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3화
나는 멍하니 누운 채로 눈앞의 안내창을 올려다보았다.
심장 고동이 미친 듯이 둥둥 울렸다.
‘지금 말 잘못 꺼냈다가 살해당한 거야? 그래서 하트가 하나 줄어든 거야?’
공포심에 뒷골이 다 당겼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정말로 무서운 건, 바닥에 넘어졌을 때 느낀 쓰라림이었다. 아니, 살해되는 순간의 고통과 절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대한 공포심이었다.
골목에서 쫓기던 공포는…… 다시 상기하는 게 겁날 정도였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컨트롤러를 쥐고 게임을 즐기고 있을 때도 쫓기는 장면이라면 몇 번이고 겪어 봤지만, 그런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다.
플레이어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아내는 쪽의 배드 엔딩을 겪지, 스스로 살해당하지는 않는다.
‘현실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현실이었어.’
정말로 아르비체 그린이 된 거다. 이 하트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나는 눈을 뜨고 슬며시 손가락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사라지지 않은 하얀 글씨가 눈앞에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로 시야의 왼쪽 위, 상태창에는 두 개의 하트만 남아 있었다. 본래 세 개였던 하트 중 제일 오른쪽의 것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남은 하트는 두 개다. 그러면 하트를 다 쓰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게임의 당연한 룰이다.
하트가 모두 소진되면, 게임은 그냥 거기서 끝나 버리는 건.
불길한 상상에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쩌다가 이런 게임 속에 들어와 버린 거야, 정말.’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 봐도, 마지막 날 기억이 선명하지가 않다.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머리를 털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기억이 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어?’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다시는 죽지 않는 거야.’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쥐 죽은 듯이 지낼 거다.
꿈이든 뭐든 좋으니까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게임? 범인? 그런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살자. 살아남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나는 제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게임의 메인 흐름에서 멀리 벗어나자.’
추리형 공포 게임인 이상, 이 게임의 큰 줄기에는 죽음과 기이한 사건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메인 줄기 자체가 연쇄 살인마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거니까.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보니, 겨우 빨리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시야 왼쪽 위의 끝에 떠 있는 캐릭터 이미지를 향해 손을 뻗자 터치스크린처럼 정보를 조회할 수 있었다.
[아르비체 그린]
나이 : 27
직업 : 리어먼드 공작가의 입주 가정 교사
출신 : 그린 남작가의 첫째 딸
호감도 : (호감도가 1 이상 오른 캐릭터가 있다면 여기에 표기됩니다.)
보유 금액 : 0G
거주지 : 레이커스 리어먼드 저택
그 이외에도 나는 이것저것을 눌러 보았지만, 따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더 조회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괜히 찝찝하게 수집된 엔딩이 하나 있다는 표시나 봤을 뿐.
방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무래도 이게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럴싸한 아이템이라도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서랍까지 다 뒤져 보았지만, 풀지도 않은 짐 가방이 하나 나온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안에 든 물건들은 가정 교사로 지내면서 쓸 책 몇 권과 본가와 주고받은 듯한 개인적인 편지들뿐.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기나 방어구, 그것도 아니면 종잣돈 같은 것이었는데…… 그중 어느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0골드밖에 없는 게 말이나 되냐고.’
나는 맥이 풀려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으니까, 문득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정말로 이 캐릭터…… 초반에 죽어 나갈 그저 그런 조연이었을 뿐이었구나.’
돈 같은 걸 굳이 설정해 둘 리가 없을 만한.
지난 엔딩의 공포가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도리질을 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일단 이 저택에서 벗어나는 거야. 가정 교사 일부터 그만두자.’
레이커스와 마주치는 일을 줄여야 한다.
연고지가 있는 것 같으니 거기로 가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슬쩍 편지 몇 통을 살펴본 결과 아르비체 그린은 진짜 어지간히 가난한 남작가 출신이었던 모양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 되는 유산마저 고모에게 뺏긴 것 같았다.
그 고모가 아르비체를 데리고 있자니 군입이 하나 늘어서 억지로 이 일자리를 소개해 준 모양이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고, 배운 것도 많으니 잘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워낙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캐릭터가 소심하고 특징이 없는 캐릭터이다 보니 당최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
‘뭐…… 그만두고 돌아왔다고 하면 그래도 재워 주고 먹여 주지 않을까?’
가 봤자 박대당하긴 하겠지만 뭐든 살인마의 집에 머무는 것보단 나을 거다.
나는 별것 있지도 않은 짐을 들고 나가기 좋게 잘 싸 두고, 블리에 씨가 올 시각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리 오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머, 깨셨어요?”
검은 메이드복이 참 잘 어울리는 동그란 안경테의 블리에가 1회차 때와 똑같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웃어 보였다.
“전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블리에 씨가 눈을 깜박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 완전 다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블리에 씨가 이렇게 절 항상 걱정해 주시니까요.”
“어머머. 정말 괜찮아지셨나 봐요.”
“블리에 씨 덕분에 기운을 차린걸요? 항상 저택에 있는 모두를 꼼꼼히 챙겨 주시잖아요. 늘 감사하답니다.”
띠링-!
[블리에 화이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27/99)]
아주 소폭이긴 하지만 저번보다 더 구체적인 칭찬이라 그런지 호감도가 오른 폭이 컸다.
‘이 게임……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내 말에 따라 반응이 나타나는 식이라, 꽤 미세 조정되는 부분이 많나 본데?’
기분 나쁠 정도의 치밀함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표정을 구기지 않으려 애쓰며 블리에에게 슬쩍 이야기를 흘렸다.
“저희 고모님께 한번 다녀오려고 하는데, 외출은 미리 말씀만 드리면 될까요?”
“주말은 자유롭게 외출하셔도 괜찮아요. 평일에도 일과 후에는 편히 쉬시고요.”
‘그만두겠다고 지금 말하는 것보다 좀 더 확실하게 거처를 확보하고 말하는 게 낫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창밖에서 요란한 비명이 높게 울려 퍼졌다.
익숙한 소리.
“꺄아아아악!”
“……이게 무슨 소리죠?”
태연한 나와는 달리 블리에 씨가 황급히 창가로 다가갔고, 나도 그 옆으로 가서 멀리서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는 멀리서 보기에도 썩 불길했다.
“추가 지원 요청하라! 불길이 잡히질 않아!”
“저쪽이다! 잡아라! 살인마 자식, 오늘이야말로 도망치지 못하게 해 주마!”
“잡아라! 혼자 다니지 마라!”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고함.
똑같은 일을 이렇게까지 겪고 있자니 2회차라는 실감이 확 들었다.
블리에 씨가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주인님께서 아직 밖에 계시는데, 밖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모양이에요. 사람을 보내야 해서 전 이만 가 볼게요.”
“네.”
아르비체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그녀는 급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주인님께서 아직 밖에 계시는데’라는 말이 아까와는 썩 다르게 들렸다.
‘그 살인마 자식.’
그래, 레이커스가 사건 현장 근처에 있다는 건 이제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나는 오싹해져서 소름마저 돋은 팔을 문지르며 가방을 들고 튈 시간을 마음속으로 계산했다. 그러다 문득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 자체에 놀랐지만 이젠 여기서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 한다.
‘게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밍 아니겠어?’
파밍.
즉, 아이템을 얻는 것이야말로 게임을 풀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아이템이 사건 수첩이지.’
아르비체 그린의 죽음이 표시되어 있던 그 수첩 말이다.
지금까지 경찰들이 모은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하고, 플레이어가 모르는 소문들을 알려 주기도 하는 아주 편리한 아이템이었다.
아르비체 그린의 죽음 전후에 있었던 사건들은 대충 기억이 나니까, 그 수첩만 있다면 그린의 죽음이 실현되는 타이밍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사건 수첩은 DAY 1에 경감과의 대화를 통해서 받았었는데…….’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건 현장에 이벤트 NPC인 트리버 경감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바로 지금. 레이커스가 살인에 정신이 팔려 있는 바로 지금이 움직일 때겠지.’
도저히 무서워서 건물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질 않았지만, 1회차처럼 정신을 놓고 행동하지만 않으면 첫날부터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거주지를 옮길 작정이니까. 지금 얻어 두지 않으면 또 이 근방까지 오기 힘들 수도 있을 테고.
나는 재빨리 계단을 돌아 내려갔다.
저번과 똑같이 나를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는 사용인들의 시선과 마주쳤지만, 나는 최대한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지’
사용인 중 몇 명은 저번처럼 나를 외면하는 대신 의외라는 듯 어리벙벙한 얼굴로 얼떨떨하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번 지난 적 있는 복도와 계단을 지나 건물을 빠져나갔다.
다만 혹시라도 레이커스와 다시 마주칠까 봐 골목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큰길만 골라 걸었다.
여러 번 지났던 길을 또다시 걸어 무사히 군중에 섞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4층에 시신이 대롱대롱 매달린 불이 난 건물이 곧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나온 듯한 식솔들이 세상 잃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구경꾼들은 저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포 게임의 시작으로는 어쩌면 뻔할지도 모르는 장면이었다.
플레이할 때는 그저 진상이 밝혀지면 재밌겠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두 번이나 반복해서 보는데도 참담한 느낌은 옅어지지 않았다.
‘우윽.’
결국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순간, 고저택 입구에 서 있는 트리버 경감이 눈에 띄었다.
반가움도 잠깐이었다.
경관들 사이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 트리버 경감은 두터운 군중 무리와 경관들에게 에워싸져 있었다.
‘……저 사람한테 말을 어떻게 걸어?’
그에게 말을 거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