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30)

<118화>

“아니,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미, 미안해. 나는 단지 안이 고민이 있어 보여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카펠이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변을 맴돌면서 말했다.

“많이 놀랐어? 놀라게 하려던 게 아니라….”

“놀랐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가 거기에 대답을 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단, 나는 아니다.

“미안….”

카펠의 말에 나는 느리게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아.”

근데 얘 뭔가 말이 좀 유창하네….

내 착각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카펠이 내 앞에 조심스럽게 서서 허리를 살짝 굽혔다.

“보고 싶었어, 안….”

“어, 나도….”

“…안겨도 돼?”

그가 꽤나 기운 없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바람에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펠이 활짝 웃으며 내 품에 조심스럽게 안겨왔다.

안아주는 게 아니라 정말 내 품에 슬쩍 안겼다. 엉거주춤 양팔을 뻗어 카펠의 등을 감싸자 그가 작게 웃었다.

“안…, 좋아해.”

“응응, 나도 좋아.”

카펠의 등을 도닥거리며 대답하자 그가 내 품에서 벗어났다.

“아냐, 나는 네가 여자로서 좋아. 동생으로서가, 친한 친구로서가 아니라….”

“…어?”

“안이 내 것이면 좋겠어. 나만 봐주면 좋겠어. 나는… 안의 동생이 되고 싶지 않아.”

머리통 한 개보다 더 작은 내 품에 안긴 카펠이 내게 말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진심이었다.

그냥 어린 시절에 제일 처음 음식을 나눠 주고 함께 있던 때부터 단순히 친한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어, 언제부터…?”

“처음부터.”

“처음…?”

처음이면…, 내가 빵을 입에 쑤셔 넣어줬던 그날부터?

“그, 빵…?”

“응.”

“대체 왜….”

“안이 유일하게 내게 하지 말라고 안 했거든. 안이 유일하게 내 마음을 알았어. 안만… 내 옆에 앉아줬어.”

그랬겠지.

보통은 어떻게든 식탁에 앉혀놓고 식사를 하게 하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그건 그냥….”

강요해 봐야 좋은 거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해, 안. 아네트….”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 서툴러 보였던 그가, 지금 굉장히 유창하게 말하며 내게 구애하고 있었으니까.

“곁에만 있어도 좋아. 안이 싫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카펠이 내 어깨에 제 이마를 올린 채 느리게 꾹 눌렀다.

“그러니까 이그나랑 결혼하지 마.”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아….”

닉스 이그나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닉스 이그나가 내게 고백할 때 카펠이 꽤 충격받은 얼굴로 자리에서 뛰쳐나갔었지.

‘그거 때문이었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기댄 카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카펠이 슬쩍 굽혔던 허리를 폈다.

“닉스의 제안은 생각해 보기로 한 거야. 아직 결정하진 않았어.”

“응, 나로 해. 나로 해주면 안 돼?”

내 말에 카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 침울해 보이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나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곤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닉스와도 약속을 해서 아직 너한테 먼저 대답해 줄 순 없어.”

그와 함께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닉스에게 먼저 거절의 답변을 해야 했다.

그 얘기를 카펠에게 먼저 하는 것은 닉스에겐 실례였다.

“…응, 나한테도 기회를 줘.”

“아니, 내가 뭐라고….”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그동안 살기 위해서 닉스와 카펠에게 크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 나로 해줘. 아네트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을게.”

카펠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절로 커졌다.

“카펠, 왜 그런 말을….”

“…누가 오네, 이만 가볼게. 안. 선물이야.”

그가 언제나처럼 내게 물로 빚은 꽃을 내밀었다.

카펠이 주고 가는 꽃들은 시들지 않아서 이 꽃으로 꽃밭을 만들었을 정도다.

심는다고 해서 더 자라거나 파릇파릇해지는 건 아니지만, 방에 꽂아두기엔 그 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한쪽에 심어두기 시작했다.

작게 시작했던 그 꽃밭은 이미 뒤뜰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또 올게, 안.”

“다음에는… 정식으로 와줄래? 카펠.”

아무래도 자꾸 창문으로 드나드는 행위는 슬슬 고쳐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응, 그럴게.”

카펠이 활짝 웃고는 그대로 창문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아….”

저것도 고치라고 하자.

심장 떨어지겠다.

벌컥-

꽃을 막 갈무리하려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셰키나였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한껏 꾸민 그녀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팔다리 색이 다른 건 긴 소매와 장갑으로 가려져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푸석푸석하고 혼탁하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은 기름칠을 해서 잘 꾸며두니 도리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와, 예쁘네.”

“뭐… 뭐?”

내 말에 셰키나가 더듬거리며 엉거주춤하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예쁘다고.”

“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당연히 예쁘고 사랑스럽고 천재적이지.”

“어….”

내가 거기까지 말했던가?

하지만, 굳이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셰키나가 뺨을 붉힌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르고 소공작이라도 왔다 갔어?”

“어떻게 알았어?”

“그 꽃, 아르고 공작가에서만 피울 수 있는 거잖아.”

“아, 그렇지.”

이런 물로 된 꽃을 흔하게 볼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좋겠네, 사랑받고 있어서.”

셰키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이 꽃의 의미가 뭐길래 아빠는 볼 때마다 불쾌한 표정을 하는 걸까?

“이 꽃에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

어째서인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단 말이지.

“모르고 받은 거야?”

“그렇지…?”

“…태평해서 좋겠다.”

셰키나가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홱 돌렸다.

“얼른 가자, 나 바쁘니까.”

아니, 그래서 뭔데.

바쁘긴 뭐가 바빠. 집에서 할 일도 없으면서.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으니 셰키나가 내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인 것이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뭐가?”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예전에는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날 것 같았는데 말이다.

“가자.”

그리고 나는 탈탈 털렸다.

쇼핑하면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끌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던 내 생각과 달리, 끌려다닌 쪽은 나였다.

그냥 몇 벌 옷을 제작해 달라 주문하고 장신구 같은 것만 쇼핑하고 돌아오려 했던 나와 다르게 셰키나는 정말 진심이었다.

옷가게도 종류별로 들어가 보고 장신구 역시 보석 가게를 하나하나 들어가 정말 꼼꼼하게 살피며 구매하기 시작했다.

“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그리고 통도 컸다.

‘…아빠 돈을 이렇게 써도 되나?’

상관이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걸 다 사게?”

“날씨나 분위기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르니까. 다음은 저쪽으로 가자.”

“어, 어어….”

언제는 관심 없다더니….

자기가 제일 신났다.

이번에는 꽤 커다랗고 화려한 부티크에 들어섰다.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영애들끼리 함께 쇼핑을 온 모양이었다.

“야, 이건 어때?”

“음, 괜찮은데…. 너한텐 저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나 말고 너 말이야.”

“나? 나는 뭐….”

그녀가 추천해 준 드레스를 막 유심히 살피던 때였다.

“어머, 여기가 언제부터 어중이떠중이 시골뜨기들이 올 수 있었던 곳인가요…?”

“어디서 더러운 흙내가 난다고 했더니…”

“야만인에게 옷을 입혀놓는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줄 아나…?”

“흙내만 나나요? 촌뜨기 냄새도 나는데. 아휴, 구려라.”

엥?

쟤네가 지금 뭐라니?

나는 혹시 내가 지금 어디가 아파서 말을 잘못 들었나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귀를 가볍게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마담, 여기 물관리 안 하나요? 정말 수준 떨어지게….”

여기가 무슨 어항이냐? 물관리를 하게.

“아휴, 귀한 영애님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안쪽에서 옷감을 살피던 가게의 주인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아, 쟤넨 내 얼굴을 모르겠구나.’

하긴 제대로 얼굴을 내민 적이 세미 데뷔탕트 때 한 번뿐이니, 나를 모르는 게 이해가 됐다.

“어디서 시골 촌뜨기들이 와서는….”

“저기….”

“야, 저것들이 뭐라고 하는 거야? 무슨 늙은 호박처럼 생긴 것들이.”

내가 막 입을 열려는 때였다.

셰키나가 내 옆을 성큼성큼 치고 나가더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영애 중 하나의 멱살을 붙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셰키나, 잠깐만….”

“꺄아아악! 이, 이 야만인이 대체 무슨 짓을!”

“너희야말로 호박에 옷 입혀둔다고 사람 될 것 같냐?”

셰키나가 대놓고 시비를 건 영애를 비웃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