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화
가정 교사 노릇을 하긴 해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돈만 적당히 모이면, 살인마니 게임의 메인 줄거리니 하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들과 조심해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생각도 정리될 것 같았다.
사건 수첩에는 다음 예상 피해자의 명단이 있었는데, 그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지금 남을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게임 속이 너무 사실적이다 보니까, 누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것도 좀 찝찝했다.
나는 사건 수첩을 앞뒤로 팔랑팔랑 넘겨보았지만 새로 추가된 것은 없었다.
그래도 다양한 루트도 이미 알고 있고, 전개에 대해서도 그렇게 무지하지 않으니까.
범인을 잡겠다는 것보다 살아남겠다는 목표가 훨씬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원래 아르비체 그린이 빨리 죽어 나가는 조연이었다는 점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 점도 아르비체가 행동하는 방향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으니까.
‘최대한 쥐 죽은 듯 지내자. 그러면 괜찮을 거야.’
그러면…… 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악몽도…… 아니, 꿈인지 현실인지도 이제 구분되지 않는 이 상황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그래야지.
그럴 수 있을 거다.
‘살인마 따위의 호감도를 높여서 과연 좋은 일이 생길 것인지 좀 걱정되긴 하지만…….’
레이커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와 처음 만났던 그 오싹한 공포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공포심에 엉켜 있는 오싹한 호기심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침대로 가서 몸을 눕혔다.
하지만 레이커스가 나를 바라보던 그 묘한 시선과 혼잣말이 자꾸 맴돌았다.
“생각보다는 재밌는 분이신 것 같군요.”
‘재미는 얼어 죽을.’
게다가 팔자에도 없는 가정 교사 노릇에 대한 걱정까지 뒤섞여서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복잡한 속을 달래느라 새벽 동이 다 틀 때쯤에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 *
“아르비체 그린 양!”
“왜 안 일어나? 게으르네!”
다음 날 아침.
침대에 파묻힌 나를 깨운 건 요란한 고함 소리였다.
유교 사회에서 자란 내 귀에 고작해야 예닐곱 살 되었을 아이들의 버릇없는 목소리들이 들리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나는 베개를 내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무늬가 거의 없는 단색의 천장, 꽃무늬가 가득한 벽지, 목조 가구들과 활짝 열린 창밖으로 우람한 정원수가 가득 보였고…… 그리고 금발 은발의 아이 두 명이 침대 옆 목조 장식에 매달려 있었다.
확실한 건 DAY 2의 아침이 밝았다는 것.
‘아직 게임 속이잖아.’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양손으로 뺨을 착착 두드려 정신을 차린 뒤 침대에서 번쩍 일어났다.
“와아! 일어났다!”
“와!”
금발과 은발 아이는 서양 동화책에 나오는 삽화처럼 서구적으로 귀여웠다. 뽀얀 피부와 수정 같은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마 사람이 자는 침대에 기어 올라와 방방 뛰기 시작하지만 않았더라도 조금 더 귀여웠을 거다.
어쩌다 공포 게임 속에서 태어나, 심지어는 살인마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이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교걸로 살아온 나는 얘들을 봐줄 수가 없었다.
‘귀엽긴 한데, 얘들하고 계속 지내야 할 테니 호감도는 좀 포기하더라도 할 얘긴 똑바로 해야겠어.’
난 얼굴을 부러 딱딱하게 굳히고 둘을 바라보았다.
“샤인, 루나. 누가 이렇게 예의 없이 침대에서 뛰지요?”
웃음기 하나 없이 다그치는 말에 둘은 그 즉시 동작을 멈췄다.
마치, 이런 꾸짖음을 들은 것 자체가 처음이라는 듯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응?”
“응? 하지만…….”
난 둘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서 똑바로 나를 보고 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반말하는 것도 안 되고, 선생님의 잠자리를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것도 무례한 일이에요. 알겠어요?”
“뭐야…….”
금발의 소년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흐아앙……!”
하지만 은발의 여자아이는 고작 그만한 나무람에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곤 나에게서 달아나듯 멀리 도망가 문간에 가서 섰다.
그렇게 야심차게 나한테 ‘아르비체 그린 양!’이라느니 ‘게으르네!’라느니 해 놓고선, 고작 그 한마디에 이렇게 상처받은 듯 굴다니.
버릇이 없다기보다, 아무도 이 아이들을 통제하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더 이상 화를 낼 기력도 없어져서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자자, 기분 풀어요. 선생님은 아르비체 그린이라고 해요. 우리 샤인이와 루나도 어디 한번 자기소개 해 볼까요?”
이미 아르비체와 샤인, 루나는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는 새삼스러운 자기소개에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내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더니 좀 분위기가 유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오빠라고 샤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9살, 샤인이야.”
“……흑, 저는 7살, 루나입니다…….”
반말을 찍찍하는 금발 아이가 샤인, 갑자기 존댓말을 쓰기로 한 동생이 루나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그러고 보면 둘 다 정말 사랑스럽게 생겼다.
특히 루나는 젖살도 다 안 빠졌는지 새빨간 볼이 통통해서는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리는데, 눈이 새파란 서양 아기 특유의 미친 귀여움이 있었다.
샤인도 이 잘난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아서 수려하기 짝이 없는 금발의 아이였는데 일부러 그러는지 표정을 찌푸려 보이는 게 더 귀여웠다.
나는 성이 풀릴 때까지 둘을 꽉 안아 주곤 하나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엽기도 했고, 어딘가 불쌍하기도 했다.
샤인과 루나는 아르비체를 며칠째 보는 것일 텐데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기분 상한 듯 굴더니, 귀여움받는 거로 이렇게까지 좋아하다니. 괜찮은 걸까.
“선생님, 화 안 났어?”
“선생님, 화 안 났어요?”
둘은 갑작스러운 내 태도 변화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선생님은 샤인과 루나가 제일 좋아요. 버릇없이 굴지만 않으면 화내지도 않지.”
“정말?”
“정말요?”
“그럼.”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20/99)]
[루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30/99)]
잇달아 뜬 두 개의 메시지에 나는 픽 웃었다.
‘뭐야, 손쉬워.’
화를 내서 좀 더 거리를 둘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근거 있는 행동이라면 받아들일 만큼의 합리적인 마음은 갖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들보들한 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기분이 꽤 좋아진 나는 씻고 나올 때까지 거실에 가서 기다리라고 아이들을 내보냈다.
나는 찬물로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서 옷장을 열었다.
어제 본 것처럼 뭐 별 볼 일은 없는 옷장이었다. 수수하기 짝이 없는 옷 몇 벌이 늘어서 있었고, 잘 다려져 있는 에메랄드색 원피스 한 벌이 따로 걸려 있었다.
원피스를 손으로 한번 쓸어 보았다. 원단이 그나마 부드러운 것이 아무래도 이 옷은 특별한 날에만 입는 것 같은데…….
큰 장식은 없는 오프숄더에 머메이드 라인으로 살짝 붙는 드레스였다. 예쁘긴 한데 이걸 입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색이 될 것 같다.
뭔가 사정이 있을 거 같은 옷이다.
‘다른 캐릭터들의 사정은 대화를 통해 점점 더 알아 나갈 수 있지만, 막상 아르비체의 사정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수한 옷 중에서 단정해 보이는 붉은 투피스를 골라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손바닥만큼 커다랗고 동그란 모양의 나무 빗은 길이 잘 들어 쓰기 좋았다. 머리를 말리고 빗어 양쪽으로 길게 땋아 내린 뒤 거울을 들여다봤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에 하얗게 빛나는 투명하고 깊은 눈동자, 넓은 이마를 반쯤 가리며 떨어지는 연한 색의 머리카락. 창백하고 하얀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얼굴과 어색한 몸뚱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프로필에서 봤던 것처럼 아직 27살이다.
원래의 내 나이와 꼭 같은 나이.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아르비체 그린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담은 채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NPC 주제에 계속해서 본인만의 루트를 개척해도 괜찮은 걸까? 그러다가 이 공포 게임의 스토리 자체가 어그러져서,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게 되면 어쩌지?’
모르겠다.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점점 더 답답해지기만 했다.
잠들었다가 깨어도, 내게 주어진 새로운 현실을 당장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만 더 명확해질 뿐.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사건 수첩을 들춰 보았지만, 아르비체 그린의 이름은 다시 나타나 있지 않았다.
당장은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된 모양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죽을 예정이었던 캐릭터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
스크랩된 기사들 옆에 캐서 헌트라는 여자가 다음 희생자 후보라는 것을 흘끗 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수첩을 서랍 바닥 아래에 꼼꼼히 숨겼다.
나는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가볍게 목을 죄어 오는 공포를 외면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손을 내밀어 거울을 짚었다. 마치 아르비체가 내 손을 잡아 주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두려움을 떨쳐 내려고 일부러 생각을 끊어 내고 어제 미리 챙겨 놓은 책이며 수업 노트가 든 천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블리에 씨가 내게 다가왔다.
“잘 주무셨어요?”
방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이 암울한 저택에서는 정말 큰 위안이다.
“덕분에요.”
“아이들은 2층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가셔서 함께 식사하시면 될 것 같아요.”
‘살인마와의 겸상이라니……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됐지.’
“네, 지금 곧 갈게요.”
대답하면서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