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딱히 춥거나 덥거나 한 날씨는 아니지만, 지붕에서 계속 기다렸다는 건 지금까지 밖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꽃이라도 두고 가려고….”
카펠이 언제나처럼 물로 만들어진 꽃을 내밀며 말했다.
“갑자기 올 줄 몰랐어,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그의 말에 나는 엉거주춤 꽃을 받아 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온종일 밖에서 기다렸다는 애한테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아침?”
“아침….”
지금이 자정이 넘어 새벽에 가까우니, 거의 열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기다렸다는 것이다.
“너도 대단하다…. 내가 없으면 그냥 가지.”
“그냥… 오늘은 보고 싶었어.”
카펠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네트, 한 번만 안아봐도 돼?”
그가 눈치를 보며 슬쩍 두 팔을 벌렸다.
아래로 늘어뜨린 눈꼬리가 어찌나 안쓰럽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
꽃 하나 주겠다고 열두 시간 넘게 기다린 애를 쫓아 보낼 정도로 나는 악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카펠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확 끌어안았다.
카펠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고마워. 아네트.”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그냥 보고 싶었어.”
품에 날 끌어안은 카펠이 내 어깨에 가볍게 이마를 묻었다.
“닉스 이그나는….”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닉스 이그나랑 있었어?”
무슨 얘길 하려다 말을 바꿔 내게 물어왔다.
“응, 오늘 같이 있었지.”
“…울었어?”
“음, 조금.”
내 대답에 카펠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음, 그렇긴 한데…. 괜찮아.”
“닉스 이그나가 좋아?”
“아니, 받아줄 수 없어서 거절했어.”
내 대답에 카펠의 눈이 커졌다.
놀란 듯 바라보던 그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거절했어?”
“응,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닉스 이그나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절한 것이고.
“그럼… 나랑 함께해 줄 수 있어? 내 게 되어줄 수 있어?”
“그….”
“아니, 내가 네 거가 될 기회를… 줄 수 있어?”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나는 입술을 몇 차례 뻐끔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리가 오래 알고 지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접점이 있었던 건 아니잖아.”
솔직히 얼마 전까지는 그를 동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난, 아네트를 좋아했어. 줄곧.”
“…….”
“네 곁에는 당연히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어.”
나를 끌어안은 채 카펠이 말했다.
“아네트는, 내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마치 내가 없으면 카펠은 괜찮지 않다는 것처럼 들려서 말이다.
“나는 아네트가 있어야 해.”
“…나는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 잘….”
“네가, 나를 유일하게 알아봤잖아.”
처음으로 눈을 마주해 줬다고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좋아해, 그냥… 좋아해.”
“…….”
“그냥 좋았어, 그냥 네가 좋았는데… 이유가 필요해? 나는….”
눈을 일그러뜨린 카펠의 목소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툭툭 쓰다듬었다.
“아니, 내가 실언했어. 이유는 필요 없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물론 이유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마음에 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본능적으로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듯,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게 어린 시절의 각인이었을지도 모르지.’
짐승처럼 자란 카펠에게는 누군가 강제하지 않은 채 제 옆에 앉아 음식을 함께 먹어준다는 것이 깊게 남았을 수도 있다.
“응, 좋아해….”
매달리는 손길이 퍽 애처롭다.
‘나 이런 거에 약한가 보네.’
그래, 확실히 예전부터 카펠에게는 무른 부분이 있었지.
‘따뜻하네.’
온기는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 널 가지고 싶어. 네 삶에 내가 큰 이유가 되었으면 좋겠어.”
“…너 정말 청산유수가 됐네.”
이제까지 이렇게 말도 안 하고 대체 여태 어떻게 지냈는지 의아할 뿐이다.
“아네트는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조금 둔한 면이 있기는 하지.”
특히 이쪽 방면으론 말이다.
“내 연인이 되어주면 안 돼?”
“…연인?”
“응. 네게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자리를 내게 줘.”
“…….”
이런 말은 어디에서 배워 온 거지.
어린애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져서, 대체 어떻게 이런 요망한 말을 내뱉게 된 건지.
“네게 내 말이 얼마나 가볍게 들릴지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카펠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멈추더니, 이윽고 뜨거운 숨결이 뒤섞였다.
“나는 지금도….”
“카펠, 잠깐….”
“네게 들키면 경멸할 게 뻔한 생각들을 하고 있어. 이런 마음이… 겨우 작은 동경일 리가 없어.”
“…….”
코앞까지 다가와 눈을 마주치고 말을 하니 얼굴이 절로 확 달아올랐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뜨거워진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내가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불쾌하다고 느꼈던 적은 없다.
손길도 이런 포옹도 늘 담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가볍게 안고 언제나 가볍게 물러났다. 가끔 와서 어리광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잠깐이었다.
동생이 누나에게 하는, 가벼운 투정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날 경멸할까 봐 지금껏 꾹 참아왔어.”
“…….”
“닉스 이그나와 사브나크 아데우스에게도 말해 뒀었는데….”
“마, 말했다고? 뭘?”
카펠이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그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잠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숨을 깊게 삼켰다.
“그게, 아네트는…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까….”
카펠이 뺨을 붉히며 이어 말했다.
“넘보지 말라고…?”
“하지만 닉스는….”
“거짓말을 했어.”
그러곤 표정을 확 구겼다.
‘아니, 뒤에서 그런 얘기를 했단 말이야?’
순간 좀 당황스러운 기분에 뺨을 긁적였다.
대체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손을 잡으면 싫어…?”
“아니…?”
그냥,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싫지도 않고, 그렇다고 설레지도 않는다.
“그럼 내게도 기회를 줘. 닉스 이그나에게만 기회를 주는 건 불공평해.”
“…….”
“내 연인이 되어줘.”
카펠이 나와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의 표정을 보곤 슬쩍 눈을 굴렸다.
아니,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괜히 내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내 연애운은 사실 이 세계에 와서 트일 예정이었던 건가?’
그가 이렇게나 호의를 가지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 아네트도 내가 싫지 않다면 나랑 결혼해 줘. 평생, 네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카펠이 뺨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난, 네 곁에 있고 싶어.”
아니, 내 얼굴이 다 붉어지네.
발끝부터 누군가 간지럽히는 것 같더니 이내 심장 안쪽마저 간질거리는 듯했다.
정말 가슴을 열어서 심장을 긁어버리고 싶어질 정도다.
“응? 나랑 사귀자.”
아니, 무슨 이런 요망한 여우 같은 게 다 있어?
바싹 얼굴을 들이밀고 눈꼬리를 늘어뜨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읊조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가 녀석의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좀 떨어져 줄래….”
부담스러워 죽겠거든.
차마 그 말을 덧붙이진 못했다. 카펠은 더 매달리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꾹 누르며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네 삶을 그렇게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사귀는 건 한 달….”
“…….”
축 가라앉은 시선이 내게 닿았다.
“아니, 알겠어. 반년 정도야. 알겠지?”
“응.”
그 눈망울을 견디지 못하고 냉큼 말을 바꾸자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응, 반년 동안… 아네트한테 쓸모 있는 사람이 될게.”
“…….”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아네트.”
“난 버린다고 한 적 없어.”
아니, 애초에 버린 적도 없다.
그냥 친구라고,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이는 카펠이 더 많은 걸 알았지만 말이다.
“가끔 아네트는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하니까….”
“내가?”
“응, 그래서 불안했어.”
카펠의 솔직담백한 말에 순간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네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아네트의 도움이 될게.”
“…그러지 않아도 돼. 그냥, 내가 너랑 평생 살 마음이 들게만 하면 되잖아.”
“응, 그러니까 도움이….”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굳이 그게 어떠한 도움일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좋아해….”
덧붙이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해 주는 대신 가볍게 그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