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끅끅 울고 있던 닉스 이그나가 한참 만에 조금 진정이 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벅벅 문지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너 뭐야?”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내 손수건까지 가져가 놓고 성질을 내는 거야?”
“이건…, 네가 준 거고.”
닉스 이그나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꽉 쥐며 말했다.
누군가 주길래 받기는 했지만, 되돌려 주기에 축축해서 조금 그랬다.
쓰고 있던 로브를 벗자, 셰키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가 닉스 이그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너 뭐냐고.”
“글쎄…, 네가 방금 차인 여자애랑 같이 사는 친구?”
셰키나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아네트의 등을 떠민 사람이 그녀였다.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그리 무겁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아네트가 조금 고까웠던 부분도 있다.
물론 그녀로선 악의는 없었겠지.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을 전부 가져놓고도 배부른 줄을 모르니까.
‘아니, 애초에 가졌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한없이 가볍게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알지만….
“애초에 쟤는 네 인연이 아니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아네트를…!”
닉스 이그나의 눈이 확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는 눈두덩을 꾹 누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정리하기로 했으니까 친구인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정리할 거야.”
아네트에게 친구라고 했으니, 닉스 이그나는 어떻게든 그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도 사랑이 꺾였다고 해서 친구를 잃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네 인연은 따로 있어.”
셰키나는 인간이 아닌 공허의 악마로서 지내오며, 많은 것을 보았다.
닉스 이그나는 나중에 한눈에 흠뻑 빠질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반해서 그녀와 백년해로하게 될 것이다.
“조만간 이그나 공작이 네게 임무를 줄 거야. 아마, 보르도 마을에 가게 되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거기에 가면 네 진짜 인연이 있을 거고.”
셰키나가 닉스 이그나에게 말했다.
“뭐, 그러니까 그만 울어. 너 같은 열혈 캐릭터가 울면 없어 보이거든.”
“…너 대체 뭐야?”
“말했잖아, 그냥 아네트랑 같이 사는 친구라니까?”
셰키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도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볼게. 그 손수건은 버리든 태우든 마음대로 해.”
“뭐? 나중에 돌려줄….”
“응, 필요 없어~”
그녀는 미련 없이 저택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에 닉스 이그나가 헛웃음을 삼키곤 붉은 손수건을 손에 쥔 채 몸을 휙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부에게 가볍게 손짓하자 그가 마차를 끌고 다가왔다.
“진짜 이상한 여자네.”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멎어버릴 정도다.
뺨을 한 차례 긁적인 닉스 이그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폭풍도 아니고….
“보르도 마을은 또 뭐야?”
거긴 여기서 꽤 떨어진 북쪽에 있는 마을 아닌가.
그것도 산 위에 있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만년설 속에 숨겨진 마을.
“거기에 갈 리가 있어?”
그가 추운 곳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이그나 공작인 그의 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다.
‘운명이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렇게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 감정이 마치 금방 사라질 듯이 말을 하는 것이 다소 불쾌했다.
‘피곤해.’
닉스 이그나는 붉은 손수건을 손에 꽉 쥔 채 마차 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
“…오지랖이 옮았나?”
작게 중얼거리며 셰키나는 저택으로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 막 방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제 방 앞에 서 있을 사람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뭐야? 너.”
“닉스한테 다녀왔어?”
“…….”
아네트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아네트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산책….”
“창문 밖으로 다 보이던데.”
“…….”
셰키나는 움찔 어깨를 떨고는, 순간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뒤늦게 여기서 정문이 있는 곳까지는 제대로 시야가 트여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역시, 맞지?”
아네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갑자기 무슨 상관이야?”
“아니, 상관은 없지. 그냥…, 으음. 뭔가 네가 등 떠밀 때부터 이상한 느낌은 있었거든.”
“그냥 네가 남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한 말인데.”
셰키나의 말에 아네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카펠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잖아.”
따지고 보면 카펠 아르고 역시 아네트에게 고백한 것은 같았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셰키나는 닉스 이그나만을 콕 집어서 얘기했다.
“그렇구나, 네가 닉스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
“관심은 무슨! 그냥 불쌍해서 한 말이야! 카펠 아르고가 너한테 고백한 줄도 몰랐고!”
몰랐을 리가 있나.
아네트가 대놓고 혼인 제안서를 읽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딱히 접점도 없었을 텐데.’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아네트가 웃었다.
“근데 넌 또 눈이 왜 그래? 설마 울었어?”
“음, 조금?”
“뭐야, 너 걔 좋아했어?! 그럼 그냥…!”
“아니, 그건 아니야. 아니니까 거절한 거고. 다만… 그냥 미안해서.”
말을 하고도 스스로가 이상한지 아네트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뺨을 가볍게 긁적였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아니면 아닌 거지. 너도 참 이상하다.”
셰키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스스로가 이상했다.
아네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막 내쉴 때였다.
“난 네가 닉스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몰랐는데. 뭔가 접점이라도 있었어?”
“없어, 그냥 얼굴이 좀 취향인 거지.”
“얼굴?”
“그리고 몸이랑….”
“음, 몸…. 확실히 좋긴 하지.”
힘이 세서 그런지 전신에 자잘하게 붙어 있는 근육들이 보기 좋기는 했다.
어깨도 떡 벌어진 게 이그나 공작이 될 미래가 뻔히 보였다.
“그치? 피부색도 그렇고 성격이 호쾌한 것도 그렇고, 꽤 취향이야.”
“음, 맘에 든 거 맞네.”
“그럼 뭐 해, 어차피 남의 떡인데. 그냥 동경이지.”
셰키나는 별 기대도 없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동경…?’
아네트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너 닉스 이그나처럼 되고 싶어?”
“뭐?”
“그러니까 닉스 이그나처럼 몸 좋고 살짝 가무잡잡한 피부에 호쾌한 성격을 가지고 싶은….”
“미쳤니? 나한테 그런 게 퍽이나 어울리겠다. 그리고 그런 거 아니거든.”
셰키나가 황당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닉스 이그나처럼 된 제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부르르 떨기도 했다.
“그럼 그냥 옆에서 보고 싶은 거?”
“뭐, 그런 거지.”
“누가 그러던데.”
아네트의 말에 셰키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앞을 가로막고 있을 거냐는 그 눈빛에 아네트가 슬쩍 자리를 비켰다.
“그 사람이 되고 싶으면 동경이라는데, 그게 아니라는 뜻이지?”
“그런가 보지.”
“역시 좋아하는 거 아냐?”
“너 진짜 끈질기네. 귀찮으니까 네 방으로 돌아가.”
셰키나가 한숨을 내쉬며 아네트의 어깨를 가볍게 옆으로 밀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아네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이런 꼴로.”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라고 덧붙인 뒤 셰키나는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으음, 예쁘다니까 내 말을 안 믿어주네.”
난감할 뿐이다.
‘하긴, 셰키나 입장에선 내가 그런 말을 해봐야 소용없겠지.’
다 가진 자가 베푸는 동정 정도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아, 친구 되기 어렵네.”
작게 중얼거린 후 아네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방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셰키나의 방에 왔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오늘 그녀가 자신을 따라다녔음을 눈치챘다.
‘그냥 찔러본 건데 정말이었을 줄이야.’
늦었지만 간식이나 같이 하자고 하려 했는데 아쉬울 뿐이다.
“으음, 잠이나 자야겠다.”
그래도 대화 잠깐 나눴다고 조금 괜찮아진 것도 같고.
방으로 들어가자 언제부터 열어두었는지 바람이 휙 불어왔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아네트, 안녕.”
“…카펠?”
또 어떻게 들어온 거야.
“또 멋대로 들어왔네.”
“허락을 받으려고 계속 기다렸는데 오늘 온종일 없어서….”
“계속 기다렸다고? 어디서?”
“지붕에서…?”
환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