아니라 옷장에 있는 옷들은 대체로 유행을 지날 대로 지난 드레스들이었다.
‘남작가를 나온 뒤로 사치는커녕 돈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모양인데?’
한참 옷장을 뒤지던 앰버가 화려한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 이 드레스 너무 아름다운데요?”
‘아, 저 드레스.’
아르비체가 가진 드레스 중 가장 눈에 띄는 드레스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르비체가 가진 옷 중에 그나마 제일 세련되고 예쁜 옷이다.
‘하지만 아름답게 입어서 뭐 하겠어? 게다가 옷이 조금 많이 파인 것 같기도 하고.’
레이커스의 사람을 잡아먹을 듯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떠오른 나는 손사래를 쳤다.
“어우, 아니야. 그냥 애들 보호자로 다과회에 가는 건데, 너무 노출도 심한 것 같고.”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출이 심하다고요? 겨우 어깨가 조금 파인 정도인데요? 요즘은 어깨에서 팔까지 다 드러나고 쇄골이 보이는 드레스도 많이들 입으시는 걸요.”
앰버의 말이 맞았다.
다시 보니 그렇게 노출이 심한 옷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딘가 맨살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게 육식 짐승의 이빨 앞에 스스로 목을 들이대는 느낌이 들어서 꺼려졌다.
내가 생각해도 과민한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