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사람은 때때로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곤 한다. 바라보고 부러워하며, 때로는 눈을 떼지 못한다.
어린 날의 내가 그랬다.
어린이날 선물을 받는 아이들이 왜 그리 부러웠는지. 가족들과 함께 한강공원에 앉아 옹기종기 모여 뜯어 먹는 치킨이 왜 그리 맛있어 보였는지.
길거리를 걸어도 다정하게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으며 당당하게 앞만 보고 가는 아이들이 왜 그리 부러웠는지.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볼 수 있는, 여타 흔하디흔한 가족들에게서 왜 그리 시선을 뗄 수 없었는지.
그래.
그것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가족 여행도 가본 적이 없었다.
여행이란 말에 따라나서면 산 넘고 물 건너 어디 시골 마을에 짱박히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중이 되어서야 그게 빚쟁이를 피하기 위함임을 알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딱히 없었다.
“준비는 다들 됐니?”
“네, 너희는?”
어머니의 물음에 이노스가 대답하며 나와 셰키나를 바라보았다.
이노스는 셰키나를 보는 게 영 익숙하지 않은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난 다 했어.”
“…저도.”
작게 대답한 셰키나가 이게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더니 눈을 살살 굴렸다.
“진짜 내가 꼭 가야 하는 거야?”
그녀는 차마 크게는 묻지 못하고 내게 바짝 붙어 귓가에 작게 말했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이 상황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응.”
물론 나는 생각할 것도 없는 듯이 단호하게 대답해 줬고.
“…….”
셰키나는 다행히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뭐, 이렇게 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니까.’
공교롭게 이런저런 일로 인해 셰키나도 나도 인생이 제대로 얽혀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이상 엉망이 되진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어쭙잖지만 어느 정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영위할 수 있는 걸 영위하면 좋겠다.
“나는 솔직히 지금 마음이 편해. 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
“넌 진짜 내가 행복해져도 아무렇지 않아?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
“철천지원수가 평생 원수가 되란 법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작게 읊조린 그녀는 이내 준비를 다 마친 아빠의 재촉에 엉거주춤 마차에 올랐다.
커다란 마차는 다섯 명이 타도 넉넉했다.
특수 주문 제작을 했는지 안쪽이 그렇게 답답하지도 않고 다섯 명이 탔는데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셰키나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포지나라는 섬이다.”
“섬이요?”
“그래, 여기서 항구로 간 다음 거기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지.”
“거기는 관광지예요?”
“휴양지다.”
아하, 휴양지로 쓰는 섬이 있구나.
신기하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셰키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휴양지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아빠가 흘긋 우리 쪽을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너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여서 순간 말을 잃었다.
“당연하지.”
그는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부분이 자랑스러운지 조금 묻고 싶어졌다.
“내가 산 우리 가문 소유의 섬이니까.”
“…예?”
“휴양하기 좋도록 잘 배치해 두었다. 충분히 쉬다가 와도 좋겠지.”
그게 무슨 가족 여행이야.
진짜 귀족들의 스케일이란 따라갈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엄마와 이노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자 셰키나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임이 분명했다.
돈지랄도 풍년이라는 생각 말이다.
“가족 여행 한 번 가려고 섬을 샀어요?”
참다 못해 내가 슬쩍 입을 열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행을 갈 만한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언제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 줄 모르니까.”
그게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탐방하는 재미라는 걸 아빠는 모르겠지.
‘…그래.’
이게 귀족의 삶이다.
“맞아, 넌 뭘 초, 촌스럽게 그런 걸 따지니?”
셰키나가 동공에 거센 지진이 난 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 눈이 지금 제일 흔들리고 있어.
차마 그렇게 대꾸하진 못하고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마차에 흔들리고 뱃멀미에 늘어져서 잠을 자다가 다시 눈을 뜨니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어찌나 뜨거운지 괴로움에 이불 속으로 몸을 조금 파묻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뭐긴 뭐야? 도착해서 네가 하룻밤 꼬박 잔 거지.”
황당함을 담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퍽이나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셰키나는 이미 이 섬에 적응을 한 모양새였다.
“…아니.”
“뭘 그런 표정을 지어?”
“아니야. 기억이 다 날아가서….”
“날아갈 만했어. 멀미가 그렇게 심했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배 위에서 난리였어.”
멀미가 있었나?
사실 평생 멀미가 날 일이 없었다.
한평생을 땅에만 발을 딛고 살았으니까. 배를 타고 어디 나가 볼 일이 뭐 얼마나 있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있었나?’
아주 어렸을 때 이름 모를 섬까지 도망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도 호되게 앓았던가?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이라서 떠오르는 것도 없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너 언제 깨어나나 보고 있었는데. 너 없으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야. 얼른 일어나.”
“다들 네 가족인데 뭘.”
내 말에 뭐라고 대꾸라도 할 줄 알았는데, 셰키나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눈을 느리게 내리깔았다.
“그래도 난 네가 제일 편해.”
“원래 자매끼리가 제일 편하대.”
“…자매는 무슨.”
코웃음을 치면서도 딱히 싫어 하는 기색은 아니었기에 굳이 더 말꼬리를 붙잡진 않았다.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딱히. 근데 뭐, 너 일어나면 바다에 가자고 하더라고.”
“바다, 좋네.”
가족끼리 바다에 가서 노는 것도 소원이었지.
이 세계엔 튜브 같은 게 없겠지?
그건 좀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식사는 다 했지?”
“응. 귀찮은데 자꾸 데리러 오잖아.”
그런 것치곤 역시나 싫은 기색은 아니다.
‘저렇게 익숙해지는 거겠지.’
나는 가볍게 하품을 하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말이 가족 여행이지, 꽤 많은 인원의 사용인이 함께 이 섬에 왔다.
의원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고.
당연하게도 메리와 골드 역시 그 안에 있다.
내가 일어난 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메리와 골드가 와서 내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셰키나가 책을 접었다.
“가자.”
“으응.”
내가 멀미에 늘어져 있을 때 뭔가 대화가 오가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익숙하게 별장을 나섰다.
‘별장, 맞지?’
당연히 본가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꽤 큰 저택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한번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어디 가는 거야?”
“피크닉. 네가 가고 싶다고 했다며.”
“…응.”
그랬었지.
아래로 내려가니 언제 또 소식을 전했는지 엄마와 그런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아빠와 그 옆에 서 있는 이노스가 보였다.
그들도 이미 외출 준비를 끝낸 후였다.
“피크닉이라는 건 돗자리를 깔고 모래사장 위에서 하라는 거라고 하더군.”
“네….”
당연한 얘기를 뭘 그렇게 대단한 것 말하는 양 하는지 신기했다.
“엄마가 점심도 준비했단다.”
“엄마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래, 내가.”
그건 좀 기대된다.
엄마가 손수 싼 도시락은 늘 먹어보고 싶었으니까.
셰키나를 흘긋 보니 그녀도 꽤 기대 어린 표정이었다.
‘나를 기다린 건 날 닦달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내가 언제 일어나는지를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자꾸나.”
다섯 명이서 느긋하게 모래사장을 걸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사용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왜냐고?
파라솔을 펼쳐두고 돗자리를 깔고 상을 차리는, 그야말로 호화롭기 짝이 없는 피크닉이었으니까 말이다.
“…음, 피크닉.”
내가 생각했던 가정적이고 다소 소박한 피크닉과는 꽤 거리가 있다.
“와, 예쁘다.”
그래도 바다는 예뻤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이노스는 자연스럽게 널따란 돗자리에 앉았다.
나와 셰키나도 그 앞에 둘러앉자 괜히 뺨이 붉어지고 조금 멋쩍어졌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좋군.”
아빠가 작게 말하자 엄마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첫 가족 나들이를 기념해서 하나 말하자면….”
아빠가 느릿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우리에게 새 가족이 생겼다.”
그것은 어쩐지 천지가 개벽할 것만 같은, 폭풍 전야의 느낌이 진하게 나는 첫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