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화
나는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 경관들 앞으로 가서 섰다.
“저, 죄송한데요.”
“뭡니까?”
경관들 중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귀찮다는 얼굴을 보자,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대로 변명을 대지 않으면 말도 못 붙여 보겠는데.’
원래는 상호 작용 버튼만 누르면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젠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난 입술을 가볍게 짓씹고는 뻔뻔하게 말했다.
“트리버 경감님께 받을 게 있어서 왔어요.”
“흠? 받을 거라니?”
……이건 예상 못 했다.
NPC와도 처음부터 관계를 쌓아야 하는구나.
나는 겉으로 내 곤란함과 불안감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제 고용주이신 레이커스 리어먼드 님께서 이번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계셔서요. 경감님께 말씀드리면 아실 거예요.”
뻔뻔한 거짓말에 경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레이커스 리어먼드라는 이름이 갖는 이름의 위력은 컸다.
개국 공신인 리어먼드가의 수장이자, 이 나라의 상권 중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을 만큼 국왕의 신뢰가 두터운 자가 아닌가.
그리고 보아하니 그 살인마 자식은 경찰 단체에 부지런히 기부도 하는 모양이었고.
경관은 나를 트리버 경감에게 직접 데려다주었다.
‘휴.’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분증 같은 게 존재도 하지 않는 시대다웠다.
하긴, 레이커스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 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다.
얼굴이 새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경감은 빨간 코와 볼이 인상적이었는데 게임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산타클로스 같았다.
트리버 경감은 경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서야 나를 돌아보았다.
게임으로 보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보니까 진지한 목소리와 산타같이 부드러운 외모 사이의 격차가 웃기긴 하다.
이런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더 재밌게 감상할 여유가 있었을 텐데.
나는 목을 가다듬고 트리버 경감에게 말을 건네었다.
“저, 경감님. 안녕하세요?”
트리버 경감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가, 문득 눈살을 팍 찌푸렸다.
“……거, 그린가의 아가씨 아니신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감은 조금 당혹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여긴 무슨 일이오?”
“레이커스 님께서 이번 사건에 대해 궁금해하셔서요.”
경관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둘러대자, 트리버 경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안색을 꽤 오래 살폈다.
“거, 아가씨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될지 모르겠소.”
‘날 걱정하는 건가?’
경감은 초조하다는 듯 손을 주머니에 넣어 담배를 끄집어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말씀드려야지요.”
나는 긴말 나눌 필요도 없이 사건 수첩만 받으면 그만이었지만, 트리버는 마침 말 상대를 찾아서 잘됐다는 듯 수다스레 떠벌리기 시작했다.
“실은…… 남작이 며칠 전부터 계속 찾아와서는 누군가 협박장을 보냈다느니,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다느니 했거든.”
남작이란 바로 불에 타 죽은 다섯 번째 희생자 베리아 남작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느라 잊고 있었는데 플레이하면서 들었던 대사가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음 문장을 속으로 나란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믿지 않았지.’
“그런데 나는 믿지 않았지.”
경감은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자꾸 흘러내리는 에메랄드빛 머리칼을 귀 뒤로 정리하면서 경감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이 떠버리 경감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려면 이 대화를 좀 더 들어 줘야 하나 봐.’
난 어쩔 수 없이 급해 죽겠는 속내를 표현하지 않고 애써 맞장구를 쳐 주었다.
“왜죠?”
경감이 다른 사람들이 들을세라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더니 소리를 죽여 말했다.
“왜긴 왜겠소. 그 양반 아무리 봐도 미친 사람 같았거든. 뜬금없이 제가 연쇄 살인마의 표적이 된 것 같다고 하질 않나.”
“그걸 어떻게……?”
“그러니까 말이오. 하지만 지금까지 표적은 다 여자였으니 우린 그냥 미친 양반이구나 싶어서 말만 들어 주고 보냈소. 아, 우리도 일이 산더미 같은데 그걸 일일이 다 들어 줄 수가 있겠소? 내, 참.”
트리버는 중얼거리다가 아차 싶었는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곤 담뱃재를 이파리에 말아 만든 싸구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곤 내 앞에 대고 연기를 뿜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양해도 없이 담배라니?’
게임 속에 플레이어가 들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쓰게 웃으며 기다리자, 경감이 건물 위를 쓱 쳐다보곤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화려한 꼴로 죽을 줄 알았나. 우리 서는 뭐…… 이제 속된 말로 뭐 된 거지. 아직 시체를 못 내려서 자세히는 못 봤다만,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끔찍한 꼴로 말려 죽였는지…… 에잉, 쯧.”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리는 사이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바짝 마른 시체, 미친 듯 군 피해자, 협박장.
보통 사람은 흉내 내기 힘든, 비정상적인 모양으로 말라 죽은 시체만 보아도 베리아 남작이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연쇄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을 거다.
‘당장은 플레이할 때 얻었던 정보와 거의 비슷해.’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캐릭터에게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는 뜻으로 적절한 호응을 해 주는 것도 중요했다.
“정말 고생이 많으세요. 어쩜 이런 일이 고르고 골라 하필 경감님 구역에서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트리버 경감이 피곤한 기색으로 담배 연기를 몇 번 더 내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말이 그거라니까!? 아가씨가 뭘 좀 알아듣는구먼.”
[트리버 루악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30/99)
호감도 이벤트 : 사건 수첩]
‘사건 수첩!’
어떻게 말을 꺼내야 받을 수 있을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마음이 푹 놓였다.
트리버 경감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눈에 익은 두꺼운 가죽 수첩을 하나 꺼내 내 손에 올려 주었다.
“아차. 이렇게 말로만 떠들어 봤자 뭐 하겠소? 여기에 대략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으니, 리어먼드 공작님께 잘 전달해 주시오.”
“네.”
“거, 공작님의 신세를 항상 지고 있으니 주는 거지만…….”
신세라는 말에 콧방귀만 나왔다.
‘용의선상에서 빠지려고 돈이라도 지원하는 모양이지.’
나는 레이커스에 대한 경멸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감은 내가 수첩을 품에 넣는 것을 지켜보다가 곤란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가씨는 굳이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난 그 말이 으레 하는 심부름꾼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만 생각했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감사 인사를 남긴 뒤 몸을 돌렸다.
‘어쨌든 필요한 건 다 얻었어.’
이제 여기에서 멀리 달아나기만 하면 된다.
경감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는 사건 수첩을 슬쩍 열어 봤다.
첫 번째 장에는 방금 보았던 불타는 고저택의 사진이 실려 있었고, 그 옆에 용의자와 관련된 메모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유력 용의자 : 모리슨 알터(신문 배달부)
오후 8시경 이자가 4층의 방에 방문하는 것을 목격한 증언이 다수 있음.
3번째 사건 장소인 니스가에서도 목격된 바 있음.]
하지만 나는 이미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를 쫓던 루트가 막히는 것을 이미 겪었으니까.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다음 장을 팔랑 넘겼다.
거기에는 몇 가지 스크랩된 기사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 옆에는 몇 명의 유력 예상 피해자들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나는 그대로 손을 뚝 멈췄다.
몇 가지 메모 사이에, 아주 간략하게 이런 메모가 있었다.
[유력 예상 피해자 : 아르비체 그린.
거주지 : 그린 저택
참고 : 그린 남작가에 아르비체 그린 앞으로 온 편지에 까마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함.]
‘편지?’
아르비체의 짐에 그런 편지는 없었으니, 리어먼드 가에 가정 교사로 온 뒤에 도착한 편지인 것 같다.
‘……이 게임에서 까마귀 그림의 편지는 곧 죽음의 선고잖아.’
범인은 제가 정한 표적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이 게임의 진행을 본 구간까지는.
난 입술을 짓씹었다.
‘트리버 경감이 날 보고 당황한 이유가 이거였군. 수첩을 보지 말라고 한 것도.’
유력한 예상 피해자라서.
순간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골목 입구였다.
일부러 상기하려 애쓰지 않아도 뒷덜미가 쭈뼛해지는, 안 좋은 기억이 묻어 있는 장소.
‘레이커스 리어먼드 공작이 지금 저 골목 안에 있겠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사람을 홀릴 듯이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그의 은색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오싹하게 굳었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려 도리질을 치며 어떻게 걷는지도 모른 채 고저택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방에 올라온 나는 이불을 둘러싸고 침대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꾸려 둔 짐 더미를 바라보고 있어도, 속이 답답하기만 하고 뭔가 속 시원하게 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질 않았다.
‘아까 트리버 경감에게 가서 사건 수첩을 달라고 할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해 달라고 말할 걸 그랬나……?’
손톱을 딱딱 깨물며 온갖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건 수첩에는 내가 그린 저택에 살고 있다고 되어 있어.’
왜지?
나는 시야의 구석에 있는 창을 눌러 아르비체 그린의 정보를 펼쳐 보았다.
[아르비체 그린]
나이 : 27
직업 : 리어먼드 공작가의 입주 가정 교사
출신 : 그린 남작가의 첫째 딸
호감도 : 블리에 화이트 Lv.1
트리버 루악 Lv.1
(이벤트: 사건 수첩)
보유금액 : 0G
거주지 : 그린 저택
별 특이 사항이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을 닫으려다가, 나는 순간 멈칫하고 다시 한번 그 정보를 차근히 읽었다.
거주지가…… 그린 저택이라고?
‘그린…… 저택?’
분명히 아까, 이 집에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거주지는 리어먼드 저택으로 되어 있었다.
‘왜 사건 수첩과 똑같아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