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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화 (8/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화

그러고 보니 호감도를 쌓는 것에 따라 이벤트 발생도 다르게 되는 게임이긴 했다. 게다가 뭐 레이커스쯤 되면 주요 인물이니 쌓이는 호감도에 따라 생기는 이벤트도 많겠지.

반갑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제 조카가 혼나는 걸 좋아하다니, 역시 저 자식 뭔가 이상한 놈이야.’

게다가 표정을 구기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좋아한다고?

하긴, 사이코패스의 머릿속을 이해하는 건 사이코패스밖에 더 있겠어?

‘됐어, 애초에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난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으로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더 안 드십니까?”

“괜찮아요.”

나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그는 뭐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했다가 빵을 손으로 집어 반으로 나눴다. 발효가 잘된 빵이 거미줄처럼 찢어지는 모양까지도 잔인하게 보인다, 이제는.

샤인과 루나도 다 먹은 모양이라 의자를 빼 주려고 하는데 레이커스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아, 맞다. 다과회.”

“네?”

“오늘 오후에 조촐하게나마 다과회를 하는데, 혹 시간 되시면 내려오시죠. 이런 거 안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재밌을 겁니다.”

다과회라.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다과회 이벤트는 궁정 연회 이벤트와 함께 호감도 높이기용으로 주로 이용되는 이벤트로, 레이커스 이외에도 그와 교류하는 고관대작들과 호감도를 쌓을 수 있었다.

‘글쎄, 크게 관심은 없는데.’

지금 이 살인마 하우스에 있는 것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목이 불안해 죽겠는데…… 누굴 더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레이커스와 어떤 식으로든 더 부딪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 반반하기 그지없는 살인마와 엮이는 동안, 아르비체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자신도 없었고.

어떻게 거절해야 잘 거절하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레이커스가 입술로 호를 그리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누군가를 초청하고 이리 대답을 오래 기다려 보긴 처음이군요.”

‘……와, 저 잘난 걸 이렇게 잘 알다니. 재수 없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그가 내 거절을 짐작했다는 듯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공주님께서도 참석하십니다. 제이슨 씨나 리나, 캐서 양도 오시고요.”

‘캐서?’

캐서 헌트.

귀가 번쩍 뜨였다.

‘분명히…… 그 이름을 봤어.’

희생자 명단에서 몇 번이고 보았지만, 가장 최근에 본 건 사건 수첩에서였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곧 죽을 것이 예고되어 있을 뿐.

아직은 추론에 불과하지만, 사건 수첩에 기록되는 것은 어느 정도 게임 루트가 확실히 정해져서인 것 같았다.

아마……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녀는 정말로 희생자가 될 거다.

하지만…….

‘고작 조연에 불과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그냥, 내버려 둘까?’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얌전히 있다가…… 경고만이라도 해 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것을 한참 보고 있던 레이커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린 양께선 아무래도 저보다 다른 손님들께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

너무 놀라서 목소리에서 삐끗한 소리가 다 났다.

그가 픽 웃으며 내게로 눈을 돌렸다.

“그린 양이 이렇게 재밌는 분이라는 걸 왜 진즉 몰랐을까. 그럼 좀 더 재밌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요.”

‘좀 더 재밌게’라는 말에 소름이 온몸을 내달렸다.

‘그게 무슨 뜻인데!’

레이커스가 나를 재밌어하는 듯한 눈빛에 쥐고 있던 냅킨을 얼른 내려놓았다.

먹잇감이 된 기분에 안 그래도 없던 식욕이 빠르게 뚝 떨어졌다.

레이커스의 ‘재밌게’란 뭘까?

온갖 공포 영화와 살인과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들에 나오는 장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전기톱, 쇠 수갑, 도끼…… 그리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더 많은 장비들.

‘정말 알고 싶지 않은데.’

아름다우나 어딘가 소름 끼치는 그로부터 간신히 시선을 떼어 낸 내 눈에 루나와 샤인이 손을 번쩍 든 게 보였다.

어딘가 초롱초롱한 눈빛이 뭔가를 바라는 눈치다.

“루나, 샤인. 둘 다 얌전하게 밥 잘 먹었네. 잘했으니까 이따 칭찬해 줄게.”

“응! 그런데 선생님도 다과회 가요?”

“와! 신난다!”

나는 신이 나서 입꼬리가 하늘까지 올라간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였다.

녀석들은 내가 자기들 삼촌을 연쇄 살인마라고 의심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테지.

“선생님 가면 우리도 가도 된댔잖아, 그렇죠?”

“그렇죠?”

아무래도 돌볼 사람이 생기면 다과회에 참석해도 된다고 해 뒀던 모양이었다.

레이커스는 눈썹을 슬쩍 늘어뜨렸다. 그게 그 특유의 고민하는 얼굴인 모양이지.

‘얼굴이 워낙 잘생겨서 눈썹 하나만 움직여도 세상 비극을 모두 짊어진 남자 주인공 같네.’

나는 사랑스럽고 우수에 젖어 보이는 꼴이 보기 싫어서 부러 시선을 떼어 냈다.

그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그린 양은 오늘 따로 초대한 거니까, 너희들이 있으면 편히 연회를 즐기질…….”

아니다.

‘애들이 같이 가면, 내가 살 확률이 확 올라가지 않겠어? 설마 조카 앞에서 날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래. 이렇게 귀엽고 의지가 되는 존재들을 거절한다니 말도 안 된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을 테니 한 번쯤 참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게다가 본래 아르비체 그린은 교류하는 사람이 없어 죽은 뒤 평소 행적을 알려 줄 사람조차 없다고 했다.

‘친한 사람을 만들 수 있으면 좋고, 여러 가지 루트도 탐색해 두는 게 생존 확률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몰라.’

난 황급히 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아뇨. 같이 갈게요.”

“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레이커스는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정 원한다면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는 다과회 참석에 신이 잔뜩 났는지 양손을 번쩍 들고 흔들어 댔다.

아르비체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모가 다가와 아이들의 입매를 정리해 주었다.

어제 많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 둘을 가르치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 입장에선 전문가에게 배우지 못하고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와 노는 게 좋은 교육 환경은 아닐 테지만…….

일단 공포 게임 속의 살인마 저택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요한 건 생존이지 교육 환경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나가지 말라는 레이커스의 말에 따라 오늘은 집 안에서만 지내기로 했다.

샤인과 루나는 그간 해 오던 대로 내게 자꾸 시비를 걸거나 버릇없는 말을 해 오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철저히 무시하거나 바로잡아 주자 그런 태도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교정되었다.

아이들이 천성이 나쁘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호감도가 오른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르비체 그린의 가방에 있던 학습지의 내용은 굉장히 단조롭고 쉬운 산수였다. 그것들을 아이들에게 풀게 하며 두어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둘에게 보상으로 동화를 읽어 주기로 했다.

TV도 유튜*도 없는 세계관이다 보니 아이들은 동화에 생각보다 훨씬 열광했다.

나는 책을 고르다가, 둘을 담요에 감싸 내 곁에 앉히곤 내가 알고 있는 동화를 즉석에서 들려주었다.

살인마의 조카인 것도 모자라 공포 소설이나 들으며 자라다니, 너무 가엾어서.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아서까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인어라든지, 빵 부스러기를 흘리며 숲으로 간 다음 마녀의 먹이가 되는 아이들 같은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샤인도 루나도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내 옆에 바싹 붙어 있는 게 좀……. 문득 이 세계에 있는 동화책보다 내가 해 주는 이야기가 과연 덜 공포스러운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이 들긴 했지만…….

어쩐지 그 뒤로 샤인이 시비 거는 어조를 그만두고 순순히 구는 걸 보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긴 하다.

동화책을 읽어 준 효과인지, 아이들은 이른 시간임에도 잠자리에 들겠다고 올라가 버려서 나는 제법 넉넉한 자유 시간이 생겼다.

어쩔까 생각하다가, 나는 우선 집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무슨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앞날이 너무 캄캄해서.

‘어쨌든 지금은 사건 수첩에서 이름이 지워졌지만, 아르비체 그린의 이름이 언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는 거잖아.’

아르비체가 플레이어도 아닌데 레이커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는다거나, 경찰에 제보한다든가 그런 대단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 이 저택은 증거와 아이템 수집을 하는 중요한 장소 중 한 곳이었다.

‘내 몸을 지킬 만한 뭔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이 저택을 방문하는 것은 좀 더 미래 시점이라 그런지, 아이템 상자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공작저 내를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알아낸 것은 이 공작 가문에 대한 쓸데없는 정보들뿐이었다.

공작 가문의 DNA가 무척 강하다는 것과 덕분에 대대로 잘생겼다는 정보 같은 것?

역대 리어먼드가 가주의 초상화가 1층 복도 중앙에 죽 나열되어 있는데, 모두 한숨이 나오게 잘생기고 서로 닮은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고혹적이고, 선이 가늘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부진 미남상.

‘뭐, 그러면 뭐 하겠어. 그 끝에 걸려 있는 얼굴이 살인마의 얼굴인 것을.’

사람이 참 그렇다. 이 게임을 그저 안전한 곳에서 플레이하기만 하면 되던 시절에는 2차 창작물까지 찾아볼 만큼 잘생긴 캐릭터를 흠모했는데, 지금은 그저 소름 끼치고 무섭기만 했다.

저택 안을 둘러보던 나는 가끔씩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아주 레이커스 특유의 발소리까지 구분할 수 있는 지경에 도달했다.

구두 굽이 바닥을 끌지 않고 깔끔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내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 굳이 마주치지 않을 수 있으면 안 마주치는 게 심장에 좋아.’

나는 황급히 복도를 돌아 줄행랑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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