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뭐, 뭐라고요?!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무례한 건…!”
“잠시만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부티크 샵의 주인이 앞을 확 가로막았다.
셰키나의 손을 강제로 푼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영애를 유리구슬 다루듯 위로했다.
“세상에, 괜찮으신가요? 영애.”
“이, 이… 너 내 부모님이 누군지 알아?! 내 아버지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후작님이시라고!”
“아, 그러셔? 여기 있는 얘 아버지는 누군지 알고?”
“저기 손님! 이만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폭력적이고 예의 없으신 분들은 제 가게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와, 오랜만에 받아보는 문전박대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담이 셰키나의 어깨를 붙잡곤 거칠게 그녀를 내쫓기 시작했다.
“이거 안 놔?!”
한 성질 하는 셰키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드러냈다.
“당장! 나가 주세요!”
“우리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닌데 왜 우리한테만 그러는지 물어도 될까요?”
나는 문 안에 버티고 선 채 빙긋 웃으며 물었다.
“폭력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예의 없게!”
“아, 이거 후회는 안 하죠?”
“하, 제발 좀 나가 주십시오. 저분들이 어떤 분들이신 줄 알고….”
한숨을 내쉰 주인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 보는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요. 뭐, 나갈게요. 가게 주인이 안 된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나는 순순히 가게를 나서며 주인에게 말했다.
“아, 근데 그쪽은 이 나라 떠날 준비 빨리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시간이 많진 않을 테니까,”
“하? 뭐라고요?”
“음, 한 푼이라도 남기고 싶으면 가게도 빨리 처분하는 게 좋겠네요.”
“무슨 소리를….”
“아, 저쪽 영애들께는 앞으로 저희 물건이 들어가는 가게는 이용하지 못할 거라고도 전해 주세요.”
나는 방긋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안쪽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여럿 보였지만, 나는 애써 불쾌감을 누르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눈에서 불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셰키나가 있었다.
“저 미친 것들 뭐야?! 감히 누구한테…!”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를 토하는 셰키나를 보면서 나는 가볍게 웃었다.
“넌 웃음이 나오냐?”
“괜찮아, 괜찮아. 아마도… 보고가 들어갔을 것 같으니까.”
나는 가볍게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내 거래처들에도 말해 둘 거야. 손님을 차별하는 가게는 싫어하거든.”
“그래 봐야….”
“셰키나, 품질 좋은 물건을 납품하는 상단은 전부 내 가게에 물건을 들이는걸.”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수도에 오는 상단 중에 내 백화점과 거래를 트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만큼 백화점의 하루 이용객 수와 매출은 엄청났다.
물론, 골목상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일정 가격으로 내리진 않고 있었고.
소량의, 그리고 품질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선 백화점을 이용하는 편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일반 시장을 이용하는 편이 더 좋도록 말이다.
“겨우 후작 영애 따위가….”
셰키나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듯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셰키나, 화내지 마.”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가게는 많잖아.”
“…진짜 쓸데없이 성격만 물러터져서는. 다 썩은 토마토도 아니고.”
내가 등을 느릿느릿 쓸어주자 그녀가 으르렁거리면서 몸을 홱 돌렸다.
“썩은 토마토라니….”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아마 욕이겠지.’
그런 것치곤 꽤 심하지 않은 욕이라는 게 또 신기할 뿐이지만 말이다.
쇼핑을 마저 끝내고 돌아가니 현관 앞에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
“그래, 잘 다녀왔나?”
“네.”
아빠가 힐긋 셰키나를 보자 그녀가 흠칫 어깨를 떨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곤 내 뒤로 슥 몸을 숨겼다.
아까 씩씩거리던 모습이 거짓인 것처럼.
“쇼핑은 잘 했나?”
“네, 덕분에 꽤 많이 샀어요. 셰키나 것도요.”
아빠가 왜 나왔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소란이 있었다던데.”
“음…, 있었는데 전 괜찮아요. 딱히 해코지를 크게 당한 것도 아니고요.”
“해코지를 안 당하기는 무슨!”
뒤에서 울컥한 셰키나가 언성을 높였다가 흠칫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빠의 시선이 느리게 내 뒤에 숨은 셰키나에게 돌아갔다.
“너도 괜찮나?”
내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상황을 살피던 셰키나의 어깨가 한 차례 움찔했다.
“…저요?”
“그럼 아네트 뒤에 또 누가 있지?”
진짜 퉁명스럽기는.
‘그래도 의외네….’
나서서 말도 걸어주고.
나를 지켜줬다고 보고해서 그럴까? 아니면 아빠도 뭔가를 눈치챈 걸까?
후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뭐… 그것들이 재수 없었다는 것만 빼면, 나쁘지 않았…는…, 않았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아빠는 가볍게 대답하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와 셰키나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보곤 아빠의 뒤를 졸졸졸 쫓아 저택으로 들어갔다.
‘묘하네.’
나는 뺨을 가볍게 긁적이곤 웃었다.
셰키나가 제 가슴을 두어 번 쓸어내리는 것이 뭔가 묘한 모양이다.
“뭐, 나쁘지 않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셰키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기분 좋은 하루였다.
***
“얘는 또 어디 간 거야?”
심심해서 다과나 먹자고 하려 했더니 아네트는 방에 없었다.
셰키나가 쯧쯧 혀를 찼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오라고 해서 찾아오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희희낙락 유유자적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하물며 함께 쇼핑을 하거나 다과를 먹자고 찾아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고 말이다.
‘그냥 내 몸을 돌려받으려고 했던 것뿐인데.’
따지고 보면 셰키나의 입장에서 아네트는 도둑이었다. 몸을 훔쳐 간 도둑.
물론 그 몸을 잃어버린 것에 제 잘못도 있고, 아네트 역시 원했던 상황이 아님을 알지만.
그런데도…
왜 화가 나지 않는 것인지.
이름마저 뺏겨 셰키나라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름을 쓰고 있는데도, 그 멍청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돌려받을 수 없다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참이었는데….’
꼴을 보아하니 이미 진즉에 그건 물 건너간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평생 여기 얹혀살 수도 없고.’
적당한 때에 떠나야 함은 안다.
함께 쇼핑해서 산 옷을 입고 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복도를 거니는 제 모습이 어쩐지 썩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 세계와 멀어진 채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하아….”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올 때였다.
“그렇게 내쉬어서야 바닥이 꺼지기야 하겠나?”
“꺄악…!”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셰키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크게 홉떴다.
“고, 공작 각하…?”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군.”
“…가, 갑자기 나타나시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까요?”
“글쎄, 내가 꽤 잘생겨서 놀란 거라면 확실히 신빙성은 있지만 말이야.”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셰키나의 눈이 한 차례 가늘어졌다.
이어 차마 성격대로 쏘아붙이진 못한 셰키나가 슬쩍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이를 생각하시는 건 어떨까요?”
“나이? 그게 뭐가 문제가 되지?”
“주책이라는 단어는 아세요?”
“글쎄, 나 같은 사람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던가.”
진짜 상대를 못 하겠네.
순간 그렇게 생각한 셰키나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셰키나가 더는 상대할 이유를 못 느끼고 막 몸을 돌릴 때였다.
“네가 내 딸을 꽤 힘들게 했었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셰키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흘긋 뒤를 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못마땅하신가요? 나가라고 하시면 나갈게요.”
셰키나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차라리 잘됐네.’
어차피 나갈 타이밍도 잡지 못했는데 이대로 쫓겨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말로 평생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왜 그랬었지?”
“그야 공녀 자리가 탐나서 그렇죠. 얼마나 좋아요? 원하는 거는 뭐든 다 가질 수 있는 자린데.”
셰키나가 어깨를 으쓱이곤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순간 어찌나 비열하게 보이던지, 샤콜 오브리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서라도 가지고 싶은 거였나?”
그 물음에 셰키나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