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30)

<126화>

‘사랑이 뭐더라.’

짹짹, 아침부터 새가 우렁차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퀭한 눈으로 생각했다.

‘잠을 못 잤네.’

어제 그러고 카펠이 돌아간 후로, 뭐랄까 나는 정신이 없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일이 겹쳤던 탓이다. 고백받은 것부터 사귀게 된 경위까지 심상치 않았다.

“아니, 난 또 그걸 왜 받아들였지?”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였는데 생각해 보니….

‘나 대체 무슨 짓 한 거야.’

쪽팔려라.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반년만 사귀어 보자고 한 것도 어이가 없다.

아니, 아니이!

“대체 왜 그랬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푹 숙였다. 이러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 잠도 못 자고 이게 뭐야.”

소풍 전날 들뜬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유예를 준 건….’

물론 날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는 여태까지 누군가를 내 곁에 두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물며 평생을?

그냥 어렴풋이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고 떠올린 적은 있지만, 그뿐이었다.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날 위한 시간을… 딱히 가진 적이 없네.’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는 생존하느라 바빴고, 이후에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다.

“미래 계획도 하기는 해야겠지.”

나는 뒷덜미를 가볍게 매만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곤 해도….

‘딱히 모르겠다.’

뭐가 행복한 건지, 뭐가 행복하지 않은 건지. 어떻게 해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는 건지도.

“야, 언제까지 자려고?”

그 때 셰키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노크 좀 하면 안 돼?”

“했어, 네가 반응이 없어서 들어온 거고.”

반응이 없으면 보통 밖에서 부르거나 돌아가서 나중에 오지 않나.

“…근데 굳이?”

“굳이. 혼자 밥 먹기 싫으니까 일어나.”

“…식당에 내려가면 아빠도 있고 이노스도 있을 텐데?”

“내가 너 없이 거기 껴서 뭘 해?”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내가 꼼질꼼질 일어나 설렁줄을 흔들자 머지않아 메리와 골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손길에 내가 흐물흐물 끌려 들어가는 동안 셰키나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데 요즘 왜 셀렘이 안 보이지?’

며칠 안 들어올 땐 그냥 그렇구나 생각했는데, 이제 거의 얼굴도 보여주질 않으니.

‘계약자라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겠고.

뭐, 거래는 이미 모두 끝났으니 여기서 이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말은 좀 하고 가지.’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뭐가 되는 거야.

“아가씨, 많이 피곤하세요?”

“으응, 조금. 왜?”

“눈 그늘이 짙어서요.”

메리가 내 뺨을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아.”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가 빙글 웃었다.

“계속 거기 있게?”

옷을 갈아입으려는데도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묻자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같은 여자끼리 뭐 숨길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건 없지….”

사사건건 옳은 말만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에 살짝 분노가 올라왔다.

“그래, 네가 다 옳다.”

“원래 난 옳아. 틀린 말은 잘 안 하는 성격이라.”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보면 진짜 아빠랑 성격이 똑 닮았다니까.

“자, 준비 다 되셨습니다.”

“응, 고마워.”

“아니에요, 식사 맛있게 하고 오세요.”

메리의 말에 내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도니 어느새 셰키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니, 저렇게 같이 식사하고 싶으면 혼자 가면 되잖아….’

솔직하지 못하네, 정말.

잠을 전혀 자지 못해서 눈앞이 살짝 어지럽기는 했다.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셰키나의 손길에 이끌려 계단을 느릿느릿 내려갔다.

“너 밤새 뭘 했길래 그렇게 졸려하는 거야?”

“생각이 많았어.”

“생각? 왜? 이그나 가문의 공자를 거절해서?”

“아니, 그거 때문 아니야.”

그 뒤에 다른 일이 있었거든.

차마 그 말을 덧붙이진 못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이미 식탁에 앉아 있는 아빠와 이노스가 보였다.

‘여긴 또 왜 식사를 안 하고 있는 거야?’

식사 시간에서 30분이 훌쩍 지났는데 말이다. 괜히 조금 민망했다.

신문을 보고 있던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늦었구나.”

“늦잠을 좀… 잤어요. 먼저 들고 계시지.”

“아침 식사는 가족 다 같이 하는 편이 좋으니까.”

“…네.”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일전에 말했던 피크닉을 가려고 하는데….”

식사하던 아빠가 느리게 운을 뗐다.

“네 어머니도 괜찮다고 하더구나. 슬슬 이쪽으로 돌아올 예정이기도 하고.”

“전 언제든 괜찮아요.”

“저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이노스가 곧장 그 뒤를 받았다. 뭐, 일정이야 사실 가장 바쁜 아빠한테 맞추면 그만일 테니까.

“너는?”

아빠의 시선이 셰키나에게 돌아갔다.

셰키나는 자신을 말하는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식사를 계속했다.

“셰키나.”

내가 셰키나의 팔을 살짝 치자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왜?”

“너도 시간이 되나?”

아빠가 다시 한 차례 물었다.

“…저요?”

그녀가 답지 않게 당황한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내가 누구한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가족…여행에 제가 왜 가나요…?”

“내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으면 대충 가족이라고 볼 수 있지.”

그게 뭔데.

나도 예상하지 못한 말에 아빠를 바라보는데 이노스가 눈을 크게 뜬 것이 보였다.

그도 아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지, 갑자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빠를 봤다. 하지만 아빠는 나를 힐긋 보더니 셰키나의 대답을 다시 기다릴 뿐이다.

“…제가 가는 건 좀.”

잠시 고민하던 셰키나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왜, 같이 가자.”

“내가 거기를 대체 왜 가?”

“나도 같이 가고 싶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같이 살 거면 역시….”

셰키나가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살기는 무슨…, 진짜 속도 없는 년.”

그러곤 냅킨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만 먹겠습니다.”

셰키나가 몸을 홱 돌려 식당을 벗어났다. 은근히 붉어진 귓불이 보였다.

‘너무 밀어붙였나?’

그렇다고 해도… 아마 영 싫은 건 아니겠지.

저번에 얘기 꺼냈을 때도 그렇게 싫은 반응은 아니었고.

“아네트.”

“네, 아빠.”

“내게 숨기는 것이 있구나.”

역시, 뭔가 눈치챈 게 분명했다. 더 숨길까 했지만, 사실 더 숨기기엔 양심에 가책이 있었다.

“말하려고 했는데, 말하지 말라고 해서… 말을 못 했어요.”

“…저 애가, 내가 오래전 잃어버린 내 딸인 거냐?”

주변에 사람을 물리고 툭, 던지듯 물어오는 말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빠가 나를 탓하는 것도 아니고 이 이야기를 해도 아빠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것도 아는데, 조금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게 무슨…,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노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맞아요.”

“…그렇군.”

“아니, 아네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얘기가 긴데….”

“시간은 많으니 말해 보렴.”

아빠가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허의 악마와 셰키나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해서.

“…말도 안 돼.”

“…그래, 그런 거였군.”

세계가 겹쳤다느니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사실 필요하지 않았다.

“저 애가 친동생이라고?”

“음, 그렇지….”

“…허.”

이노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둘 다 내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진 않았다. 사실 왜 여태 숨겼느냐고 한마디쯤은 들을 줄 알았는데.

“진짜 세상엔 별의별 일이 다 있네.”

이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말 못 하느라 끙끙거렸을 텐데 고생했어.”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혼날 줄 알았는데.’

아빠를 흘긋 봐도 내게 유감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 애와는 내가 다시 얘기해 보마. 피크닉은 로사나가 오면 다시 논의해 보는 것으로 하지.”

“오신다고요? 이쪽으로요?”

“그래, 피크닉은 다 함께 가야지.”

나는 슬쩍 아빠를 보곤 뺨을 살짝 긁적였다.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네트, 마음 쓰지 말아라. 얘기하기 어려웠을 걸 아니까.”

“…네.”

그가 내 뺨을 가볍게 문질러주곤 식당을 벗어났다.

나도 곧 이노스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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