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30)

<117화>

“그 앞에 있는 거 말고 다른 음식 좀 줄까?”

그래도 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있는데.”

그나마 셰키나가 퉁명스럽게라도 반응해 주는 게 다행이었다.

‘근데 고개를 들면 보이잖아.’

왜 한사코 고개를 들지 않으려는지 모르겠다.

“어, 닭고기랑 돼지고기랑… 과일도 있고….”

“과일 뭐?”

“저 앞에 있는데.”

내가 저 수많은 과일을 다 읊어줄 순 없잖아.

내 말에 셰키나가 로브를 꾹 누르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로브 아래로 눈동자만 굴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거.”

셰키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뭐?”

“저 하얗고 동그란 거.”

“아, 복숭아?”

“몰라, 어쨌든 그거.”

그녀는 말하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로브로 얼굴을 다시금 감추는 행동이 콤플렉스가 상당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은데….’

물론 처음 봤던, 그 성녀 때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때보다 피부가 살짝 어두울 뿐이다.

양쪽 눈 색이 다른 것도 세상에 오드 아이인 사람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팔과 다리의 피부색이 다른 것은 신경이 쓰일 수도 있겠지만, 잘 보이진 않을 텐데.

‘하긴, 내 일이 아니니까.’

함부로 말하는 것도 실례인 일이다.

‘근데 저 복숭아 저대로 가져다주면 되나?’

깎아 먹는 건가, 아니면 껍질째로 먹는 건가?

“식사 중에는 로브를 벗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 때 아빠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이며 말했다. 동시에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다가와 복숭아 두 개를 챙겼다.

“금방 올려드리겠습니다.”

시녀는 허리를 굽혔다 펴고는 복숭아를 들고 식당에서 물러났다.

“아….”

“내 집 식탁에 앉을 땐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셰키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손가락을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보며 나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빠, 셰키나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 순간 그녀가 내 허벅지를 가볍게 꾹 붙잡더니 다른 손으로 천천히 로브를 걷었다.

“괜찮아?”

“…어.”

대답을 해줬지만, 어쩐지 셰키나는 고개를 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역시 충분히 예쁘지 않나….’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억누르며 다시 음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숭아 좋아해?”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한 내 질문에 셰키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네트.”

“네, 아빠.”

“오늘 할 일이 없다면 쇼핑이라도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쇼핑이요?”

“그래, 내 저택에서 로브만 입고 다니는 꼴을 볼 수는 없으니까.”

아빠가 그렇게 말하며 우아한 동작으로 식기를 내려놓았다.

흘긋 이노스를 보자 그도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멈췄던 식사를 마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가 있지?”

“어, 딱히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아빠가 저렇게 허락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이거 같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 맞겠지?’

사실 저택에 웬 외부인을 들이냐고 막았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너, 혹시 유제품에 알레르기가 있나?”

“…….”

아빠의 질문에 셰키나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가 살짝 위아래로 주억였다.

“대답은 제대로 하도록.”

“…네, 아니, 아니요….”

까다롭다, 까다로워.

그래도 제 아버지라고, 아빠에게 꼼짝 못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셰키나가 신기했다.

“…그렇군.”

아빠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랑 아니요는 뭐야?’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그럼 조금 이따가 나랑 옷 사러 나갈래?”

“…….”

셰키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싫다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쇼핑이라도 갔다 오라고 한 아빠의 말을 곱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가기 싫으면 디자이너를 불러도 괜찮아.”

“누가, 안 괜찮대?! 가! 갈 거야.”

“어, 그래.”

셰키나가 대답하곤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뒤로는 아빠도 이노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소소한 대화가 잠깐 오갔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노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식사 자리는 끝이 났다.

아빠도 머지않아 일이 있다며 식당을 나서서 나랑 셰키나만 식탁에 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너 알레르기 있어?”

“몰라, 예전에 먹고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겠지. 내 몸이 아니니까.”

자조적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게 트라우마일 수 있으니까 안 먹는 게 낫겠네.”

꼭 몸에 반응이 나타나야만 그게 트라우마라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오늘은 옷 사러 나가 보자고.”

“…그러든가.”

셰키나가 복숭아 한 조각까지 싹싹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내가 이런 말 하면 화낼 것 같긴 한데… 너 예뻐.”

“뭐?”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다고. 양쪽 팔다리 색이 조금 다를 뿐이지….”

그게 크나큰 흠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숨기고 싶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부위이기도 하고 말이다.

“눈 색깔도 다 다른데….”

“그게 예쁜 거지. 특별하잖아.”

내 말에 셰키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더불어 부르르 떨리는 뺨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생긋 웃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당기자 셰키나가 목을 살짝 움츠렸다.

“어쨌든 나가자.”

“…진짜 성격도 좋다, 너는. 자존심이 없는 건지. 나한테 이러고 싶어?”

“나 여기 와서 누구누구 때문에 제대로 된 여자 친구를 못 사귀었거든.”

시한부 인생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던 것도 있고.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아니, 그렇게 말 안 했는데?”

왜 발끈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짜증 난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곤 코웃음을 쳤다.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이 자못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랑 같이 쇼핑을 가는 건 처음이야. 전생에서도 물론 없었고.”

사실 전생에서는 친구뿐 아니라, 돈도 없었다.

“누, 누가 네 친구야!”

“그럼 우리가 뭔데? 자매? 난 그거여도 상관없지.”

여자 형제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 이, 뻔뻔한…!”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펑 터질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도 무섭지 않다.

“너, 너랑 나는 적이지! 나는 네 몸을 뺏으려고 하고 너는…, 아무튼!”

그녀가 나를 내 방으로 밀었다.

“얼른 준비나 하고 나와!”

“너는?”

“나는 이대로 갈 거야.”

“음… 그러고?”

로브를 둘둘 둘러싼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쇼핑하러 간다기보단 어디 은밀한 제안을 하러 가는 사람 같다.

“아빠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내가 그 사람까지 뭐 하러 신경 써?”

“응, 신경이야 안 써도 되지만….”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간다는 거지?”

“그래!”

“진짜 저렇게 가네….”

“…….”

“와, 거길 저렇게 간다고?”

내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며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뭐가 불만이야?!”

따라 들어온 셰키나가 내게 소리를 질렀다.

“어…, 아무래도 이 정돈 입어줘야지.”

나는 활짝 웃으며 외출용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말했다.

“…웃기는 소리를.”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본 셰키나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메리, 골드!”

“네, 아가씨.”

“네.”

두 사람이 동시에 셰키나의 두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내 친구도 잘 부탁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야, 야! 야! 너, 너 가만히 안 둘…!”

셰키나가 메리와 골드에게 붙잡혀 멀어지며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음, 대충 어떻게 대하면 될지 알 것 같네.’

그동안 몇 차례 꺾이면서 셰키나도 꽤 많은 걸 포기하고 인정하게 된 게 분명했다.

이 저택에 들어온 것으로 누그러진 부분도 있겠지.

‘그냥 전부 가족이 되면 좋겠는데.’

그럼 내 이 미묘한 죄책감도 사라지고 셰키나도 편해지지 않을까.

물론 현실적으로 그녀가 진짜 가족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아빠가 셰키나를 입양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하지만 셰키나가 어린 나이가 아니고, 이제 와서 공작가에서 그녀를 입양한다면 구설수에 휘말릴 것이다.

아빠가 과연 그 리스크를 감당해 줄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래도 같이 지내다 보면 가족처럼 지내게 될 수는 있겠지.’

언젠가는 말이다.

“아, 피곤해.”

남이랑 부딪치며 산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피곤해? 안.”

“응, 피곤… 으악!”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자리에서 펄쩍 뛰자, 어느새 당황한 얼굴로 상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카펠이었다.

1