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설마.’
나는 설마설마하는 시선으로 아빠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그런 발표를 하겠어.
그러나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셰키나 오브리, 새 가족의 이름이다.”
아빠를 향한 ‘설마’는 늘 명중했다는 것이다.
“…아.”
“…….”
툭-
내가 이마를 짚는 것과 동시에 도시락을 느릿느릿 열던 셰키나의 손에서 뚜껑이 떨어졌다.
그녀는 당황한 듯 떨어뜨린 도시락 뚜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술을 마셨나?”
그녀가 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닐걸.”
보아하니 엄마랑은 이미 합의가 끝난 것 같고, 이노스도 놀란 눈이기는 했지만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이걸 허락도 안 받고 이렇게 하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좀 더 가까워진 뒤에 슬쩍 물어서 진행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나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셰키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달아났다.
“…내가 뭐 잘못했나?”
아빠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빠야 원래 내 딸이니 내 딸로 들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걸 좋아하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 셰키나는 여러 감정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다.
스스로에게 자신감도 없고, 심지어는 자존감마저 낮아진 상태다. 근데 저렇게 통보하면 당연히 당황하지.
“음, 진행이 빨랐어요.”
“어차피 네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럼 셰키나랑 상의라도 했어야죠.”
“…….”
아빠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엄마도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귀족들이란.
“당황해서 그럴 거예요. 예상하지도 못했고, 아직 그렇게 가까워지지도 않았잖아요.”
“…그렇군.”
“잘 대해 주세요. 근데 아빠, 어느 쪽이 언니예요?”
아빠가 힐긋 나를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곤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슬쩍 등줄기를 스쳤다.
아니, 사실 대답을 이미 들은 거라고 봐야겠지. 침묵이 대답이었다.
“근데 되게 빠르네요. 뭔가….”
“네 엄마랑은 편지로도 대화를 오래 나눴어. 그리고…, 네가 말해 주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눈치는 챘다.”
그때 말해 줬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근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저라도 놀랄 거예요.”
“…….”
아빠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기껏 나온 피크닉이 다소 침울한 분위기가 되었다.
불어오는 바람이나 코끝을 스치는 옅은 소금기가 섞인 냄새,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는 여전한데 말이다.
“제가 데려올게요.”
“…내가 가서 사과하는 편이 낫겠나?”
와, 저 입에서 사과라는 말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새삼 세월 많이 지났구나.’
우리가 만나고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서로 조금씩 바뀔 때가 된 거겠지.
물론….
“아니요, 아빠는 분명히 일을 더 크게 만들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근본이 바뀐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일을 맡길 순 없었지만.
“…다 컸다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하는군.”
아빠가 퍽 서운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꿍얼거리는 아빠의 등을 엄마가 가볍게 쓸어내렸다.
“다녀올게요, 잠깐만 계세요.”
“…그래.”
“이럴 땐 한동안 그냥 두는 게 낫지 않아?”
아빠가 수긍하는 사이 이노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그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가족 피크닉이잖아. 역시 누구 하나 빠지는 건 싫어.”
그렇게나 고대했던 시간이니까, 이 시간에 그녀도 함께했으면 했다.
‘기왕이면… 다음에는 카펠도 있으면 좋겠네.’
문득 든 생각에 나는 흠칫 놀라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아니지, 아직 애인이잖아.’
그것도 따지고 보면 기간제 계약 애인이 아니던가.
참 나, 카펠을 떠올리는 나도 이상하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셰키나도 딱히 싫은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래?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응, 감이지만.”
덧붙인 말에 이노스가 그게 뭐냐며 작게 타박하곤 웃었다.
그러나 나를 더 붙잡는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잔하면서 기다릴게. 도시락은 다 같이 먹자.”
“응!”
나는 활짝 웃으며 몸을 홱 돌렸다.
저택으로 향하자 밑에서 대기하던 집사가 작게 위층을 가리켰다.
그녀의 2층 방문을 열어봤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눈을 끔뻑이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슬쩍 발을 옮겨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 한가운데 뭔가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넌 왜 네 방 두고 여기에 있는 거야?”
“…….”
“저기요.”
“모래 묻은 옷으로 내 방 가면 침대가 지저분해지잖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이불 속에서 들려왔다.
아하, 내 침대는 더러워져도 된다?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가 헛웃음을 흘렸지만, 여전히 고개를 내밀 생각은 없어 보였다.
“빨리 나와, 도시락 먹어야 해. 나 배고파. 아까 네가 같이 가자고 나 기다렸잖아.”
“너나 먹어.”
“싫지도 않으면서 왜 튕겨.”
“…생각지도 못했어.”
“나도 몰랐어.”
같은 대답을 되돌려주자 셰키나에게선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어나면 기쁜 소식 하나 알려줄게.”
그제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셰키나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뭔데?”
“일어나면 알려준댔잖아. 같이 점심 먹을 거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싫다기보단 정말로 어쩔 줄 몰라 당황한 것이 뻔히 드러났다.
“…그러고 나와서 어떻게 다시 돌아가?”
“안 궁금해? 기쁜 소식.”
“…….”
내 말에 셰키나가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게 뭔데.”
“…….”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영 입술이 안 떨어진다. 아빠는 꼭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배고프니까 얼른 가자.”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소식은 뭔….”
“언니.”
이를 악물며 호칭을 툭 내뱉자 셰키나가 뒤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배고프니까 가자고.”
“…아하, 내가 언니구나?”
셰키나가 눈을 반짝였다.
다른 것보다 그게 신나는 모양이었다.
“응, 그러니까 언니도 엄마랑 아빠라고 불러야 해. 이노스도 오빠라고 부르고.”
내가 말을 덧붙이자 그녀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뭐, 노력이라도 하라는 거야. 아빠 성격이 너랑 똑 닮아서 저래.”
“…내가 뭐.”
“솔직하지 못하고 일은 저지르고 보고… 뒤늦게 후회하고?”
덧붙이는 말에 셰키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손을 잡은 채 돌아가자 옹기종기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대번에 우리를 반겼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을 저질러서 미안…하구나.”
크흠.
아빠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우리가 없는 사이 무슨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아니에요, 저도 갑자기 뛰쳐나가서 죄송했어요. 아, 아버지… 어머니….”
웅얼거리며 슬쩍 셰키나가 덧붙인 말에 두 사람의 눈이 확 커졌다.
“그, 그래.”
“…그래.”
엄마가 셰키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는?!”
이노스가 또 나섰다.
“…….”
셰키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멀었네.’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어설프지만 모든 가족이 모였다.
‘그래도 언젠가 가족이 되겠지.’
그래, 이 어설픈 모습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익숙해지는 날이 올 거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셰키나와 함께 넓게 펼쳐진 돗자리에 앉았다.
도시락의 음식은 조금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동안 먹어봤던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
“으음, 이 정도면 좀 사죄가 되려나.”
셀렘이 허공에 둥둥 뜬 채 팔짱을 끼곤 작게 중얼거렸다.
“…사죄로는 부족한가.”
사방에 깔린 번쩍거리는 보물들과 인간의 신체 일부가 허공을 넘실거렸다.
방 안 가득 쌓인 수많은 이름 모를 보물들을 앞에 두고도 셀렘은 아주 심각했다.
“…역시 하나 더 준비해야 할까?”
셀렘이 난감한 낯으로 읊조렸다.
그간 그가 사라졌던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래, 그리고 그 이유는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밝히기가 힘들었다.
“…좋아, 조금만 준비를 더 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끝낸 뒤에 가자.”
작게 중얼거린 셀렘이 비장한 표정을 하고는 보물이 가득 쌓인 창고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직도 폭풍은 채 지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